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33. 여백 채우기

세점사이의 33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4.09.30 | 조회 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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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서른세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졌네요. 좋아하는 긴팔 옷들을 다시 입을 수 있다니 기쁘기도 하고, 다가올 겨울이 무섭기도 합니다. 이번 주 목요일부터는 멋진 작가분들과 함께 사진 전시를 합니다. 전시를 위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어떤 걸 찍을지, 그걸 바탕으로 뭘 만들어 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요, 새삼스럽게 참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늘 백지가 무섭거든요. 비어있는 칸을 채우는 과정의 생각들을 적었습니다. 글 보내드릴게요.

 

방금 소개드린 전시의 안내입니다. 저는 태그된 레이지웨이브로 참여합니다.


여백 채우기

살면서 백지를 보고 무언가가 떠오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일하는 사람들은 0에서 1을 만드는 사람과 1에서 10을 만드는 사람, 10에서 90을 만드는 사람 뭐 그런 것들로 구분된다는데, 확실히 나는 0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최소 한 번씩은 백지를 마주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생각해 보면 대화를 할 때도 그렇다. 나는 늘 준비된 말을 하는 사람, 타인의 말을 듣고서 호응하는 사람, 혹은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맥락을 쌓아놓지 않은 상태에서 리액션 외의 질문을 창출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던 거야. 친구들은 종종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걸까 고민했다며 오래 전의 우려를 꺼냈고,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은 내가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아 수업을 잘 듣고 있는 게 맞을까 걱정했다고 뒤늦게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아주 열심히 듣고 대답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나는 0에서 시작하는 방법은 잘 모른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대단한 것까지. 대신 나는 가만히 기다린다.

 

어제는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 넷 중 셋은 머리를 감으면서 온갖 별 생각을 다 한다고 했었지. 따뜻한 물을 맞으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정말로 제대로 살고 있는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야 근데 그런 생각 씻으면서 하면 안 돼. 요새 날도 추워서 따뜻한 물 맞으면 오래 그러고 있잖아. 오래 그러면 또 우울해져갖고. 머리를 감을 때 다음엔 몸을 씻어야지 하는 생각만 한다는 친구는 쟤들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면서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사실 모든 생각이 떠오르는 건 늘 그런 때였다. 느슨한 때. 글 쓰는 것을 자주 메모를 엮는 것으로 바꾸어 부른다.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 정말로 늘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빈틈 많은 순간들 사이사이에 떠오른 생각들을 그때그때 메모하고,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때는 그것들을 모아 서로 잇고 다듬는다. 그렇다고 대단한 아이디어가 훅 떠오르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순간에만 비로소 생각이라는 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생산적인 부분의 이야기이다. 저 사람과 싸우고 싶다 누가 갑자기 천만 원을 송금하더니 멱살을 잡고 그 돈으로 장비를 사지 않으면 혼쭐을 내겠다 해주면 좋겠다 뭐 이런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다. 아무리 바쁠 때조차도.)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할지 고민할 때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문득 떠올리는 어떤 그림, 어떤 가상의 사람에 대한 상상. 언제나 그들이 찾아오는 것은 느슨할 때.

그래서, 내가 가장 유능한 것은 이런 순간이다. 느슨하게 짜인 남의 것들을 볼 때. 내가 책이라는 매체를 유독 좋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이렇게 잔뜩 모아두고 출판시장의 뒷배처럼 살진 않을 것이다) 역시, 글자들이 가진 특유의 느슨함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정한 모양을 가지고 인쇄된 잉크를 따라 의미를 조합하고 그것들을 이어 의미를 유추하는 것은 결국 자의적인 과정이다. 텍스트가 아무리 촘촘히 짜여 있더라도 줄과 줄 사이에서는 다른 생각들, 다른 판단들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완벽한 도면을 만들어낸 책이라고 하더라도 조각을 주워 실을 꿰는 것은 결국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집중한 상태에서도 자연스레 떠오르는 만약에의 순간들, 마음 속으로 다는 각주와 아무도 듣지 않는 동의와 반박. 그렇게 한 편의 글을 다 읽으면 그 글이 내 것이 된 것만 같다.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지. 그건 나의 프라모델이다. 표시 없이 휘갈긴 수많은 생각 사이에서 내 정신머리는 말이 참 많고, 한 권을 다 읽으면 메모장에는 꽤 많은 메모가 쌓인다. 

 

메모의 좋은 점은 쓰는 동시에 발전한다는 것이다. 글을 보고, 생각이 들고, 메모를 하고, 메모가 혼자서 불어나고, 그걸 보면서 또 생각이 들고.

그러다가 식상하게 산책을 나가는 거지. 음악도 없이 걸으면서 또 생각을 하고,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서 메모를 하고. 산책하기 어려운 날들이 너무 많기는 하지만 다행인지 뭔지 나는 하루에 두 번씩 머리를 감는다.

 

달팽이는 당근을 먹으면 주황색 똥을 남긴다는데. 뭔가를 만드는 사람도 그것과 똑같다는 비유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남들 역시 그런지에 대해서 내가 감히 확신을 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그 비유는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나의 백지를 채우는 것들이 언제나 타인이 만든 것들에 기대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이 쓴 글의 행간 사이에서 한 생각들, 타인이 찍은 사진을 보고 떠오른 이미지들, 타인과 한 대화 속에서 퍼올린 것들. 그 사이에서 만든 것들이 원본의 흔적을 가지지 않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겠지.

한때는 내가 만들고 있는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창작물을 열화 카피한 뒤에 뒤섞은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자괴감을 매일 느꼈다. 이걸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다른 방법은 모르는데. 뒤돌아 생각하면 할 필요도 없는 생각이었겠구나 싶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내가 만든 것들이 그들의 열화카피라고 불리울 만큼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스스로만 할 수 있는 수준의 과대평가였다는 것. 두 번째, 그 과정은 다시말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모아 향하는 종착점이 곧 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자괴감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을 보고 들은 건 아니었다. 편식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은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싫은 것들은 왜 싫기까지 한지, 그런 것들을 마음 한 켠에 같이 쌓았다. 친구 중 하나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틀린 것으로 포장하는 데에 능하다고 했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내 메모들은 그 종착점에 모였다. 나는 또 멍하니 있다가 뭔가를 주워서 종착역에 가져다 놓고, 가져다 놓은 것들을 정돈한다. 그리고 그건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일이지. 그 모든 과정이 나를 나의 추구로 이끌어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지만 단 한 가지는 명확하다. 내가 아주 느린 사람이라는 것.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한 가지 질문에 꽂힐 때가 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건 내내 머릿속에 맴돈다. 한참의 시간, 혹은 한참의 대화가 흐른 후 대답을 가져와 그 질문에 대해서 또 이야기한다. 하도 그래서 오래 만난 친구들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대화가 끝나면 가는 길에 메모를 한다. 

겨울길
겨울길
겨울길(2)
겨울길(2)

뜸을 들일 만한 빈 틈이 없을 때 내가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건 그래서일까? 사실 사는 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보니,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때와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을 때가 언제나 겹치지는 않았다. 그럴 때 만든 것들은 순간의 분노, 해묵은 불안, 틈날 때마다 고개를 드는 냉소같은 것들로 가득차 있었다. 가장 나쁜 점은 글을 쓰는 순간에는 그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말해져 마땅한 아주 합리적인 이야기로 위장해 문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그 어느 곳에도 나의 지향이 보이지 않는 것들. 한참 뒤에 그 때 만든 이야기나 사진같은 것들을 보면, 내가 그때 여유가 없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한다. 아마 남들은 이미 알고도 남았을 것들.

사실 모두에게는 불안과 분노같은 것들이 있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냉소적인 사람도 아닐 것이다. 나를 유일무이한 분노를 가진 사람, 혹은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냉소를 가진 사람 같은 것처럼 그럴싸하게 그려낼 만큼 후하지는 않다. (그리고 솔직히 좀 싫어요) 다만 그런 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뿐이다. 좋아하는 글들의 행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색채의 사진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대화같은 것이 없을 때의 순전한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저런 형태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 뒤, 멋대로 재단된 모습을 맘껏 비꼬아 대는 모양이 나의 본질적인 콘텐츠가 아닐지. 그런 모양의 냉소에는 반박의 지점이 없다. 이미 매끈할 필요조차 없이 문에 못질을 해두었을 테니. 어쨌든 나는 그런 것들도 차곡차곡 쌓아왔다.

 

돌아보면 별게 슬럼프겠는가 싶다.

 

요즘에는 억지로 날을 잡아 틈새를 만든다. 다른 날들이 좀 더 바빠지더라도 억지로, 그러니까 꽉 찬 도로에도 구급차 지나갈 길은 생기는 것처럼 하루 혹은 반나절을 준비한다. 그 날에는 무조건 밖에 나가 많이 걷고, 텍스트를 읽고, 예쁜 것들을 구경한다. 아니면 친구를 만나거나. 세상에는 볼 것들이 워낙에 많고 나는 워낙에 감동의 문턱이 낮아서 어쨌든 공기를 쐬어 주기만 하면 어떻게든 뭔가를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감격하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도 찍고싶은 게 그렇게 많다니.

열심에 집착한 시간이 길다. (사실 여전히 거기에 집착하는 데가 있다. 모든 것을 쏟는 타입의 사람은 못 되지만 말하자면 온오프를 잘 못하는 타입.) 그 때는 일찍 가서 밤을 새거나 하는 것이 나의 진심을 진정으로 다하는 것이라 믿었다. 무작정 많이 하는 것, 모든 요구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완급을 조절하지 않는 것, 쉬지 않는 것. 내가 쏟아내는 것이 그대로 나에게 쌓인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무거운 짐을 들고. 지금 생각하면 미련한 고행에 가깝다. 살면서 어느 정도의 극기 구간이나 일상의 질을 포기하는 시점은 필요한 거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통해 유의미한 성장이나 이득을 얻을 수 있을 때에 한정된다. 이유 없는 고행은 공허하기만 하다. 자해를 할 필요는 없는 건데. 이렇게 말할 만큼 그렇게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내놓는 산출물의 퀄리티가 유의미하게 나의 컨디션과 비례한다는 걸 깨달았다. 밤을 새고 돈을 덜 받고 며칠 내내 외출을 하지 않은 ‘열심’인 나보다는 잠을 충분히 자고 지갑이 두둑하고 잠깐 바람을 쐬었던 ‘살 만한’ 내가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았다. 글이든 사진이든 사무적인 것이든.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작은 공이라도 더 들이며 달려가려던 나의 고삐를 붙잡아야 했다. 만드는 사람에게는 퀄리티 컨트롤이 필요하니까. 휴식과 관리 또한 열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걸 그 때는 몰랐지. 생각해 보면 그것 역시 분노와 불안, 그리고 냉소에서 온 집착이었던 것 같다. 월급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무소속의 불안을 숨가쁨에서 오는 실존의 감각으로 억누르려고 했던 거겠지. 남들이 걱정하면 이거라도 해야지, 라고 대답했다. 와 진짜 안 건강하네.

반짝
반짝

한동안 너무 바빠서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급하셔도 못 지나간다니깐요. 업무 외적으로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연락도 딱히 자주 하지 않고. 그러니까, 일-집을 반복하는 와중에 사람들하고 사담을 나누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물론 자주 사람을 만나거나 어딜 자주 가거나 하지는 않아서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닌데 그냥 그랬단 얘기다. 그런데 그게 조금 길게 유지되었을 뿐. 그러다 보니 할 말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대체로 부정적인 것들, 구구절절 화나는 것들. 한동안 거기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쌓여 있던 것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걸로 할 수 있는 대화는 고작 십 분 정도였다. 친구가 이야기를 잘 안 들어준 것도 아니고, 내가 목이 막혀 말을 차마 못한 것도 아니다. 난 말하고 싶었던 걸 다 했고 친구도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대화는 깔끔했고 우리는 금방 다른 얘기들을 했다. 그냥 십 분 정도면 충분한 이야기였던 거다. 나는 거기에 압도되어 한참을 눌려 살았던 거고. 내가 여백 없이 몰아치는 동안 이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오래 점령하고 있었을까? 하루 정도 쉬고 책을 읽고 동네 구경을 하고 사진집들을 봤다. 그걸 곱씹는 것보다 더 하고싶은 것들이 나에게는 많았다.

오타쿠 특징이 별안간 벅차오르는 거랬나? 카메라 정도를 제외하면 특정하게 무언가를 그렇게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게 막 있지는 않은데. (좋아하는 게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가 얕은 것도 아니지만 살면서 본 타인들의 사랑이 너무 거대하여 그냥 가만히 있는 셈 살기로 한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종종 별안간 벅차오른다. 좋은 컨디션에서,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대화를 하고, 사진을 보고, 그림을 보고, 종종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해묵은 분노마저 메모로 쌓여 다른 것들과 쉽사리 섞이는 순간들. 삶에 그런 순간들이 좀 더 많았음 좋겠다. 그러려면 일함과 쉼 모두에 분주해야 하겠지. 그 과정에서 그림도 이야기도 사람도 쌓일 것이다.

 

가장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를 만드는 건 아침 한적한 시간에 카페에 가는 거다.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안 하게 되곤 했지. 날도 시원해졌으니 핑계가 더 없다. 요새는 자주 시간을 낸다. 그런 데서는 이상하게, 백지가 완전히 흰 종이가 아니라 딴생각을 할 여백을 모아놓은 곳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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