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번_ 연꽃에 차를 맡기다(26)

함께 머문 시간은 향기가 된다.

2026.09.08 | 조회 40 |
0
|
from.
海印(해인)

 

첨부 이미지

 

그날 스님께 들은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문득 그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그러다 부생육기(浮生六記)에서 연꽃과 차에 관한 기록을 만나게 되었다.

 

청나라 심복(沈復)이 쓴 이 책에는

일상의 작은 즐거움과 아내 운()과 함께했던 시간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제2한정기취(閒情記趣)에는

연꽃과 차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나온다.

 

夏月荷花初開時晚含而曉放

하월 하화 초개시, 만함이 효방,

芸用小紗囊撮茶葉少許置花心

운용 소사낭 촬 다엽 소허, 치화심,

明早取出烹天泉水泡之香韻尤絕

명조 취출, 팽 천천수 포지, 향운 우절.

 

여름에 연꽃이 막 피기 시작할 때,

저녁이면 꽃이 오므라들고 새벽이면 다시 피어난다.

 

아내 운은 작은 망 주머니에 차잎을 조금 넣어

꽃심에 두었다.

 

다음 날 아침 그것을 꺼내 차를 우렸는데

그 향과 운치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잠시 멈춘다.

 

연꽃과 차를 함께 끓인 것이 아니다.

 

차를 꽃 속에 맡겨 두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것이다.

 

어쩌면 향기란

무언가를 억지로 얻으려 할 때보다

 

함께 머문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첨부 이미지

 

사진도 그런 것이다.

 

나는 관곡지에 가면

연꽃을 예쁘게 찍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하지 않는다.

 

상처 난 꽃도 바라보고,

빛이 사라져가는 꽃도 바라본다.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빛이 꽃잎에 머물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보면

사진을 찍는 것을 잊을 때도 있다.

 

그때 알았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단지 빛이 아니었다.

 

내 마음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꽃 곁에 오래 머물다 보면

꽃을 바라보던 시간이

어느새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때 셔터를 누른다.

 

사진은 단순히 대상을 담는 일이 아니라

그 대상과 함께한 시간을 담는 일이다.

 

부생육기에서 운은

차잎을 연꽃의 꽃심에 맡겨 두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연꽃 앞에 나를 잠시 맡겨 둔다.

 

첨부 이미지

 

연꽃차 한 잔에는

 

꽃이 피고 오므라드는 시간,

차가 꽃 속에 머문 시간,

그리고 그것을 기다린 사람의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오늘도 연꽃 앞에 선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일까.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잠시

그 꽃과 함께 있기 위해서일까.

 

나에게 관곡지 연꽃밭은

연꽃을 찍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잠시 숨구멍을 찾아

연꽃 곁에 나를 놓아두는 곳이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당신에게 연꽃은 무엇인가요?

 

#연꽃차 #부생육기 #기다림 #사진명상 #명상하는사진사

 

<海印의 사진 명상 편지>

 

빛은 마음을 밝히고,

숨은 몸을 깨우며,

쉼은 나를 본래의 자리로 이끈다.

 

이 편지에 답장하시면

작가가 직접 읽고 함께하겠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마음에

고요한 빛 한 줄기 머물기를.

 

海印 배상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빛.숨.쉼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海印

올드 렌즈로 담은 일상의 사진으로 풀어가는 빛과 숨, 그리고 쉼의 이야기.

뉴스레터 문의dah3o@naver.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대표번호: 070-8027-1409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