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23. 정사각형 마주보기

세점사이의 스물세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10.02 | 조회 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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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스물세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추석도 지나갔는데, 명절은 잘 지내셨나요? 저는 프리랜서로 생활하고 있다 보니 연휴는 그냥...택배 안 오는 기간이라서 그냥 그렇습니다. 대체공휴일인 것도 엊그젠가 알았어요. 오늘은 인스타그램의 사각 프레임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습니다. 사진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오랜만이네요.


정사각형 마주보기

 

방 안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침대 쪽을 문득 보면 어느새 부드러운 빛이 온 방에 내려앉아 있다. 동북향이라 쨍한 직사광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반사광도 역시 아름답다. 몇 년째 보고 있기에, 찍어 봐야 뭐가 특별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괜히 장식장에서 주섬주섬 카메라와 렌즈를 꺼내 본다. 바디에 렌즈를 끼우고, 전원을 켜고, 셔터를 누른다. 이처럼 쓸데없이 끊어 적어 숭고해보이기까지 하는 일련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에 찍힌 광경은 보잘것없다. 정리가 덜 된 이부자리 위에 널브러진 침침한 빛, 창문, 포스터, 인형, 충전기, 책꽂이. 넓게 찍혔을 때는 그 밑에 선풍기와 서랍장과 스피커와 책상 같은 것들도 있었지. 나는 장면 속에서 구체적인 아름다움을 느껴 찍었으나 카메라가 그려낸 자리에는 그것이 없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그건 웅성임 속에 짜부라져 있다. 그리하여 일련의 사진들에는 자기배반적인 의문문이 붙는다. 이걸 왜 찍었지? 나는 이 모든 것을 줄여서 이왜찍이라 부른다.

보정도 안 해놔갖고 클라우드 한참 뒤진 사진 진짜 이걸 왜 찍었지
보정도 안 해놔갖고 클라우드 한참 뒤진 사진 진짜 이걸 왜 찍었지
빛이 아름다워 찍었지만 프레임 안에 남은 것은 잡동사니들 뿐이다.
빛이 아름다워 찍었지만 프레임 안에 남은 것은 잡동사니들 뿐이다.

인스타그램이 사실을 왜곡하느니 하는 이야기는 이제 식상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해졌다. 인스타그램의 프레임 밖을 보여주겠다며 네모진 틀 바깥에 지저분한 잡동사니가 널브러진 모양새를 보여주는 건 한 때 많이 쓰였던 풍자의 방식이지만, 어쨌든 그 우스개가 틀 안의 미학 역시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 안의 것들은 자신의 존재를 실체로 증명했다. 내 방 안의 빛을 가장 진실에 가깝게 담는 방법은 정사각 틀 바깥으로 다른 사물들을 빼내는 것. 내가 보고있는 것을 온전히 드러내기.

작업실 가는 길에는 여름이면 배롱나무 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다. 그게 참 예뻐서 종종 핸드폰 카메라로 찍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쓱 찍고 나면 사진 안에는 한국식 상가 건물의 모조 대리석만 가득하다. 베이지 색깔 벽의 존재감은 이상하리만치 크고 배롱나무 꽃은 산산히 흩어져 볼품없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나는 열 번을 다시 가도 대리석 대신 꽃을 바라볼 것이라는 걸. 그렇다면 어느 쪽이 진실한가? 그 꽃을 찍을 때는 줌인을 해 근처 풀잎들을 배경으로 삼는다. 대리석은 보이지 않았고 꽃은 이미 그곳에 있다. 꽃은 가짜인가?

누군가는 벽면을 중점으로 찍을 것이다. 누군가는 둘 다를 담을 것이다. 누군가는 조금 다른 각도를 담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 각자의 직시는 다르다.

 

그러므로 날것으로 넓게 찍은 사진만이 현실을 온전히 드러낸다고 믿는 것은 무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름답게 내려오는 햇살이 있는 어느 골목길을 핸드폰 카메라로 넓게 찍는다면, 그 사진 안에는 내가 본 것과 동일한 광경이 담겨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쓰레기, 전선, 혹은 자동차. 간판이 시선을 끌고 아무렇게나 놓인 공유 킥보드가 보일지도 모른다. 인스타그램이 왜곡하는 현실에 대해 성토하는 이들조차 카메라 안에 자신이 보는 광경이 정확히 담기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그들 역시 그 햇빛을 보았다. 진실을 운운하며 프레임 바깥을 끄집어내는 것은 악의적으로 과장된 캐리커쳐를 들이밀며 현실을 알라고 들먹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보고 진짜 얼굴을 유추할 수는 없다.

사진을 찍는 이들마저 이런 식의 시니컬함에서 자유롭지 않다. 포토들이 종종 보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을 본다. 자신의 카메라는 진실을 담았는데 어째서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하느냐고 분개하는 사람들. 물론 과도한 보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늘 있다. 요구사항을 반영하다 보면 이미지의 질감은 금방 망가지고, 형편없어진다. 그건 사진을 만드는 입장에서 아주 곤란한 일이다. 다만 저런 성토를 하는 이들의 사진이 실제로 피사체의 매력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경우 역시 다반사여서 그런 말들에 대해서는 조금 편견이 있다. 

나는 지금껏 진실한 얼굴을 온전히 담아본 일이 없다. 이전에 인터뷰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랬다. 인터뷰이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그의 이전 인터뷰들을 읽고, 현장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나는 어떤 아우라를 생각하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셔터를 누르기 전 별 행동들을 다 해본다. 배경을 선정하고, 조명을 설치한다. 소품을 쥐어주고, 행동을 가장한다. 웃으라고 말하거나 무언가를 골똘히 쳐다봐 달라고 주문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가진 탁월함의 말단만을 겨우 포착한다. 그러나 이것은 편집된 것이다. 형광등 빛 아래 거칠게 찍은 사진에서는 그의 미덕이 드러나지 않는다. 형광등은 진실인가? 그렇다면 편집은 진실을 가리는가?

어떤 종류의 말들을 들으면 모든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기괴한 필터에 속아 자신의 얼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만 같다. 카메라로 찍었을 때 드러나는 온전한 진실, 무시할 수 없는 몇천만 화소의 얼굴. 카메라로 사람을 담았을 때의 일들을 생각해보자. 광학적 오류는 실제 모습에 비해 피사체의 얼굴을 평평하게 하거나 도드라지게 한다. 잡티나 주름은 고정된 상태로 부각되고, 그가 가진 자연스러운 작은 움직임은 빼앗긴다. 그가 가졌던 광채나 윤기도 시간을 잃고, 힘 있는 목소리나 조심스러운 태도 역시 침묵하게 된다. 본질적으로 박제와 같다. 원하지 않는 것들은 도드라지고 아름다운 것들은 건조해지며 존재는 그 부피를 잃은 상을 거대한 크기로 뽑아 전시한다. 그것은 얼마나 일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나가는 타인의 시선을 빌린다는 객관은 그 앞에 온전한가? 어느 행인이 타인의 얼굴을 그렇게 평할 것인가. 배롱나무 꽃을 보는 행인은 행인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사진사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무보정이란 말의 우스움을 알고 편집적 제시의 실체를 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하고 어플리케이션에 의한 허영을 말하기 위해 어느 순간, 어설프게 찍힌 사진을 진실의 위치에 세운다. 이 위악이 적어도 중립과 객관은 아닐 것이다.

사무실 가는 길의 배롱나무 꽃
사무실 가는 길의 배롱나무 꽃

철저히 중립적이고 철저히 객관적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말들은 너무 자주 오용된다. 철저한 타인은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켜 2인칭의 존재를 깎아내리기 위해 소환된다. 그러나 N번째의 행인을 상대로 가장 불리한 부분들만을 꼬집는 것을 더이상 중립적 행인으로 볼 수는 없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사진에는 편집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직시할지 결정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는 이들은 비정함이라는 말로 포장된 주관적 폭력을 인지해야 한다. 

얼마 전 메타는 인스타그램의 후속 SNS로서 쓰레드를 선보였다. 결말을 말하자면, 망했다. 쓰레드의 초기 유저들은 인스타그램의 허영과 위선을 타파하겠다고 나섰으나 실상 그들이 보인 것은 위선적 위악이었다.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겠다며 형편없는 콘텐츠들을 양산하는 이들은, 사람을 질리게 했다. 어처구니 없이 얼굴을 구긴 사진보단 차라리 단장을 한 사진이 진실했다. 집 밖에서 마주칠 확률은 적어도 후자가 훨씬 높았으므로. 그렇기에 이들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비관적 시니컬함이 아무런 정보값도 가지지 못함과 마찬가지로. 

그 대신 보아야 할 것은 말과 말 사이일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피드에서 지우기로 결정한 것들, 혹은 올리지 않기로 결정한 것들. 그것이 가리키는 것들. 드러내기로 정한 것들, 그것이 가리키는 것들. 그리고 이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주관적이어야 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점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행간을 파악해 전체 공간을 짐작하는 것은 잡티를 억지로 고정해 확대하는 것과 다르다. 객관을 위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러한 주관들이 모여 진실이 형성될 것이다. 걷어내는 것은 곧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쁘게 담아 홀로 객관을 참칭하지 말 것. 결국 사진을 찍는 것은 객관을 이루는 한 줌의 주관, 한 줌의 진실을 던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 주관 내에서는 이것이 진실임을 자신있게 단정하겠지. 어떤 진실은 어떤 진실과 충돌할 것이고 어떤 진실은 어떤 진실과 절충의 관계를 이룰 것이다. 단순한 미학 바깥, 사회고발적인 시선 역시 사각의 임의적 프레임 안에서야 유의미해진다.

아주 많은 생략들
아주 많은 생략들

하여 나는 매번 기꺼이 편집하고 기꺼이 촬영하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커피잔과 길가의 작은 꽃과 내가 아는 보통의 사람과 처음 만난 대단한 사람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같은 시선으로 한 데 모아놓는다. 그것들이 어떤 연속적 진실을 형성하기를 바라면서. 열화된 것들을 보간하고 굳이 내보이지 않을 것들이 잠들어 있도록 둔다. 그 뒤에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찍었는지 기억해낸다.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므로 사각 틀 안에는 진실이 있다. 드러내고자 하는 구체적 아름다움과 기꺼이 숨기고자 하는 나약한 부분이 있다. 방에 들어온 부드러운 빛과 늦은 오후 교차로에 내려앉은 햇볕 같은 것들, 후줄근한 도시 사이에서 핀 꽃과, 혹은 그 사이의 고통스러운 모습 같은 것들. 해사하게 웃는 모습과 어떤 위대한 것들. 투쟁하는 모양과 사랑하는 모양들. 객관을 위시한 시니컬한 전경에는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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