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는 지구인의 ‘개념’을 빼앗아 지구를 침략하려던 외계인이 사랑을 개념화하지 못해 실패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를 두 번 이상 볼 일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묘하게 여운이 있는 영화인 건 틀림없다. 기요시의 대표작 <큐어>와는 비교가 힘들 만큼 엉성하고 어이가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큐어>에 대한 그의 답, 혹은 항변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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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PAPER에서 일하던 시절에 대표님, 즉 김원 두령님이 주위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앞뒤 없이 보낸 적 있다. 사랑이 뭐냐고, 그리고 그 답을 정리해서 책에 실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김창완 아저씨의 “세상에 흔해 빠진 게 사랑이지만 사람 때문에 귀해진다”는 답, 그리고 이충걸 GQ 편집장의 “사랑이 꼭 뭐여야 해요?”라는 답이었다. 특히 이충걸 형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사랑이 꼭 뭐여야 하나. 왜 그렇게 사랑을 정의하지 못해서 다들 울어 싸나 싶었다. 어차피 각자 편의적으로 생각하고 거기 매달릴 거잖아.
그리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 바뀐 지 꽤 됐다. 그러니까, 사랑은 뭐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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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 슬픔, 기쁨, 희열, 쓸쓸함, 분노 같은 것. 이름이 붙여질 수 있는 한,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걸 묘사함으로써 이해하고 소유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렇게 이미지화한 이름들은 대부분 그 감정의 보편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 ‘슬프다’라는 말을 들으면 슬픈 사람의 표정이 떠오르는 식이다.
그런데 사랑은 다르다. 대개 사랑은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종의 상태, 맥락, 또는 행동원리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은 앞서 정의한 모든 감정에 조금씩 뿌리를 박은 채 생명력을 빚지고 있다. 사랑은 기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며, 슬픔이나 분노를 유발하기도 한다. 오히려 말이 존재하기 위해 감정에 기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은 진부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늘 기적처럼 느껴진다. 출처 불명의 단어가 매번 뜻밖의 숙주에 기생체로 붙어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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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유체적인 흐름이다. 그 덧없음 때문에 개념으로 고정되는 순간 부서져 나뒹굴게 된다. 사랑이라는 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불완전해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사랑은 죽은 것이므로. 그래서 사랑은 끝없이 규정해야 한다. 뭐가 뭐가 됐든, 각자가 사랑이라 부르는 모습으로, 사랑은 뭐여야 한다.
그러니 누군가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얼마나 지리멸렬하고 유치하든, 너무 조소를 띠지는 말자.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긍정하는 덧없음의 환상이니까. 그 흔들림이야말로 인간이니까.
그때 이충걸 형은 답을 하나 덧붙였다. ’사랑은 아주 성가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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