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미션 #2] ㅊ과 ㅇㅎ에 관한 ㅇㅇㅊ 일지

사진가가 주운 불시착들, 그리고 한 영화를 보고 쓴 글

2025.11.28 | 조회 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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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앤드 레터

책과 영화를 아끼는 당신께 띄우는 텍스트 기획자 임유청의 ‘읽고 쓰고 공유하기’ 활동 일지. 매월 1일, 이달의 작가와 책을 소개하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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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을 몇 가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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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식의 계절 표기법

가을에 주운 불시착들
-
사과
다른 차원의 당신
주차를 시도하는 낙엽들

 

발견하셨나요?

 

🍂

 

 

11월

 

 

 

임유청의 유청문장분리기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보고 난 저의 소감은 단출했습니다. 드디어 나왔구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무언가는 결국 우리에게 도달하는구나. 저는 이런 영화를 무척 기다렸지만, 그 미래가 언제가 될 지 몰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런저런 말을 남기는 대신 한동안은 다른 관객들이 남기는 소감을 찾아보는 데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날이 거듭할수록 <세계의 주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그만큼 많은 분들이 보았다는 이야기겠죠. (이렇게 기쁠 수가!) 아직 못 보신 분들 계실 거 같아 영화의 스토리에 관해서는 아직 말을 아끼게 됩니다. 어떤 정체 자체가 스포일러여서인 건 꼭 아니고요, 이 보편적이고 특별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반드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나를 발견하셨는지, 혹은 되실지 궁금해요. 

오늘은 그래서 윤가은 감독의 2019년 영화 <우리집>에 관해 쓴 지난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테크니컬러 드링킹: 까마귀의 모음 2집』에 수록한 글입니다. <우리집>에서 발견한 이 작은 단서가 몇 년 후 크고 강하고 멋진 주인공, <세계의 주인>이 되어 우리에게 왔다고 팬으로서 생각해버리고 맙니다. 

 

 


 

주류와 일체의 불안
『테크니컬러 드링킹: 까마귀의 모음 2집』에서

 

여자아이들은 폭력에 가장 취약한 집단으로 자주 ‘지정된다’. 그런데 때론 지정되는 행위 자체가 지위를 강화시키기도 한다. 약자에 대한 보호가 내면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취약 계층은 공격의 쉬운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여자아이들이 폭력의 손쉬운 타겟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더 많이 이야기되고 더 많이 문제시 되어야 한다. 다만 폭력의 대상으로 공표된 집단의 불안이 사회적 흥미와 쾌감으로 소비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아가 소비를 조장하는 집단과 분위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거다. 

많은 영화에서 여자아이들은 각종 폭력의 피해자로 재현된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일상적이거나 비일상적이다. 그들은 약함과 순결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위해 피해자가 된다. 피해자가 되어 어떤 악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여자아이들이 등장하면 그래서 불안하다. 실재하는 개별적 존재로 영화 속에 살아 움직이던 한 사람의 정체성이 ‘여자아이’라는 한 가지 특질로 한정되는 순간 피해자/상징/수단이라는 수동적 지위로 전락해버리는 일이 자주 목격되기 때문이다. 불안은 이런 방식으로 성별화된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는 여성의 불안을 소비하는 일에 자주 무감하고, 나쁜 설정에서 벗어날 기회를 빈번히 놓친다. 그리고 윤가은 감독의 세계는 다르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2019)은 불안이 마치 백색 소음처럼 전반에 깔려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주인공 하나와 유미, 유진이 아마도 평생의 동반자가 될 어떤 불안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을 그린다. 아이들은 내가 제 역할을 못해서 엄마아빠의 불화가 수습되지 않는 것인지 불안하고, 새로 친해진 동네 동생들에게 호언장담한 일이 이뤄지지 않을까봐 불안하다. 자신의 무력함에 관한, 누군가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평범하고 보편적인 불안이다. 이 ‘평범한 세계’엔 여자아이를 ‘여자아이’로 대상화시켜 불안으로 가장한 흥분을 유도하는 악의적 장치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다. 덕분에 윤가은 영화에서 성장하는 인물들은 오직 캐릭터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려는 목적으로 배치된, 관객은 괴롭고 영화엔 불필요한 상황에 빠지지 않은 채 자랄 수 있게 된다. 

이 아이들도 여자아이들이니까, 불안이 곁에 있는 게 익숙해지면, 그러니까 자라면. 밤길을 걸을 때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임신의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배달음식을 시킬 때나 택시를 탈 때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안정 노동의 전통적 당사자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이 될 것이다. 여성이 되어 여성의 것으로 지정된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의 미래인 나는 여자아이들이 처음으로 불안을 대면하는 시절을 윤가은 감독의 영화로 만나게 된 걸 다행한 일로 여긴다. 그 아이들이 처음 대면하는 불안이 여성의 불안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불안인 것에 안도한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성인 나는 주인공 하나의 아빠가 취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순간 불안을 느꼈다. 그 불안은 불화있는 가정의 술 취한 아빠란 으레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그 폭력의 피해자는 대체로 아내와 자식이던 그간의 영화적/사회적 경험에서 연상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다행’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다소 패배감이 들긴 하지만- 하나 아빠는 가족들을 때리지 않는다. 초등학교 5학년인 하나와 하나의 중학생 오빠는 화목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불행하지만, 그렇다고 부모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적 시간 위에 조심스레 지어진 순간들에서 우리는 여성이란 이유의 불안에 처하지 않을 수 있따. 그런 생각을 하는 나는 이 영화에게만큼은 주류 관객이겠지. 

오래된 불만을 떠올린다. 가정엔 불화를, 인물에겐 불안을 부여하기 위해 ‘술 취해 귀가하여 가족들에게 폭력적으로 구는 남성 가족 캐릭터’를 익숙하게 사용해온 한국 영화에 대한 불만이다. 영화라는 ‘허구’에 가정폭력이라는 ‘핍진성’을 불어넣고 싶은 창작자들은 엄연한 현실이라는 말로 애용의 이유를 설명할지 모른다. 하지만 흔한 건 손쉽다. 자주 지겹다. 많으면 불필요하다. 현실의 폭력 남성이 자신을 보통의 남편/아버지로 여길 근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선 체제 영합적이기까지 하다. 가정폭력은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가부장의 자괴 및 자위, 그를 이해함으로써 상처를 회피하고 싶은 여타 구성원의 정신 승리의 용도외에는 아무 효용이 없다. 그렇다면 가족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은 영화 속에서라도 멸종되어야 한다는 게 내 의견이다. 

 


 

 

첨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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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마지막 레터 [ㅊ과 ㅇㅎ에 관한 ㅇㅇㅊ 일지]에서는 두 개의 미니 코너가 있습니다. [표기식의 계절 표기법]. 사진가 표기식의 카메라가 채집한 이달의 계절을 연재합니다. 그는 어디로든 떠나는 사진가입니다. 따로 사진에 코멘트를 붙이지 않아서, 사진에 붙은 꼬리말은 ㅇㅇㅊ의 것입니다. 모바일로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될 수 있으면 PC의 큰 화면으로 감상하시길 추천합니다. [임유청의 유청문장분리기]는 ㅇㅇㅊ 에세이의 일부를 잘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종이와 화면에 놓여 있던 글을 자르고 분해해서 레터에 씁니다. 때때로 새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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