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레터>는 책과 영화를 아끼는 구독자 님께 띄우는 텍스트 기획자 임유청의 ‘읽고 쓰고 공유하기’ 활동 일지입니다. 온라인 레터 서비스를 통해 텍스트 사이에서 건져 올린 문장과 생각을 소개하고, 인터뷰 모임으로 작가와 독자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조직합니다. 질문에서 이해로 나아가는 대화를, 멈춤 없는 글쓰기를 시작할 당신 작은 용기의 모티브가 되고 싶습니다.
구독자 님,
지난 여름 어떻게 보내셨나요?
전 찬 기운 섞인 바람 불자마자 여름의 일들을 까먹어 버린 거예요! 뭐 했더라? 누굴 만나고 어딜 갔더라? 하며 구글 캘린더를 보는데, 생각보다 참 많은 일이 있었더라고요.
언제나처럼 레터를 썼고요, 인터뷰&레터 작가님들과의 팟캐스트 녹음이며 인터뷰 모임, 책방 ‘그래서’와 함께 한 네 번의 서울컬쳐클럽을 즐겁게 마쳤습니다. 좀 잘 쓰고 싶어서 약간 모른 척했던(이해하시죠…) 원고 마감도 했고요. 제주도 출장(겸 휴가), 군산북페어, 서울 여기저기와 진주와 익산 등에 잠깐씩 다녀오기도 했고요. 그러는 동안 좋은 만남들도 여럿 가졌고요.
이렇게 꽤 분주했던 여름이었는데도 저는 왜
“나 뭐 했지?” 생각했던 걸까요?
앞으로 해야 할 일들로 머릿속을 빼곡히 채우느라,
혹은 뭔가 중요한 걸 놓치진 않을까 노심초사 하느라
지나가버린 것들을 조금은 소홀히 대하고 있었나봐요.
지나간 건 지나간 거지. 미련 갖지 말자, 생각할 때도 있지만, 미래의 내게 필요한 것들은 종종, 실은 자주, 우리의 과거에 있기도 하니까요.
어떻게 좀 더 부지런히 기록하고 보관할까, 고심하는
여름 끝, 가을 시작의 나날입니다.

그리고 말이죠,
주로 책상 앞에 붙박혀 있던 시간이었지만
그 덕에 사실 저 진짜 완전 아주 멀리까지 다녀왔어요.
처음으로 여행책을 편집해봤거든요! 그래서,
9월의 <인터뷰&레터>에서는
저의 지난 여름을 바쳐 만든 한 권의 책을 소개하려 해요.
아주 먼 스페인, 그보다 더 먼 1973년 여름의 여행기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입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한번 읽어봐주시겠어요?
*
이 책의 두 가지 기원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에는 두 가지 기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원. 1973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대 젊은 한국인 부부는 각각 건축과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국비 유학을 떠납니다. 첫 번째 방학을 맞아 그들은 새로 사귄 친구들과 처음으로 긴 여행을 계획합니다. 목적지는 스페인. 옷가지 몇 개와 카메라 한 대만 가지고 떠난 7주간의 여행이었습니다. 가난했던 그들은 엄지손가락 하나로 히치하이크를 하고, 해변가나 공장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며 여름을 보냅니다. 그 여행의 기록은 아직 건축학도였던 남편, 스물일곱 살의 정기용이 직접 촬영하고 인화한 사진을 붙이고, 본 것들을 그리고, 겪은 일을 육필로 써서 만든 한 권의 책으로 남았습니다. 한국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훨씬 전의 일입니다.

이 책의 두 번째 기원. 그로부터 52년 후의 어느 날입니다. 시간이 흘러 건축학도는 건축가 정기용이 됩니다. ‘감응의 건축가’로도 알려진 그는 한국 사회에 공공과 건축의 관계를 질문한 인문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나날은 한 영화감독의 카메라에 담겼고, 끝내 영화가 되었습니다. 2025년, 정재은 감독은 정기용을 주인공으로 자신의 첫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를 만들었던 경험을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이라는 에세이집으로 막 출간한 참이었습니다.
한국 여성 성장 영화의 걸작 <고양이를 부탁해>를 시작으로 몇 편의 극영화를 만든 정재은 감독. 그는 처음 논픽션의 세계로 건너왔던 당시의 혼란과 경험, 생각과 공부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한 권의 책으로 엮기로 결정했습니다. 책을 통해 건축가 정기용의 시간들이 다시 재생되자, 정기용 선생과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이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는 정기용 선생의 생전 마지막 전시 <감응_정기용 건축전>를 준비했던 당시 일민미술관의 젊은 큐레이터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재회한 그들은 당시를 회상하다가, 오래된 책 한 권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책, 젊은 정기용이 손수 쓰고 찍고 그려서 만든 1973년 스페인에서의 여름 기록이었습니다.


세상 오직 단 한 권

(아래) 발간을 위해 새로 그리고 번역한 지도도 같이 수록했습니다. (스튜디오 홍박사)

파리의 건축학도 정기용은 크고 넓은 빈 공책을 한 권 펼쳐, 정성 들여 표지를 만들고, 스페인 지도를 그리고, 여행했던 도시들을 연결하고, 목차를 만들고, 본문 레이아웃을 잡고, 사진을 붙이고, 본 것들을 스케치하였습니다. 오직 수작업만으로 온전한 한 권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이 책은 만들어진 이후로 정기용 가족의 파리 자택, 수많은 자료들 사이에 잠들어 있다가 아주 가끔 세상에 나오곤 했습니다. 2011년 일민미술관의 전시 담당자로부터 그가 작고한 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린 회고전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의 담당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잠깐이라도 이 책을 열어본 이들은 비록 전부 불어로 쓰인 글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정기용의 건축과 세상을 향한 열정, 몇십 년 전 스페인의 생생한 풍경은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짧지만 강렬한 인상들은 이후 정재은 감독에게 14년 만에 다시 이 책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플레인아카이브에 출간을 제안하게 합니다.
Carnet de voyage en Espagne, Chung Guyon, été 1973 (스페인 여행 공책, 정기용, 1973년 여름)
이 책은 한국에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한참 전, 정확한 여행 정보도, 편안한 교통편이나 잠자리도, SNS는 물론 간편한 기록 매체도 없던 시절,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지금보다 풍성하지 않던 1973년에 오직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젊음이라는 사명, 그리고 아직 방향성을 탐구하던 열정이 이끈 52년 전 여름 여행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건축가 정기용의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강렬한 의의를 갖습니다. 1945년에 태어난 정기용은 서울대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회사와 대학원을 병행하며 불어를 익히고 국비 장학생에 선발되어 프랑스로 떠나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정기용은 실내 건축과 건축, 도시계획을 차례로 공부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와 그는 무주 공설운동장, 면사무소, 추모의 집 등 무주 공공 프로젝트, 노무현 대통령 사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 등 건축가이자 인문학자로서 수많은 업적과 생각을 남기고 2011년 3월, 병으로 작고합니다.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추억과 영감을 남겼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매년 무주를 찾습니다.
오래된 여행의 기록, 종이로 지은 정거장이 되다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는 정기용 선생과 가족들이 소중히 보관해온 세월을 고스란히 책으로 옮겨 독자들께 소개합니다. 헌책을 수리하는 재영 책수선의 도움으로 손상 없이 모든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분리하고, 종이 위 잉크 자국, 수정한 자국, 사진의 구김과 뜯어진 흔적까지 모두 고화질로 스캔하였습니다. 도서 디자인을 맡은 스튜디오 홍박사는 젊은 정기용이 고심하여 설정한 페이지 레이아웃을 창조적으로 잇고 해석하여 책 읽기의 즐거움에 디자인적 매력을 듬뿍 더했습니다. 국문 번역은 프랑스 국가공인건축사(D.P.L.G) 권현정이 맡았습니다. 스페인의 역사적 건축물부터 동시대 가장 평범한 건축물까지 세심하게 관찰한 정기용의 시선을 건축의 전문가이자 여행자의 마음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의 시작이 된 정재은 영화감독의 글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를 만든 정다영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도 오래전 이 책과의 짧고도 강렬한 마주침을 회고하는 글을 보탰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토대로 완성되었습니다. 전체 기획은 물론 디자인 방향, 표지 선정까지 함께하며 오직 가족의 것이었던 책이 독자라는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정기용 선생의 아들이자 현재 프랑스에서 건축사로 일하고 있는 정구노가 쓴 아름다운 에세이 「내 아버지의 여행 Le voyage de mon père」로 이 책은 종이로 지은 작은 정거장이 됩니다. 이곳에서 1973년의 젊었던 아버지의 시선은 이제 그 시절 아버지보다 나이 든 아들의 기억과 교차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
책의 제목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는 정기용 선생이 아들 정구노에게 남긴 말에서 따왔습니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의 건축가. 그가 평생 지녀온 건축가의 초상을 독자는 젊은 정기용의 여행기에서도 어렴풋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정기용의 여정은 산세바스티안에서 출발하여 빌바오, 마드리드, 톨레도, 세비야 등 대도시와 작은 마을들을 거쳐 종착지 바르셀로나로 향합니다. 그 길에는 산티아고의 대성당,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등 역사적이고 기념비적 건축물은 물론 보통 사람들의 주택과 광장이 있습니다. 예술을 향한 인간의 원시적 본능과 마주하게 한 알타미라 동굴이 있으며,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까사 밀라, 구엘 공원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50여년 후, 2026년에 드디어 완공을 선언할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가우디 사후의 혼란을 짐작하기도 합니다. 그 길 위에서 그의 시선은 자꾸만 보통의 사람들, 보통의 건축이라는 그저 지금 존재하는 삶의 풍경들에 머무릅니다.
1973년 스페인에서 시작된 여행, 마침내 독자에게로 닿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에서 독자를 가장 사로잡는 것은 건축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과는 정보도, 자료도, 접근성도 비교할 수 없이 빈곤했던 시절, 미지의 세상과 다름 없었을 스페인을 누빈 자유롭고 도도한 젊음의 장면들입니다. 그리고 다시 파리의 작은 책상 앞으로 돌아와, 여행에서 보고 듣고 익힌 것을 꼼꼼히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을 정기용의 뒷모습입니다.

그때 그는 어떤 독자를 상상했을까요? 표지 사진 속, 그가 다정한 시선으로 찍은 아름다운 여행자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머지않아 생길 아들이었을 수도, 언젠가의 자기 자신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여겼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 마음을 더이상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책이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파리의 책상 앞, 그로부터 머나먼 미래인 오늘에 마침내 독자인 우리를 만나, 1973년 스페인의 어느 특별했던 여름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
꼭 일 년만에 정기용 선생님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다시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제겐 참 이상한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기록은, 또 한 사람을 기록한 이야기는 얼마나 멀리, 또 오래 이어지게 될까요. 그 수많은 연결고리 중 작은 하나가 된 9월입니다.
독서모임이나 북토크도 준비하고 있어요.
소식 전해드릴게요!
[9月 1日] 그러니 이 책이 한 편의 영화라면🪟
<말하는 건축가> 정재은 감독의 예술 에세이『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인터뷰&레터]는 책과 영화를 아끼는 구독자 님께 띄우는 텍스트 기획자 임유청의 ‘읽고 쓰고 공유하기’ 활동 일지입니다. 온라인 레터 서비스를 통해 텍스트 사이에서 건져 올린
정기용 건축가의 마지막 시간을 담은 영화 <말하는 건축가>. 그리고 그 영화를 만들던 시간에 관한 정재은 감독의 에세이『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에 관한 이야기는 2025년 9월의 <인터뷰&레터> 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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