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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잘 만드는 시대는 끝났다

AI가 너무 잘 만들기 시작하자, 오래된 손맛이 다시 비싸지고 있습니다.

2026.08.21 | 조회 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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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김광혁 대표

최근 스레드에서 꽤 재미있는 영상을 봤습니다.

Steelcut Studio 라는 크리에이터님이 만드신 광고 영상들입니다.

아무것도 광고하지 않는 샴푸 광고 - 스튜디오 스틸컷
아무것도 광고하지 않는 치킨 광고 - 스튜디오 스틸컷  

 

몇몇 사람에게 보여줬더니 반응이 재미있었습니다.

“좀 투박하지 않아요?”
“만듦새가 살짝 떨어지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게 바로 이 영상의 재미입니다. 못 만들어서 거친 게 아니라, 거칠게 만들기로 한 겁니다. 작가님의 다른 작업물들을 보면 이분 그냥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매끈하게 만들면 오히려 이 광고 특유의 병맛과 이상한 질감, 묘하게 기억나는 분위기가 죽어버립니다.

요즘 AI 이미지와 영상을 보다 보면 이상한 기준이 하나 생긴 것 같습니다.

“얼마나 실사 같으냐.”

피부가 진짜 같은지, 빛이 정확한지, 움직임이 자연스러운지. 손가락이 여섯 개는 아닌지. 물론 중요합니다. 특히 마지막 것은 꽤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잘 만든 것’의 기준일까요?

 


광고는 원래 기술 자랑 대회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던 1995~2002년 무렵, 칸 광고제나 클리오 광고제 수상작을 찾아보는 걸 정말 좋아했습니다. 당시 광고들도 최신 CG와 특수효과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지금 보면 합성이 조금 보이고 움직임도 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 다시 봐도 그 시절 광고들은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2001년 Cannes에서 Gold Lion을 받은 John West Salmon의 'Bear'라는 광고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시작합니다. 

  John West Salmon - 'Bear'  

당시에는 실제 촬영과 디지털 합성을 섞어 만든 꽤 정교한 특수효과 광고였습니다.

그런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광고를 보고 기억나는 건 CG가 아닙니다. “곰이랑 연어 가지고 싸우던 그 미친 광고.” 바로 그겁니다. 그거라고요. 기술은 당시 최신이었지만,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광고는 아니었습니다. 기술은 이야기를 더 황당하고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사용됐습니다.

 

비슷한 시기 Little Caesars Pizza는 더 황당했습니다.

피자 배달 서비스를 알리면서 배달원들을 무슨 특수부대처럼 훈련시켰습니다.

  Little Caesars Pizza -  Gobi Desert

피자 하나 배달하는 데 왜 고비사막까지 가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재밌지 않나요? 

이 캠페인은 당시 Clio에서 여러 개의 Gold Clio를 받았습니다. 지금 보면 촬영 기술이나 특수효과가 놀라워서 기억나는 광고가 아닙니다. 아이디어가 미쳤기 때문에 기억나는 광고입니다.

 

하나 더 볼까요?

1999년에는 Nike 'The Morning After'가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인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가 만든 광고입니다. 당시는 Y2K 공포가 한창이었습니다. 2000년 1월 1일이 되면 컴퓨터 오류 때문에 금융 시스템이 멈추고, 비행기가 떨어지고, 도시 기능이 마비될 거라는 이야기가 꽤 진지하게 돌던 시절이었죠. 광고는 그 공포를 그대로 가져옵니다.

2000년 1월 1일 아침.

  Nike - The Morning After

  세상이 망하든 말든.  Just Do It. ㅋㅋ

이 광고도 당시 기준으로 대규모 세트와 특수효과, 합성, 영화적인 연출이 상당히 들어간 작품입니다. 그런데 역시 기억에 남는 건 기술이 아닙니다. “세상이 망해도 러너는 뛴다.” 그 한 줄짜리 아이디어입니다.

스파이크 존즈를 좋아하는 이유도 저는 이런 데 있습니다. 이상하고 황당한 상황을 엄청난 제작비와 기술로 구현하면서도, 정작 관객에게는 기술을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술은 뒤로 숨고 이야기가 앞으로 나옵니다.

좋은 광고에서 기술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배우였지,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Steelcut Studio님의 영상을 보면서 오히려 그 시절 광고가 떠올랐습니다. 

조금 이상하고,
조금 과장되어 있고,
그래서 끝까지 보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현재 AI 영상이 넘치고,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가장 필요한 핵심 요소입니다.

 


그런데 AI가 너무 잘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 Design Week에 재미있는 칼럼이 하나 실렸습니다. 제목은 'AI can’t replace happy accidents'. AI는 반복 작업을 엄청나게 빠르게 처리하지만, 작업 도중 발생하는 우연과 실수까지 제거해버리면 창작에서 가장 재미있는 발견 역시 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AI가 점점 완벽해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함 자체의 가격은 떨어집니다. 누구나 깨끗한 이미지를 만들고, 누구나 그럴듯한 영상을 만들고,누구나 멋진 레이아웃을 만들 수 있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무엇이 비싸질까요?

판단입니다.

어디를 완벽하게 만들고, 어디를 일부러 무너뜨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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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해 보이는 것도 완벽하게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Instagram

이번 달 인스타그램은 10년 만의 대대적인 브랜드 리프레시를 공개했습니다. 처음에는 15년 넘게 사용한 필기체 워드마크를 없애는 안까지 검토했습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새로 만들수록 이상하게 인스타그램 같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존 워드마크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새 그래픽 시스템에는 콘택트시트, 손으로 남긴 흔적, 작업 과정에서 나온 듯한 그래픽 등 지나치게 정제되지 않은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새것처럼 만드는 대신 시간이 쌓인 흔적을 디자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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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I

환경단체 CASI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재미있습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방법대로 로고를 깔끔하고 단순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매끈하고 평평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방향을 뒤집어서 생각했습니다.

손으로 잘라 붙인 것 같은 그래픽, 조금 삐뚤어진 형태, 사람 몸의 움직임에서 따온 기호를 만들고 애니메이션도 직접 촬영한 움직임을 한 프레임씩 다듬었습니다. 결과물만 보면 조금 서툴게 만든 콜라주처럼 보입니다.하지만 사실은 서툴러 보이도록 아주 치밀하게 만든 디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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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lo × CASI 프로젝트 보기
https://templo.co.uk/work/casi

 

이 둘에서 중요한 것은 ‘거칠게 만들자’가 아닙니다.
거칠어 보이고 대충 만들어 보이는 것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며칠 전 K-PRINT에 갔습니다.

 

거대한 출력 장비들은 더 빨라졌고, 더 정확해졌고, 자동화는 무서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있으니 오히려 20여 년 전 충무로가 생각났습니다. 당시 작은 금박집, 재단집, 도무송집에는 나이 든 기술자분들이 많았습니다. 학력이 높은 것도 아니고, 일은 힘들고, 돈을 많이 받는 직업도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그분들을 근사하게 ‘장인’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후가공 아저씨, 금박집 사장님
딱, 그 정도였습니다.

현대금박 김용춘 사장님
현대금박 김용춘 사장님

그런데 20년이 지나 상황이 묘하게 뒤집혔습니다. 일반적인 출력과 인쇄는 계속 자동화되고 있는데 금박, 특수재단, 도무송처럼 경험과 정밀한 손기술이 필요한 후가공은 여전히 사람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대형 인쇄소조차 어려운 작업은 결국 잘하는 전문 업체와 기술자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전문 작업장의 몸값은 오히려 올라가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분들의 손에 들어있던 것은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었습니다. 이 종이는 압력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이 금박은 온도를 어디까지 올려야 하는지, 칼이 어디에서 미세하게 밀리는지. 수십 년 동안 실패하고 고치면서 몸에 저장한 데이터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수십 년 동안 자기 몸을 직접 학습시킨 모델인 셈입니다. GPU도 안 쓰고요.

 


완벽함이 흔해지면, 불완전함도 디자인해야 합니다.


요즘 저는 디자인을 하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더 완벽하게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완벽하게 만드는 것보다 무엇을 완벽하지 않게 무너뜨려 사람들의 기억에 남길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모든 선을 반듯하게 만들 수 있으니 한 선을 비틀어보고, 모든 이미지를 실사처럼 만들 수 있으니 일부러 이상하게 만들어보고, 모든 것을 새것처럼 만들 수 있으니 오래된 흔적을 남겨보는 겁니다.

물론 아무렇게나 망가뜨리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못 만든 것과 못 만든 것처럼 만든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실력의 문제지만, 후자는 판단의 문제입니다.

Steelcut Studio의 이상한 영상도,
Instagram이 남겨둔 오래된 워드마크도,
CASI의 삐뚤삐뚤한 그래픽도,
충무로 장인의 미세한 손끝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평균적인 기술은 자동화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빠르게 싸집니다.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판단과 감각은 오히려 희소해집니다. 20년 전 충무로 골목에서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할아버지들의 손이 가장 귀한 기술이 되어가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AI 시대는 새로운 기술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동시에 오래된 기술의 가치를 처음으로 제대로 발견하는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완벽함은 싸졌습니다. 앞으론 더 싸질겁니다.

그래서 이제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능력은 완벽하게 만드는 기술만이 아닐 겁니다. 

어디까지 완벽하게 만들고,
어디에서 정확하게 무너뜨릴 것인가. 
저는 요즘 그게 더 재미있습니다.




' 구독자' 님은 요즘 무엇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계신가요?
가끔은 한 군데쯤 일부러 삐뚤게 놔둬보셔도 좋겠습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반듯하게 정리된 부분보다
이상하게 튀어나온 한 구석일지도 모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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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번주는광고와디자인이야기를신나게한김광혁이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물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너무 완벽하게 살지는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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