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38. 닫은 창문 밖에서

세점사이의 서른여덟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4.11.04 | 조회 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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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서른여덟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여전히 바쁜 와중입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면서 글을 쓰고 있어요. 이번주에는 출장 촬영이 있어서 이틀 정도 대전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도 좀 촉박한 일정을 보냈지만 그 와중에 이런저런 메모는 참 많이 한 것 같아요. 무슨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들일까, 사실 애매했는데 모아 보니 한 군데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글 바로 보내드릴게요.


닫은 창문 밖에서

대전역에 내리니 역사 안 성심당 점포 바깥으로 입장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이 계단 위까지 이어졌다. 요즘 성심당이 그렇게 인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원래도 사람들이 적은 건 아니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원래 이게 아닌데, 하고 괜히 재수없이 굴고 싶었지만 이 이상 사람이 멋이 없어지면 그것도 큰일이다 싶어 관뒀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 오기 위해서 이제는 따로 숙소를 구해야 한다는 건 왠지 적응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재수없는 서울 사람처럼 서울에 착 붙어 있을 핑계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너무 오래 못 본 대전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슬슬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대전에 가려다가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매번 다음으로 미뤄 버렸지. 정작 대전에 살 때는 대전 바깥으로 나가본 적도 얼마 없는 애였는데, 출장비가 나오지 않는 이상에는 이제 거의 돌아가질 않게 됐다. 이번에 온 것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촬영 때문이었다. 세종 쪽에서 문의를 주셨는데 나는 내가 아직도 대전 사람이라고 무심코 생각해 버려서, 세종까지 한 시간 반쯤 걸릴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대전엔 정작 잘 오지도 않으면서. 지도를 찾아보고 나서 좀 놀랐지만 이왕 기차를 타는 김에 오랜만에 대전에 잠깐 들르자 싶었다. 돈으로만 보자면 아마도 손해였을 것이다.

카메라 세 대를 들고 왔다. 한 대는 촬영용 메인 카메라였고 한 대는 고객분이 필름 촬영을 신청하셔서 같이 들고 온 필름 카메라, 그리고 한 대는 그냥 휘적휘적 다니며 찍겠다고 들고 온 필름 카메라. 짐은 끔찍하게 무거웠지만 그런 걸 따지기에는 매번 이고지고 다닌 것들이 이미 너무 많았다. 지난번에 올 때도 어쨌든 카메라는 많이 들고 왔었지.

마지막으로 온 게 작년 2월이었으니까 대충 1년 9개월쯤 되었다. 참 웃겨, 차일피일 미루게 되다가도 막상 오니 오는 게 너무 쉬웠다. 사무실에서 서울역이 너무 가까워서. 아, 마지막으로 온 날에도 날씨가 아주 흐렸어서 이상하게 무슨 연속선상에 있는 것 같았다. 꼭 닫아놨다가 잠깐 다시 연 창문처럼. 흐린 하늘 아래 찍을 게 마땅치 않았다는 점도 비슷했다. 하지만 멈춰 있지는 않았겠지. 애초에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정확한 대전의 모습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대전 안에서도 그렇게 다양한 동네에 들르며 살았던 학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용문동, 둔산동, 탄방동, 삼천동. 중앙로, 대전역. 나는 그 사이에서 매번 빙글빙글 지냈다. 내가 어른이 된 뒤 대전 친구들은 내가 잘 가지 않던 동네에서 지내게 됐다. 월평동이나 궁동 같은 곳들에서. 그러니까 내가 다시 간 대전에서 마주하는 생경함은 변화에 대한 생경함조차도 아닌 셈이다. 거긴 원래 그런 동네였던 거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거기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그 동네로 향하는 창문을 닫아둔 셈 쳐버렸다. 하지만 사실 창문을 닫아도 시간은 흐른다. 사실 그건 응애 시절 까꿍 놀이를 하면서 이미 배웠다. 창문을 열면 다시 보이고. 다시 만나고.

그치만 좀 자주 까먹는다. 그 서울조차도 내가 서울에 없을 때는 가만히 있는 대상처럼 느껴지곤 했으니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대구에서 군복무를 했다. 아예 강원도 어디 오지였다면 끝없이 바깥을 갈망했겠지만 대구는 그냥 적당히 안주하기 좋은 동네라서 그냥 대구가 세상의 전부인 양 지냈지. 사실 대구도 살면서 그 때가 처음 가본 거였어서 (첫 방문이 좀 길었다고 생각하기로 하자. 다음 방문은 KTX를 타고 대전에 가다가 대전에서 미처 못 내리는 바람에 하게 됐다.) 완전히 새로운 사실들을 주루룩 알았지. 아주 멋진 카페들이 많다든가, 발 닿는 곳에 좋은 독립영화관이 있다든가 하는 것들. 군생활을 통해 배우기는 좀 웃긴 것들.

그러다가 이따금씩 서울에 가면 모든 게 너무 생경했던 것이다.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이란 말야? 학교 앞에서 그것들이 사라지고 이런 것들이 생겼다고? 가끔씩 보는 친구들의 상태도 매번 쑥쑥 달라져서 아직도 성장기가 있나 싶었다. 아무래도 그게 한 해 한 해가 다르던 20대 초반의 미덕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대전에 갈 일도 대구에 갈 일도 잘 없이 서울보다 위쪽 경기도에 박혀서 창동 위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신기해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지낸다. 이 사람들아 거기도 사람이 살아.

기차에서
기차에서
대전에 내려 본 흐린 풍경
대전에 내려 본 흐린 풍경

일정을 넉넉하게 두고 간 건 아니었어서 (엄밀히 말하면 출장이었으니까) 대전에 있었던 이틀 사이 굉장히 촉박하게 지냈다. 세 끼 중에 두 끼가 라면과 롯데리아 햄버거였다. 대전에 여행을 간 친구가 끼니를 저렇게 먹었다고 한다면 나는 나폴리에 여행 가서 빅맥을 먹었다는 친구를 본 이탈리아 사람처럼 굴었겠지. 이사람아 칼국수랑 두루치기를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사람이란 참 웃겨. 그렇게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그 짧은 일정 사이 카페를 두 군데나 갔다. 두 군데 시간을 내서 가길 잘했다 싶을 만큼 좋은 곳이었어서 동네방네 좋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대전에는 좋은 카페들이 있다. 대전에 살 때는 잘 몰랐던 건데. 하기사 거기도 백만 명 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그런 기억을 남기고 나는 다시 비척비척 의정부로 돌아왔다. 아마 그 뒤에도 카페는 영업할 것이고 롯데리아가 아침에 문을 열 것이며 성심당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가게 안에 들어가 빵을 고를 것이다.

촉박한 일정이었기에 대전에서 친구는 딱 한 명 만났다. 나는 고등학생 때 소설 쓰기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소설을 쓰며 사는 게 장래희망이던 시절의 기억. (나는 어떻게 내가 그 시절 그렇게 매주 엽편을 써낼 수 있었는지 아직도 신기해 죽겠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던 동아리에서 일 년을 어영부영 보냈더니 다음 해에는 덜컥 내가 회장이 되어 버렸다. 나는 사실 동아리 회장님과 몇 마디 해 보지도 않았고,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며 그냥 엽편을 열심히 써냈던 게 다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냥 회장감 맞네. 아무튼. 그 친구는 내가 차기 회장이 된 뒤 동아리에 들어온 신입생이었다. 딱 두 명 있던. 동아리에 들어오겠다는 사람들이 사실 너무 없었다. 할 게 없다는 친구들 몇몇을 억지로 끌어다가 가입을 시켰었다. 그렇게 2학년 다섯 명 1학년 두 명의 엉거주춤한 동아리가 굴러갔다. 사실 명색이 회장이면서 그 친구하고도 그 때는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었는데 (그냥 사람이랑 대화를 별로 안 했어요) 어쩌다 보니 그 다음 해에는 지도 선생님이 승진을 하셔서 그냥 동아리가 분해되어 버렸다. 그래도 선배랍시고 대학 간 뒤에 후배 친구들을 밥도 사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갑자기 모골이 송연하다. 나 밥 사준 거 맞나? 그 때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아니었으므로 하다못해 찍은 사진을 보내주겠다는 등의 연락거리를 할 것도 없었다.

그 외에 따로 연락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단 얘기다. 대학에 가고 나서 고등학교 때 알던 사람들과 연락을 잘 하지 않았다. 애초에 연락을 잘 하는 스타일도 아니긴 하지만 대학 새내기에게는 새내기 나름의 고민들이 있었으니까. 내가 끌어당겨 동아리에 들어온 같은 반 친구하고도, 그 후배하고도, 소설을 쓰겠다는 꿈하고도 다 앨범이 닫혔다.

그러다가 군대에 갔지. 한창 바빴던 서울 창문을 닫아두고 대전과 대구를 분주히 오갔다. (카투사였어서 매주 대전에 갔다) 그 날도 대전에서 대구로 복귀하기 위해 대전역에 갔는데, 갑자기 누가 날 부르는 거야. 환청인가, 잘못 들었나 했는데 (거기서 누가 날 부르겠는가!) 그 후배였다.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쓱 가고 있으니까 따라와서 등을 툭 쳤다. 우연으로 시작해서 용기로 이어진 셈이다. 온전히 그 애의. 급하게 기차를 타야 했기에 번호를 교환하고 다음에 밥을 한 번 먹었다. 친구는 서울에서도 잠시 살았고 나는 그쯤 사진을 시작해 사진도 몇 번 같이 찍었다. 어찌저찌 그간 안 본 세월이 아까울 정도로 잘 맞는 게 많아 지금은 12년지기 친구로 가까이 지낸다. 우리는 바쁘게 살지만 서로의 근황을 잘 알고 이해하는 바가 많다. 새삼스럽게 대전에 가서 이 친구를 만나 그 때 이야기를 했다. 연락도 끊겨 있다가 대전역에서 우연히 만난 이야기. 그러다가 우리는 또 연속되는 이야기를 했다. 사업이 어떻고, 카페가 어떻고. 아, 그 친구하고는 그 이야기도 했다. 그 왜, 내가 동아리에 끌어들였던 같은 반 친구. 그 친구하고도 연락이 끊겼었는데 얼마 전에 연락이 와서 몇 번 만나 같이 밥을 먹었잖아. 그 친구는 인천에 살더라. 못 본 사이 많이 바뀌었더라. 많이 바뀌었는데 또 그것대로 결이 맞아서 오래 같이 놀았잖아. 카페 문 닫는 시간까지. 스물아홉이 되어서도 그런 관계들이 생기더라. 서른이 넘으면 어떻게 될까? 조금만 어긋났으면 우리도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사람이 그런 우연도 어떻게든 넘어서 만난다. 신기하지.

둘째날은 맑았다
둘째날은 맑았다
쾌청한 가을이었다
쾌청한 가을이었다

그동안 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영영 보지 않게 될 것이라고, 혹은 다시 보게 되더라도 예전 그 상태 그대로일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버린다. 아니,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심지어, 그 곳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상정해 버린다. 보고 있던 것들이 변하는 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아무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나는 너무 자기중심적인 셈이다. 풀숲에 머리를 파묻고서 내가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다른 것들 역시 나를 볼 수 없을 거라고 믿는 꿩처럼. (사실 이 이야기의 사실관계는 잘 모르겠다. 꿩에게 미리 사과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내가 맘대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정해 버린 소설 쓰기 같은 거다. 물론 그 때 그 동아리에 있던 일곱 사람들 중에 소설을 계속 쓰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지만. 적어도 연락이 닿는 사람들은 그렇다. 애초에 몇 명을 제외하면 소설을 쓰는 애들도 아니었다. 그런 게 위안이어서는 안 됐을 것이다. 나는 쓰지 않는다.

어쨌든 세상의 누군가는 소설을 쓰는 걸 자기 삶의 업으로 삼고 나는 그들 중 몇몇을 많이 좋아한다. 나는 비겁하게 오랜만에 소설들을 읽고, 요즘은 트렌드가 이렇구나, 요즘은 이런 작품들이 잘 나가는구나, 이런 게 또 새롭고 재밌다, 따위의 이야기를 한다. 그래도 나는 전공자잖아 하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쓰지도 않으면서. 어쨌든 거기에도 사람들은 계속 살고 있고 계속 변한다. 서울이 그렇고 대전이 그렇고 대구가 그렇듯이. 그리고 결국 다시 만난다. 그 동아리에 있던 후배도 친구도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지던 동네도 나는 다 다시 만났다.

대전에서 같이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 중에 연락이 닿거나 하는 친구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어쩌다 보니 대전에 사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영광에 봉사활동을 가서 만난 포항에서 학교를 다니던 친구도 이제는 대전에 살고 대학 와서 만난 친구들 몇몇도 대전 출신이다. 사진을 찍으며 만난 사람들 몇몇도 대전 출신이라고 하네.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종종 대전에 가서 나는 그들에게 대전의 안부를 묻는다. 칼국수는 꼭 먹으라고 하면서.

대전에 다녀온 후에는 비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어쨌든 나 역시도 누군가의 닫은 창문으로 지나다닌 사람이었겠지. 늘 옆머리는 바리깡으로 밀었는데 이제는 꽤 길어져서 목 뒤를 타고 흐른다. 겨울이 지나면 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길어진 내 머리를 보며 식겁을 한다. 사진의 시작을 함께했던 친구는 내가 찍은 사진들을 한참만에 보고서 이제는 전하고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온 세상의 비겁을 다 끌어안은 양 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보든 말든 카페 사장님은 커피를 내리고 자동차는 굴러가고 칼국수 면은 뽑혀 나오며 성심당 입장 순번은 줄어든다. 하나도 새삼스럽지 않은 사실이다. 내일은 현상소에 가서 대전에서 찍은 필름들의 현상을 맡길 것이다. 모든 것들이 최신화되어 찍혀나올 것이다. 수필을 쓰기도 할 것이다.

카메라에 쓰이지 않는 것은 소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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