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각자의 계단에 선 우리는

2023.07.19 | 조회 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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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픽션 인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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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함께였던 적이 없는 두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해보라. 어떤 때는 최초로 수소 기구와 열기구를 견일줄로 함께 묶었던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추락한 다음 불에 타는 것과. 불에 탄 다음 추락하는 것, 당신은 둘 중 어느 쪽이 낫겠는가? 그러나 어떤 때는 일이 잘 돌아가서 새로운 뭔가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머지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가능하다.”

-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줄리언 반스가 팻 캐바나를 그리고 쓴 산문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의 원제는 <Levels of Life>다.

삶의 단계나 층위를 말하는 이 제목은 한국어 제목에 비해 감성적이지 않지만 줄리언 반스와 팻 캐바나의 삶을 그리는데 있어 가장 정확한 제목일 것이다. 이 책에서 줄리언 반스는 열기구가 만들어져 하늘로 떠오른 이야기와,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지하 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우스, 그리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지하로, 또 다시 지상의 세계로 돌아오는 서사구조를 띄고 있다. 이 서사의 주인공은 역시 줄리언 반스와 팻 캐바나다. 줄리언 반스는 팻 캐바나를 만나 하늘로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먼 곳을 가장 선명히 바라봤다. 하지만 팻 캐바나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찾기 위해 심연 깊은 곳으로 그녀를 찾아 내려갔다. 그 길은 너무 깊어 내려가도 내려가도 한없이 계단이 이어졌다. 그런 이유로 줄리언 반스는 팻 캐바나가 떠난 이후, 긴 시간 어떤 글도 쓰지 못했다. 그 긴 계단을 내려가던 중 줄리언 반스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신에게 오르페우스의 과업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행할 수 있을까? 아내를 돌려주는 대신, 지상으로 나설 때가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 아내를 바라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을 생각하며 또 다시 아래로 아래로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아래를 향한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모든 면에서 아내가 그립다.”

이것이 줄리언 반스가 내린 답이었다. 그는 아내를 잊을 수 없었다. 지하에서 그녀의 손을 잡는다면 열 개의 계단을 채 오르기도 전에 뒤를 돌아볼 것이다. 오르페우스의 과업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과업을 준다면 나는 무엇이라 답할것인가. 나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책 읽는 라디오>와 함께 했던 10여 년의 시간. 아니, 시간이라 말하기엔 부족한. 시절이라 불러야 그나마 어울릴 법한 그날들. 그날을 더 연장할 수 있는 기회를 누군가 내게 준다면. 그것을 위해 지하 깊은 곳에서 그의 손을 잡고 지상으로 오르라고 한다면, 나는 뭐라 답하게 될까.

데이비드 실즈의 아버지는 신체적으로 누구보다 강인했던 사람이다. 아흔이 넘는 나이에도 조깅을 거르지 않았을 정도였고, 성욕마저 왕성했다. 데이비드 실즈는 그런 아버지를 이겨 본 기억이 없다. 적어도 신체적으로는 말이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 데이비드 실즈는 <우리는 언제가 죽는다>라는 에세이를 펴낸다. 그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쓰여있다.

“나는 돌연 무릎이 걲여 먼지투성이 땅으로 엎어진다. 몸을 받치려고 팔을 쭉 뻗는 바람에 손이 돌멩이에 온통 긁힌다. 아버지는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어 선인장 낮은 가지를 베고,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마신다. 아버지가 이겼다. 또 아버지가 이겼다. 언제나 아버지가 이긴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버지도 진다. 우리 모두 언젠가 진다.”

우리의 삶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패배를 향해 가는아주 이상한 게임이다. 이 게임의 특수한 점은 우리는 언젠가 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반복을 해도, 이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의 손을 잡고 지상으로 돌아왔다 한들, 그들의 끝이 승리로 장식될 일은 결코 없다. 에우리디케도 오르페우스도 언젠가 죽는다.

<책 읽는 라디오>도 그렇다. 인간도, 콘텐츠도 결국은 죽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지하로 찾아가 그것을 끌고 오르는 것이 아닌, 멋진 추락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으로. 라스트 씬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런 멋진 추도사를 남기는 것도 좋겠지.

“우리는 우리가 그 아픔과 싸웠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슬픔을 극복했고, 우리의 영혼에서 녹을 긁어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때는 비탄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 데로 돌린 때이다.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그 모든 건 어디선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산들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는가? 에식스로? 북해로? 만약 이 바람이 북풍이라면, 그래서 운이 좋으면, 우리는 프랑스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온 마음을 모아서 이렇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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