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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떠오른 다섯 단어

블록버스터, 돼지, 뼈, 망자, 그리고 놀란

2026.08.10 | 조회 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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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김광혁 대표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 보셨나요?
원래 금요일에 발행되는 뉴스레터지만 이슈가 사라지기전에 먼저 여러분을 만나보고자 이번주는 조금 빨리 발행해 봅니다. 괜찮겠죠? ㅋㅋ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딧세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잘 만든 영화냐고 물으면 잘 만든 영화입니다. 명작이냐고 물어도 아마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액션도 놀란의 전작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제 취향이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닙니다. 《덩케르크(Dunkirk, 2017)》를 보다가 졸았는데 이번에도 졸았습니다. 이쯤 되면 놀란과 저 사이에는 영화보다 수면으로 맺어진 어떤 인연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건 극장에서는 졸아놓고 집에 와서는 자꾸 영화 생각이 났다는 겁니다. 특히 다섯 단어가 계속 머리에 남았습니다.

 

블록버스터, 돼지, 뼈, 망자, 놀란.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아르고 황금 대탐험(Jason and the Argonauts, 1963)》이었습니다. 레이 해리하우젠의 대표작이죠. 거대한 청동상 탈로스가 움직이고, 히드라가 나오고, 마지막에는 해골 병사들이 땅에서 솟아올라 인간과 싸웁니다.

지금 보면 스톱모션 특유의 움직임이 당연히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괴물의 무게는 아직 느껴집니다. CG가 없던 시절이니 진짜 모형을 만들고 한 프레임씩 움직였고, 배우도 실제 세트와 로케이션 위에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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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족 '라이스트뤼고네스'도 영화에 나옴
거인족 '라이스트뤼고네스'도 영화에 나옴

《신밧드의 항해(The 7th Voyage of Sinbad, 1958)》의 외눈박이 거인도 생각났습니다. 《타이탄족의 멸망(Clash of the Titans, 1981)》도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잊기 쉬운 게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영화들을 ‘고전영화’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이게 초고가 제작비의 블록버스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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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Ben-Hur, 1959)》, 《스팔타커스(Spartacus, 1960)》, 《클레오파트라(Cleopatra, 1963)》 같은 영화들도 거대한 세트를 짓고 수많은 엑스트라를 불러 모으고 실제 전차를 달리고 배를 띄웠습니다. TV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던 시대였으니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내려면 집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걸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놀란이 지금 하는 일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필름으로 찍고, 실제 배를 띄우고, 실제 장소에 배우를 데려가고, 그것을 가능한 한 큰 화면에서 보여줍니다. 디지털에 지친 관객에게 아날로그의 극대치를 보여줘서 그들을 극장으로 부르는 겁니다.

60년 전에는 당시 가장 혁신적인 시네마스코프였고 지금은 IMAX입니다. 기술은 최첨단인데 욕망은 아주 오래됐습니다. 그래서 오디세이가 묘하게 새 영화 같으면서 옛날 영화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최신 IMAX 블록버스터를 보고 있는데 60년 전 영화들의 유령들이 화면 위로 자꾸 겹치더라구요.

 


2. 돼지

영화에서 오디세우스의 활이 처음 등장할 때 그는 멧돼지를 사냥합니다. 처음 볼 때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오디세우스가 활을 잘 쏜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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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간에 마녀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듭니다. 원작의 키르케는 영화보다 조금 더 서사가 깁니다.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키르케의 마법이 오디세우스에게 통하지 않자.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동침을 요구합니다. 그리곤 1년을 같이 살죠. 사실 둘 사이엔 텔레고노스라는 아들도 있습니다. 오디세이의 후속작인 '텔레네고이아'에선 아버지인 오디세우스를 죽입니다. 

  고전영화 '율리시즈(Ulysses, 1954)'에 나오는 키르케 겁나 이쁩니다.  
  고전영화 '율리시즈(Ulysses, 1954)'에 나오는 키르케 겁나 이쁩니다.  

오랜 세월 끝에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의 집에는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러 온 108명의 남자들이 눌러앉아 있습니다. 주인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밤마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잔치를 벌이며 남의 재산을 축냅니다. 말 그대로 돼지처럼 먹고 삽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처음 멧돼지를 잡았던 그 활을 다시 듭니다. 

페넬로페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 너무 좋았음. 그래 이래야 여장부지
페넬로페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 너무 좋았음. 그래 이래야 여장부지

이번 사냥감은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멧돼지를 향했던 활이 마지막에는 돼지처럼 탐식하던 인간들을 향합니다. 키르케는 돼지로 만들었던 사람을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으며 그걸 추악한 껍데기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런 돼지같다는 이야기지요.

또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를 키우고 기다리고 다시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가르친 종자인 에우마이오스의 직업은 돼지치기 입니다. 그는 끝까지 돼지우리를 관리하고 그의 개를 보살폈으며 축제에 모인 돼지같은 인간들을 한우리에 가둡니다.

그제야 영화 초반의 멧돼지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고전 신화를 많이 알고 보면 가끔 이런 게 문제입니다. 다음 이야기를 알고 있는 대신 앞에서 지나간 이미지까지 자꾸 되새김질됩니다.

 


3. 뼈

그리고 아가멤논입니다. 저는 이상하게 이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만큼이나 아가멤논이 중요하게 보였습니다. 특히 투구와 황금빛 뼈 때문입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해골 같았고, 머리 뒤로 길게 내려오는 부분은 척추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완전히 놀란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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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네 시대에는 실제로 멧돼지 엄니로 만든 투구가 있었습니다. 멧돼지의 엄니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가죽이나 천 위에 붙여 머리를 보호했고, 《일리아스》에도 이런 투구가 등장합니다. 짐승을 죽이고 그 뼈를 머리에 두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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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은 이 역사적 흔적을 꽤 불길한 이미지로 바꿉니다. 특히 아가멤논의 투구는 머리에서 척추가 자라난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 초반의 아가멤논은 거대합니다. 트로이를 정복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움직이고, 전장은 폭발하고, 수많은 인간이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 트럼프를 떠올렸습니다. 트럼프도 지옥 갔으면 좋겠습니다. ㅋㅋ

그런데 영화 후반, 서쪽 끝 죽음의 땅에서 다시 만나는 아가멤논은 전혀 다릅니다. 이번에는 작고 정적입니다. 그토록 많은 땅을 차지하려 했던 사람이 저승에서는 아무것도 차지하지 못한 채 망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이 유난히 강렬했던 건 아가멤논의 죽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트로이로 가기 위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까지 신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승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까지 희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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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정작 자신이 가장 안전해야 할 곳에서 죽습니다. 자기 집에서, 그것도 자신의 아내에게.

큰 땅을 차지하고 돌아온 왕이 결국 자기 침대에서 죽는다는 건 꽤 잔인한 역설입니다. 딸을 신에게 바치면서 자신은 살아남았다고 생각했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신에게 바쳐진 마지막 제물은 어쩌면 아가멤논 자신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제야 투구의 해골과 척추도 처음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을 가져가는 왕의 장식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이미 머리에 쓰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4. 망자

오디세우스가 서쪽 끝 죽음의 땅에 도착했을 때 《아르고 황금 대탐험(Jason and the Argonauts, 1963)》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옛날 신화영화에서 해골 병사들은 칼과 방패를 들고 살아 있는 인간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이에서 그 자리에 있는 건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과 아가멤논입니다. 한때 수많은 병사를 움직이던 왕도 이제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왕도 병사도 모두 망자가 되어 저승을 떠돕니다.

 

움직이는 GIF 이미지 1 움직이는 GIF 이미지 2

 

전쟁에서는 계급이 있었지만 죽음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장면이 영화 초반과 정확히 반대편에 놓여 있다고 느꼈습니다. 초반에는 한 사람의 야망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움직이지만, 후반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복해야 할 땅도, 지휘해야 할 군대도,
빼앗을 왕국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죽은 사람들뿐입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를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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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놀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감독도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우리는 놀란을 굉장히 현대적인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IMAX, 거대한 기술, 복잡한 시간 구조, 물리학, 우주, 원자폭탄.

그런데 저는 오히려 이 사람이 철저한 고전주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필름을 좋아하고, 실제 장소를 좋아하고, 실제 물체를 좋아합니다. 가능하면 세트를 만들고 배가 필요하면 배를 띄우고 비행기와 공항을 폭파하며 거대한 풍경 앞에 사람을 세워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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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놀이하며 좋아하는 놀란옹
뱃놀이하며 좋아하는 놀란옹

이번에는 이야기까지 서양 서사의 가장 오래된 원형 중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고전 신화를 현대화한 영화라기보다 고전 신화가 영화를 만들던 방식을 현대의 돈과 기술로 다시 만든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 취향이 조금 갈립니다. 저는 놀란의 메멘토(Memento, 2000),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 인셉션(Inception, 2010),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 테넷(Tenet, 2020)을 좋아합니다.

그 반대편에는 덩케르크(Dunkirk, 2017)와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가 있습니다.

조너선 놀란은 내가 좋아하는 '웨스트월드' 각본 쓰고 연출도 함
조너선 놀란은 내가 좋아하는 '웨스트월드' 각본 쓰고 연출도 함

처음에는 혹시 동생 조너선 놀란 때문인가 싶었습니다. 실제로 메멘토는 조너선의 단편에서 출발했고, 다크 나이트와 인터스텔라에는 조너선의 각본 작업이 깊게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셉션과 테넷(Tenet, 2020은 크리스토퍼 놀란 단독 각본입니다. 결국 제가 좋아하는 건 ‘동생 놀란’이라기보다 장르영화를 만드는 놀란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기억상실, 배트맨과 조커, 꿈속 침투, 웜홀과 시간 지연, 시간 역행. 이쪽의 놀란은 언제나 관객이 먼저 붙잡을 수 있는 강한 장르적 장치를 하나 던져놓고 그 안에 철학과 형식을 집어넣습니다.

반대로 덩케르크나 오펜하이머에서는 형식과 체험과 엄숙함이 조금 더 앞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놀란이 고전을 가지고 놀 때를 좋아하고, 고전 앞에서 경건해질 때는 좀 졸리는 모양입니다. 오디세이도 제게는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잘 만든 건 알겠습니다. 액션도 훨씬 좋아졌고, 화면도 압도적이고, 사운드는 특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 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의도야 알겠지만 굳이 IMAX여야 했나 싶기도 했고, 오히려 저에게는 화면보다 사운드가 훨씬 중요한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같은 생각입니다.
놀란에게서 예술과 엄숙을 조금만 빼고
장르를 더하면 저는 훨씬 좋아할 것 같습니다.
아마 놀란은 그럴 생각이 없겠죠.
저도 이제 포기했습니다.


구독자님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 어떠셨나요?

저는 오늘 왠지 거대한 양철 냄비에 담긴 돼지 등뼈 감자탕이 먹고 싶네요. 생각해보면 이번 놀란 영화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냄비도 크고, 등뼈도 크고, 들어간 것도 엄청 많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푹 고아서 국물도 진합니다. 분명 잘 만든 명품 감자탕입니다.

그런데 너무 배가 부르면 잠이 옵니다.
저는 그래서 이번에도 졸았나 봅니다. ㅋ


😎💘

행복한 한주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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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지금까지영화가별로라고해놓고이만큼이나길게쓴김광혁이었습니다.
다음글도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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