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에 관한 짧은 필름

무엇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을까

Because I'm an actress

2024.02.02 | 조회 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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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에 관한 짧은 이야기

아주 사적이고 디테일한 에세이

사람들에게 “왜?”라는 직접적인 질문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인터뷰를 할 때도 “왜 이런 음악을 만들었나요?”, “왜 이런 책을 썼나요?” 같은 질문을 피한다. 한 인간의 맥락을 외면해버리는 무신경한 질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매사 자신의 행동 원리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도 잘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더 많지 않을까. 물론 머리로는 납득되고 주위를 이해시킬 만한 이유를 애써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표면적인 이유와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동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람의 동기라는 건 훨씬 복잡하고 심각하다.

영국 출신의 유명 작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박찬욱 감독이 드라마화한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은 스파이물이다. 1979년을 배경으로 영국의 무명 배우 찰리(플로렌스 퓨)가 이스라엘 모사드의 스파이가 되어 팔레스타인 조직에 침투하는 이야기다. 여기에 자신의 담당 요원인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의 로맨스가 얽혀 있는데, 이게 로맨스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참 애매하게 그려진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와 원작은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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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가디와 찰리 사이의 역학관계는 뚜렷하다. 찰리는 가디에 대한 사랑이라는 확고한 감정적인 동기로 움직인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알 듯 모를 듯 미묘하다. 굳이 말하자면 로맨스보다는 답답하게 진행되는 ‘썸 타기’에 가깝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건 틀림없는데, 이게 진짜 애정인지 역할에 충실하게 몰입하다보니 애정이 싹튼 건지 모호하다. 아마 그들 스스로도 이 점이 확실하지 않아서 번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수하지만 뭔가 무기력하고, 머뭇거리고, 존재감이 희박한 스카스가드의 채도 낮은 연기는 오히려 적절하다.

그러니 이 작품에서 흥미로우면서도 어렵게 느껴지는 건 찰리가 스파이가 된 동기다. 100% 사랑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금전적 대가를 준다는 말도 최소한 직접적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대체 왜? 이 의문은 박찬욱 감독이 원작을 결정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지점이고, 각색의 핵심이며, 한편으로 관객들을 꽤 헷갈리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어째서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랄 위험한 일에 제 발로 뛰어들었는지. 누가 총을 들이대고 협박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중간에 빠져나올 기회도 몇 번이나 있었는데 어째서 자신의 의지로 끝까지 향했는지.

마지막 화에서 팔레스타인 조직의 리더 칼릴에게 찰리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칼릴은 묻는다. “당신은 누구냐. 왜 이런 일을 한 거냐.” 원작에서 찰리는 “그 사람(가디 베커)을 사랑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뻔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금방 고개를 끄덕이기는 쉬운 이유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딱 한마디 한다. “나는 배우예요.(I’m an actress)” 그러자 칼릴은 “그럼 아무 신념도 없이 이런 짓을 했다구요?”라며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허탈해한다.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확고부동한 ‘이유’를 가지고 살아온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찰리의 이 대답을 듣고 아이다 유의 만화 <건슬링거 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록산느라는 전설적인 스파이의 에피소드다. 주로 다른 사람으로 신분을 위장하는 잠입 공작이 그녀의 특기다. 록산느는 누구든 될 수 있고 어떤 삶이든 익숙해질 수 있는 자신의 일에 대한 회의와 자기혐오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그만두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재능이 있으니까. 남들은 흉내도 못 낼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심 즐기고 있으니까.”

어쩌면 찰리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그녀는 재능이 있다. 기억력과 관찰력이 뛰어나고, 대담하며 임기응변에도 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재능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이다. 애초에 작전을 계획한 마티(마이클 섀넌)가 건드린 부분이 찰리의 바로 이 지점이었다. 현실의 삶이 너무 따분해서 드라마틱한 판타지를 창조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주어진 배역을 완벽하게 해낼 때 느끼는 쾌감, 이걸 버리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 같고, 내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불안. 이런 복합적인 것들이 “나는 배우다”라는 말의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런 점에서 찰리의 캐릭터는 배우라는 괴상한 직업 그 자체가 형상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기라는 것은 종종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무의식에 있는 동기는 번거롭게 당사자의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그냥 뻔뻔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슬그머니 등을 떠밀어버린다. 그러니 사람은 가끔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일을 알면서도 반복하고, 누가 봐도 무모한 짓에 머리부터 들이밀기도 하며, 때로는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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