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를 대하는 두려움
판타지 소설을 읽다 처음으로 글이란 걸 써보겠다고 낙서같은 소설을 끼적이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즈음이었으니,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만으로 17년 가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연재를 시작하면서 저는 처음 겪는 감정을 맞닥뜨렸습니다. 두려움입니다. 커서가 깜빡거리는 모니터 화면이 비추는 멀건 백지를 채워나가는 것이 꽤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일 주일간의 휴재는 고열로 비몽사몽 지내며 기진맥진한 탓도 있었지만, 군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 버거워했던 저의 무의식도 큰 지분을 차지했을 겁니다.
그건 군복을 입은 시절 저의 일거수일투족이 제게는 치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 치부를 사람들 앞에 공개연재의 형태로 낱낱이 드러낸다는 것이 결코 달갑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 기억을 글로 써내려가야 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저의 수치심까지도 글감으로 써서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묵은 상처는 언제고 닦아내고, 치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나 글을 씀으로 상처를 닦고 치유했습니다. 묵은 상처가 당장은 아프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속이 곯아가기 때문에 고통마저 없을 수도 있겠지요.
이번 챕터를 한두 가지 피상적인 에피소드로 얼버무리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누가 어떤 일을 해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꽁꽁 싸매고 숨긴 채, 모호한 저의 감정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분량을 채우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연재를 위해서라면 그게 더 이상적인 선택이기도 합니다. 이 연재는 언젠간 한 권의 책으로 묶기 위한 초고 작업이니까요. 다른 챕터와의 통일성과 비슷한 분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이빨을 까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지금 쓰는 건 초고니까요. 글은 퇴고로 완성되고, 연재분을 책으로 묶는다면 어차피 뺄 걸 빼고 더할 걸 더하는 작업이 필요할 겁니다. 그럼 초고는 좀 산만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글은 솔직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마음에 있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언어라는 옷을 입혀 내놓는 것이 글쓰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옷은 사람들에게 예쁘고 멋져 보이기 위한 옷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이 나의 마음답게 보이기 위한 옷이지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당당함은 어떤 치장을 해도 그 빛을 잃지 않습니다.
저는 수치심이라는 마음에 굳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좀 더 잘 어울리는 문장을 지어 입혀줘야겠지요. 어제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와의 만남이 제가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달필가도 아니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써본 적도 없지만, 이 친구는 이따금 일기를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자신이 쓴 글을 저에게 보여주기 시작했지요. 그 중엔 이 친구의 군 생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장황하고 거친, 읽기 버거운 글이었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글이었습니다. 그 글을 쓴 후로 이 친구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을 하곤 하거든요. 자신은 군 시절의 트라우마를 이제는 이겨낸 것 같다고요.
친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크게 들이쉽니다. 다시 부끄러운 군 생활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상처는, 닦고 치유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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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벼랑 너머에는 (3)
내가 배속을 받은 자대는 중부권의 중소 도시 인근에 있는 비행단이었다. 다시 헌병대로 배치를 받고, 다시 소대로 배치받기까지 며칠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군생활에 부적합한 인간인지 어필하려 애썼다. 우울증으로 약물치료를 받은 적도 있고, 허리도 안 좋다, 경계근무에서 몇 시간씩 총을 들고 서 있으면 허리가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어릴 때부터 자주 허리를 삐었고, 훈련소에서 6주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허리가 삐어 내내 고생을 했었다. 그걸 열심히 어필하면, 운이 좋다면 행정병으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는 울상이 된 채로 경비소대로 배속되었다. 주로 군부대의 정문이나 후문 같은 곳에서 경비를 서며 출입자를 확인하는 것이 경비소대의 주업무였다. 이왕 배속을 받은 김에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고장’이 나 있었다. 군 생활 내내 나는 다리가 부러진 채로 마라톤을 뛰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남들은 다들 잘 뛰고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다. 이 다리만 나으면 괜찮을텐데, 다리만 멀쩡했다면 적어도 사람들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텐데…
그 ‘고장’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 암기력이었다.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긴장해 있다가, 그 긴장이 극에 달하면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나사가 빠진 것처럼 아무것도 못 하곤 했다. 그 상황에서 맞선임은 암기장을 주며 꾸역꾸역 무언가를 외우도록 시켰다. 내 윗선임들의 기수와 계급이라던가, 부대 간부들의 계급과 차종, 차번호라던가, 운전병이 매끼 식당에서 밥을 가져오면 막내들이 어떻게 그 밥을 나르고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던가…
간부들은 가혹행위라고 말하는 것들이었다. 원칙적으로 병사는 간부에게만 지시와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공동 생활과 업무에 있어서는 필요한 것들이었고, 그런 걸 간부가 일일히 다 교육할 수는 없었다. 간부에게는 간부의 세계가 있었고, 병사에게는 병사의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 사이에는 모호한 불가침의 경계가 있었다. 병사가 병사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똥군기가 아주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것은 ‘가혹’ 행위라고까지 불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 소대에서 경비 업무를 서고 소대원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기 위해선 필요한 지식들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걸 외우지를 못했다. 아니, 잠을 줄여가며 기계적으로 외우긴 했다. 암기장을 외운다며 밤을 꼴딱 세는 사람은 소대에서 나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힘들게 외운 것을 전혀 써먹지를 못했다. 기습적으로 선임이 생활관 구석으로 나를 불러놓고 ‘704기 상병 몇 명 있지? 이름 대 봐’라고 말하면 잔뜩 얼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음식과 식판을 나누고 정리한 후에 ‘식사 도착했습니다!’라고 선임에게 알리면 그만인 식사 준비를 하면서도 실수 만발이었다. 그걸 이상하게 여긴 선임이 한번은 빈 종이를 준 적이 있었다. 시간을 줄 테니 소대 선임들 기수를 여기에 몽땅 써보라며. 나는 거의 완벽하게 그걸 써냈지만, 선임을 마주치면 경례를 하는 건 여전히 자꾸 잊어버렸다.
다른 동기들은 다 잘 해내는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그걸 해내지 못했다. 소대장이 넌지시 ‘중대 행정병으로 보직 이동을 해주겠다’라고 말할 때 즈음, 그 자괴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부대를 경비하는 일은 24시간 내내 해야 하는 업무였다. 그래서 동기들은 새벽 근무에도 곧잘 차출되고, 잠을 설쳐 눈이 벌개진 상태로 훈련이나 작업에 다녀오곤 했다. 그런데 나는 소대에 머무르는 한두 달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새벽근무에 투입되지 않았다. 선임들의 이상한 눈빛이 ‘저 새끼는 편한 시간 근무만 나가면서 꿀 빠네’라는 의미였다는 걸 눈치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동기들과 같은 조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대장으로부터 남모를 배려와 편익을 잔뜩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 곳에서는 다른 사람의 근무를 새벽대로 밀어내야 받을 수 있는 배려였다. 그렇게 민폐를 끼치면서도 나는 이 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남들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곳에서 나는 툭 건드리면 눈물만 왈칵 쏟아낼 뿐인 민폐 덩어리였다. 나는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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