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찌를 듯 키 큰 연잎들이 물결치고,
오리와 물닭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풍요로운 세상.
그 화려함의 가장자리,
물 위에 갓 싹을 틔운 어린 연잎 하나가
수줍게 떠 있습니다.
그 보드라운 초록의 품에
지난날의 모든 영화를 내려놓은
빛바랜 연밥 하나가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한때는 나도, 고운 꽃이었습니다.”
내게도 뜨겁고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
지나가는 바람과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누구보다 고운 빛깔의 연꽃으로
한 계절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꽃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꽃잎은 하나둘 바람에 실려 떠나고,
무거워진 고개를 숙인 채
내가 돌아갈 곳을 바라보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꽃의 계절이 지나고
연밥은 여물어 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마침내 물가로 내려앉았습니다.
화려했던 꽃의 자리는 사라지고,
내가 품었던 씨앗들은
새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흙 속 깊이 잠들기도 했습니다.
한때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다 내어주고
마침내 껍데기만 남은 빛바랜 나.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까마득한 시간 저편에서
작은 생명의 기척 하나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흙 속에서 틔운 여린 연잎 하나가
수면 위로 올라와
빛바랜 나를 수면 위로 올라와 자리했습니다.
나는 그 어린잎을 바라보며
문득 지난날을 떠올립니다.
꽃이 진 뒤에도
생명은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연잎들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푸르고 높습니다.
꽃으로 피었던 시절에도 하늘은 있었고,
꽃잎을 내려놓은 지금도
하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하늘이 아니라
그 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지나가던 한 나그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빛바래고 연밥 하나를 바라보다가
그 안에 남아 있는 이야기를 발견한 듯
고운 빛으로 나를 담아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마 그분의 눈에는
나의 비움도,
나의 기다림도,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생명도
모두 아름답게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나도 그분께
조용히 편지를 보냅니다.
당신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꽃잎을 내려놓는 날이 오겠지요.
그때 너무 오래 슬퍼하지 마세요.
꽃이 진 자리에도 생명은 남아 있고,
내려앉은 자리에서도
새로운 봄은 준비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이 자리에서의 시간을 다하면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겠지요.
그때는 더 이상
빛바랜 연밥으로 남아 있지 않고,
어린 연잎이 자라고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데 필요한
작은 자양분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것 또한,
내가 다시 이어가는 작은 봄일 테니까요.
삶에서 무언가를 내려놓는 일이 찾아와도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내가 내려놓은 것이
훗날 누군가의 봄을 피우는
작은 힘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오늘도 아름다운 날이 되기를.
내일도 아름다운 날이 되기를.
그리고 당신의 삶에도
언젠가 다시
새로운 연잎 하나가
조용히 수면 위로 올라오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꽃이 진 자리에는,
지금 어떤 푸른 싹이 피어나고 있나요?
― 관곡지 연밭에서, 빛바랜 어느 연밥이 _()_
#연밥의편지 #연꽃이야기 #사진명상 #빛과숨그리고쉼 #명상하는사진사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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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s
정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이렇게 잘 풀어 주셨네요. 사진과 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빛.숨.쉼
과찬의 말씀에 부끄럽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직 제 마음에도 복잡하고 어두운 부분이 많아, 조금이나마 맑고, 밝히려고 나름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여전히 부족함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따뜻한 조언과 가르침 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배우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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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규
연밥도 찍으시고, 연의 일생을 연작으로 만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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