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당신을 더 사랑한다 맹세할 수 있지만’
’누구보다 당신을 더 사랑했다 확신할 수 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 됐지만) 가을방학의 ‘동거’ 전렴구의 마지막 가사들은 이렇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끝이 맺어지지 않은 문장으로 남는다.
이 의뭉스럽고 오묘한 찝찝함처럼 가족이라는 비합리적인 집단, 특히 부모자식의 관계성을 잘 표현해주는 게 없다.
가끔 엄마를 만나기 전에는 긴장 상태가 된다. 나는 아무 문제도 없이 살고 있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어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은 숨기고, 어떤 부분은 선전하고, 과장에 과장을 더해서 연기해야 한다. 그래야 내 삶에 대한 간섭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매번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열에 아홉은 내가 폭발적으로 짜증을 표출하고, 진이 빠져서 집에 와서 드러눕는 것으로 끝난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생긴 게 마음에 안 들면 절대 안 먹었지, 라는 말을 엄마에게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가끔 엄마가 내 생각보다 나를 훨씬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동시에 절대로 나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간극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아이러니. 마음의 거리를 자연스럽게 실감케 하는 침묵이 이상하게도 이 관계에서는 좀체 들어설 틈이 없다.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처음 발명한 걸까. 이건 인류 최초로 복어를 먹은 인간만큼이나 심오하게 변태적이다.
그냥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해가 안 되는 걸 이해하지 않고 놔두면 좀 좋을까. 그렇게만 되면 세상사의 문제가 상당부분 사라지겠지. 아니면 차라리 서로의 기억에 남지 않고 뿌리째 존재가 뽑혀 나갔으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르게 더듬게 된다. 그쪽으로 뻗어나가 이어져 있는 가느다란 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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