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열 살 무렵, 유서 쓰기

2023.06.26 | 조회 179 |
0
|

최픽션 인쇄소

최픽션이 인쇄하는 【픽션.문화.예술】 이야기

1.

 “노인들에게는 접촉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키스와 포옹이 필요한 인생 단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의사 외에는 누구도 그들을 만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 장례식은 조금 일찍 시작되었어야 했다. 그가 노인이 되기 전, 누군가의 손길을 갈구하기 전에 시작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같은 지식인도 죽기 전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떠나는 게 정말 싫소.” 

 

 그러니 우리라고 별 수 있었을까. 유서 쓰기를 미루고, 또 미룰 수밖에. 

 지금부터 펼쳐질 장례식은 10여년 전, 태어난 어느 콘텐츠의 장례식이다. 유튜버라는 말이 없던 시절. 크리에이터라는 말도 없던 시절. 심지어 팟캐스트라는 말을 아는 이들도 많지 않던 시절. 그런 시절에 태어난 <책 읽는 라디오>의 장례식이다. 

 2010년 7월에 태어난 이 콘텐츠는 그때 당시 이십 대였던 몇몇의 친구들이 모여 만들었다. 

 어느 원주민 부족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라곤 세 가지 뿐이라고 한다.

 ‘엄마, 밤, 물’ 

 <책 읽는 라디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전성기는 언제일까? 신체적인 면만 봤을 때, 인간은 7살에 전성기를 맞는다. 머리와 뇌가 성인의 90퍼센트 만큼 성장한다. 그래서일까? 그 나이대 아이들은 “머리만 커져가지고!”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왜냐하면 7세 무렵 아이들은 머리만 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장을 비롯한 내장 기관도 성장하며, 기능 또한 성인 못지 않게 훌륭해진다. 

 우리가 낳은 <책 읽는 라디오>도 그렇게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동시에 늙기 시작했다. 

 7세가 지난 이후부터 인간의 사망률은 급격히 늘어난다.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중요한 것은 7세부터 인간의 하루는 성장하기 위한 하루가 아닌, 죽음으로 가기 위한 하루라는 사실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시간을 낭비하거나 가끔 업적을 남기려 애쓴다. 

 <책 읽는 라디오>역시 그 모든 과정을 거쳤다. 하루하루 죽어가며 시간을 낭비했고, 어리석은 짓을 했으며, 가끔은 업적을 남기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춘기를 맞고, 청년기를 지나고, 장년기에 접어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장년기를 “차갑고 건조한 시절”이라 말했다. 뜨겁고 습한 유년기와 뜨겁고 건조한 청년기를 지나 맞이하는 차갑고 건조한 장년기. 그렇기에 이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스킨십을 갈구하게 된다. <책 읽는 라디오>도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이틀이 지나면 이틀만큼 스킨십이 간절해졌다. 이것은 바꿔말하면 사람이든 콘텐츠든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되면 찾는 이들이 그만큼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 읽는 라디오>는 한때 스무 명 가량 되는 친구들이 함께 만들었다. 방송이 올라가면 적어도 몇 천의 청취자가 방송을 듣고 그중 1/10은 짧은 소통을 나누기도 했다. 자발적인 후원을 해준 키다리 아저씨도 소대 단위로 있었다. <책 읽는 라디오>가 젊었을 때는 그랬다. 

 그리고 오늘 <책 읽는 라디오>는 죽는다. 

 

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저승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 죽으면 림보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저승의 직원들이 있는데. 그들의 일은 죽은 이들이 저승에 가며 간직할 단 하나의 장면을 전하는 것이다. 

 그들은 묻는다. 

 “살면서 겪은 일 중, 한 장면만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기억을 선택하시겠어요?” 

 <책 읽는 라디오>도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 그는 무엇이라 답할까? 일산의  카페에서 처음 녹음을 하던 날을 선택할까, 방송 시간에 맞추기 위해 홍대 거리를 걸으며 편집을 했던 날을 선택할까,  평이나 될법한 녹음실에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앉았던 그때를 선택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12시간 연속 회의를 했던 날을, 바깥 온도보다 실내 온도가  추웠던 문래의 녹음실 시절을, 혹은 첫번째나 네번째 공개방송을 선택할까.

  <책 읽는 라디오>를 낳았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라면 어떨까? 그것도 모르겠다. 친구들은 무엇이라 답할까? 

 

3. 

 <책 읽는 라디오>의 친구들은 유일한 무언가를 좋아했다. 세상에 없는 것을 좋아해 <책 읽는 라디오>를 만들었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좋아해 수없는 코너와 방송을 제작했다. 그런 우리였기에, 그렇게 성장한 <책 읽는 라디오>이기에. 우리의 마지막도 세상에 없는 것으로 장식하고 싶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오늘의 장례식이다. 

 사상 최초의 콘텐츠 장례식이 될 이곳은 1인 콘텐츠가 없던 시절 태어나, 1인 콘텐츠가 넘치는 시절 죽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장례식이다. 베이비붐 세대처럼 모두가 탄생을 말하고, 성공을 말하고, 크리에이터 드림을 꿈꾸는 시대에 콘텐츠의 죽음을 논하는 장례식이다. 

 콘텐츠로서의 유아기와 청년기, 그리고 장년기를 겪은 노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임과 동시에 세상에 없던 일이라는 점이 여전히 우리와 <책 읽는 라디오>를 설레게 한다. 이를 위해서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린 죽어도 좋다. 

 나는 지금부터 펼쳐질 장례식에 콘텐츠를 만드는, 혹은 즐기는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 이미 성공한 이들, 성공을 꿈꾸는 이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성공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실패를, 젊음을 선물 받은 이들에게 죽음을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사실이다. 

 그럼 이제 시작해보자.

 열 살 무렵 유서쓰기를 결심한, <책 읽는 라디오>의 장례식을.

【최픽션 인쇄소】 는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정으로 만들어집니다. '이야기 인쇄'가 멈추지 않도록 ✔️구독을 잊지 말아주세요 🙏

【최픽션 인쇄소】 를 만나는 또 다른 방법!!

📝 〖브런치〗 〖밀리로그〗 〖블로그〗

🎧 〖팟캐스트〗 〖스포티파이〗 (준비중)

▶️ 〖유튜브〗 (준비중)

원하는 채널에서 최픽션이 인쇄하는 이야기를 만나주세요 👋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최픽션 인쇄소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최픽션 인쇄소

최픽션이 인쇄하는 【픽션.문화.예술】 이야기

뉴스레터 문의 : ficciondm@gmail.com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