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과 외로움을 본다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일

난민 인권 활동가 유유리

2023.03.23 | 조회 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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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인터뷰해 드립니다

나다운 길을 걸어가는 당신을 인터뷰해 드립니다.

[인터뷰이 소개]

유유리 : 난민 인권 활동가.  비영리 단체 ‘한옥커즈(Hanokers)' 대표.     

난민 인권 활동가이자 한옥커즈 대표 유유리
난민 인권 활동가이자 한옥커즈 대표 유유리

영국과 스페인에서 국제 정치학과 이주학(Migration Studies)을 공부했다. 비영리 단체 행동하는 난민(Active Refugee Korea)’과 난민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프로젝트 한옥커즈(Hanokers)’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문화 위기 가정 지원 단체에서 사례 관리자이자 영어 미술 교사로 일했으며, ‘자하연구소(JAHA Institute Centre)’와 표현 예술을 매개한 상호 문화 교류 워크숍 나의 자장가 프로젝트의 그림책 작업에도 참여했다.

 

2018년 예멘 난민들이 제주에 도착한 이후로 난민 이슈는 차별 금지법만큼이나 논쟁적이었다. 숱한 오해 속에 난민법을 폐지하라는 요구와 시위가 있었고, 보신각을 마주 보고 찬반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난민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난민이 10명이면 10명의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들어 주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옆에서 함께 걷는 사람을 만났. 좀 다르게 살아볼까 생각하기조차 벅찬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꿈을 현실로 이어 가려고 애쓰는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유유리는 어떤 계기로 난민 문제를 자신의 삶 중심으로 가져왔을까? 그는 처음부터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이타적인 사람은 없다. 다만 힘겹고 어려웠던 시간이 삶의 변곡점을 만들어 주었다. 더는 자신 안에만 갇혀서 살 수가 없었다. 삶이 항상 친절함과 다정함을 베풀어 주지 않았지만 어떻게 단단한 내면과 탄력성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국내 비영리 난민 인권 단체인 행동하는 난민(Active Refugee Korea)’을 구성해서 한국에 거주하는 다양한 국적의 난민 출신 활동가들 지원하고 있어요. 난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한국 사회에 알리고, 보편적 기본 권리를 옹호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요. 난민 스스로가 사회의 일원이자, 인권 활동가로서 주체적으로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올해 새 정부가 출범했을 때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통해 4개의 언어로 번역된 난민들의 편지를 전달했고, 지난 6월에는 청계 광장에서 난민의 권리를 선언하는 축제라는 주제로 세계 난민의 날(620)’을 기념하는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했습니다.

저 같은 한국인 멤버들은 프로젝트 사업에 관한 의사 결정에 난민 출신 활동가들과 동등하게 참여하면서, 그들이 출신국과 언어, 정치,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 활동의 방향을 수립하고 의제를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일을 돕고 있어요.

또한 해외 사례 조사,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툴 개발, 통번역 지원, 시민 사회의 물적·인적 자원을 발굴하고 연결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어요. 핵심은 난민이 활동의 기획과 운영을 주도하며 보다 안전하게 인권 옹호 사업을 펼칠 수 있게 조력하고 지지 기반을 넓히는 역할입니다.

 

*행동하는 난민(Active Refugee Korea, ARK): 난민 주도 조직(Refugee-led organization)을 표방하며 난민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발화하는 동시에 당사자이자 정치적인 주체로 서는 길을 모색하고자 난민과 비(非)난민이 함께 결성한 국내 비영리 단체

 

한국인 활동가와 난민 출신 활동가들이 함께 공존하는 단체네요. 단체에서 활동하는 난민 활동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에티오피아, 콩고, 이집트에서 인권 운동을 하다 정부의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비호를 신청한 난민들이에요. 배경도 다양한데 본국에서 예술, 미디어 운동, 여성 운동, 정당 활동 등을 했고 현재 한국에서는 사진 기자, 영상 제작자, 사례 관리자로 살아가고 있어요. 언어적, 제도적, 문화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자기 결정권을 지닌 구성원으로서 자신들의 생활과 활동의 공간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한겨레 기사를 보니 지난 9‘UN 세계 평화의 날(International Day of Peace)’을 기념한 행사도 진행했었네요.

‘2022 UN 세계 평화의 날을 기념하여 유엔 난민 기구(UNHCR) 한국 대표부의 후원을 받아 ‘Peace Trail’이란 이름으로 걷기 행사를 진행했어요.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활동가의 가이드로 난민, 시민들과 한국 전쟁의 역사가 전시된 용산 전쟁 기념관을 먼저 둘러봤는데요. 호국, 반공의 정서가 가득한 전시관에는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등 이미 사실이 규명된 국가 폭력의 내러티브가 모두 삭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전투 중인 군인을 상징한 조형물들과 최신 전투기가 가득한 야외 전시장에 앉아 전쟁의 경험과 비극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평화를 기념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국가와 시민들은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질문해 보는 기회였어요.

오후에는 본국에서 내전과 무력 충돌, 정치적 억압을 경험한 난민들이 시민들과 나누고 싶은 평화의 메시지를 본국의 언어로 각각 몸벽보에 쓰고 남산 둘레길을 걸었어요. 이 행사와 함께 난민들이 평화 메시지를 SNS에 업로드하는 ‘Speak & Share Your Peace’라는 온라인 캠페인도 진행했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관심이 생겼나요?

대학생 때 2년간 총학생회 활동을 했는데 노동자와 학생 연대를 주도적으로 연결하는 연대 사업국에 참여했어요. 그때는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 학생회관과 운동장 등 공간을 내주고 집회나 시위 현장에 학생들이 참석하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웠죠. 지금은 비정규직이 너무 흔해져서 별로 문제 삼지도 않지만, 당시만 해도 불안정한 고용에 저항해 노조를 만들었단 이유로 해고당한 이랜드, 까르푸 계약직 노동자와 계약 해지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된 한국 통신 114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노동 문제, 특히 불안정 노동에 관심을 키우게 되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전공인 미술(조소)을 결국 내려놓고. 노동과 인권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요. 작업실에 틀어박혀 개인의 예술 세계에 몰입하는 것보다 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에 더 열정적인 자신을 발견했어요. 사회 권력을 둘러싼 현실과 이론을 공부하고 배우며 토론하면서 비정규직뿐 아니라 점차 성 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의 주류 집단 구성원에게 차별받는 소수자로 관심의 범위가 확장되었어요.

 한국에서 인권 관련 활동을 하다가 왜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나요?

2010년에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운 아픔과 상실의 시기를 겪고 2011년 봄에 친언니가 거주하는 미국 텍사스주에 6개월간 마음을 추스르러 가서 지냈어요. 어느 날 아침, 현지 신문에서 아랍 국가들의 연이은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Arab Spring)에 관한 기사를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미국에 거주하는 한 이집트 청년이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바다를 건너가 이집트 혁명에 참가하러 간다는 인터뷰 기사가 잊히지 않아요. 12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사를 스크랩한 걸 가지고 있어요.

그때 문득 나는 한국의 아픈 기억을 마주하기 싫어 미국에 숨어 있는데,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저 이집트 청년은 유혈 투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려 하는구나!’ 싶었지요. 동시에, 지구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이렇게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지역, 국가 간 분쟁과 저항의 흐름, 인권 문제에 대해 시야와 지식을 넓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어요.

*아랍의 봄(Arab Spring): 아랍권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뜻함. 201012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사태가 아랍 지역의 여러 국가로 전파되면서 대규모 민중 봉기로 확대되었다. 정부의 장기 독재, 부정부패, 인권의 유린, 빈곤 등의 경제적 문제가 큰 원인이 되어 일어난 시위운동 및 혁명의 물결이다.

우연히 마주친 기사 하나로 삶의 경로가 바뀌었네요. 영국에서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떻게 지냈나요?

국제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도 병행해야 했어요. 돌아보면 5년간 유학생이자 이주민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경험했던 시간 같아요. 한창 공부하고 하고 있을 때, 지중해 난민/이주민 사태(The Mediterranean Migration Crisis)가 터졌어요. 시리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군사 분쟁과 내전을 피해 온 사람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오려고 했어요. 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이주민들이 타고 온 보트가 파도 속에 뒤집히면서 죽는 일이 계속 발생했지요.

이주민들의 사망 행렬이 몇 년째 이어졌지만 유럽 국가들은 서로 난민 수용의 책임을 떠넘겼죠. 그러면서 국제 인권 보호와 국가의 도덕적 책무성 문제가 최대의 이슈가 되었어요. 당시 제가 공부하던 학교와 지역 사회에서도 이 주제로 연일 토론회가 열렸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분쟁과 강제 이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지요.

*지중해 난민/이주민 사태: 유럽 난민 사태라고도 한다. 2015년 들어 지중해 또는 동남유럽을 통해 유럽 연합 내로 망명하는 난민과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발생한 위기이다. 20154월 유럽으로부터 지중해를 통해 오던 난민 2,000명을 태운 난민선 5척이 한꺼번에 난파되어 약 1,200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살배기 아기가 익사해서 해변에 얼굴을 묻은 사진이 또렷하게 기억나네요. 테러와 전쟁의 위협을 피해 지중해를 건넜던 시리아 난민 가족의 비극이었죠. 유럽 현지에서 겪은 사건이라 더 생생하게 와닿았겠네요.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강제 이주와 난민 이슈에 눈뜨게 되었어요.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집단 이주가 항상 안보, 국익 등과 연결되어 문제시되는 현상을 더 파고들고 싶어서, 졸업 후 스페인으로 건너가 대학원에서 국제 이주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연구하고 논문만 쓰는 것이 아니라 난민과 이주민들이 유럽에 도착하기 전의 과정과 당도한 뒤에 맞는 참담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일에도 직접 참여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2016년 여름, 루마니아 난민 지원 단체에 인턴으로 지원하게 되었어요.

난민 지원 단체에서 인턴 생활을 한 경험이 궁금하네요.

제가 일하던 곳은 예수회 난민봉사기구(Jesuit Refugee Service) 루마니아 지부인데요. 난민 캠프 같은 수용 시설이 아닌 대안 쉼터를 운영하는 루마니아의 거의 유일한 난민 지원 단체였어요. 그곳에서 다양한 배경과 연령대의 난민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죠. 내전의 경험으로 트라우마가 생긴 한 시리아 남성은 브로커에게 속아 원래 목적지였던 독일이 아닌 루마니아에 와서 2년째 지내다 정신이 극도로 쇠약해졌어요. 아프리카의 북한이라 불리는 에리트레아에서 반군에 의해 땅에 묻힐 뻔했다 가까스로 도망친 청소년도 만났고, 인구의 4%가 노예 생활을 하는 모리타니에서 온 난민, 카메룬에서 온 여성 등 각 대륙에서 온 난민들이었지요. 난민 10명이면 10개의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들은 모두 친지가 거주하는 독일, 스웨덴, 프랑스 등으로 가고 싶었지만 불가능했어요. 유럽에 겨우 도착한 난민들이 최초에 맞닥뜨리는 규정 중에 더블린 조약(Dublin Regulation)이 있는데요.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은 처음 발을 디딘 국가에서만 망명·난민 신청을 해야 한다는 규약이에요. 결국 특정국에 난민이 몰리게 되어 있는 구조예요. 이렇게 루마니아에 발이 묶여서 취업과 자립의 기회도 없이 몇 년째 쉼터에만 갇혀 심신이 무너져 내린 난민들을 만난 경험을 토대로, 유럽 연합의 난민 수용을 둘러싼 위선적 담론을 비판하는 논문을 쓰기로 결심했어요.

*더블린 조약(Dublin Regulation)EU 역내에 들어온 이주민·난민이 처음 발을 디딘 국가에 망명·난민 신청을 해야 한다는 규정을 담은 것으로 1997년 발효됐다. 난민 발생 지역에 가까운 그리스나 이탈리아 등 특정 국가에 난민 부담을 지우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루마니아 난민 지원 단체뿐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발달 장애인 단체에서도 일했죠?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은 고유한 능력과 자질을 갖는다는 철학으로 세워진 ‘Garvald’라는 이름의 발달 장애인들의 공동체가 스코틀랜드에 있어요. 시내에서 떨어져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마을에 장애인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3년간, 발달 장애인의 일상을 지원하는 파트타임 스태프로 일했어요. 장애인들의 독립적 생활과 신체적, 예술적 재활 워크숍을 지원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했었죠. 장애인이든 난민이든 도움만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성과 고유성을 발현할 수 있도록 제도와 환경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걸 배우게 되었어요. 그게 존엄한 삶의 기초이지요.

난민이나 장애인 등 소수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유학 생활 중에 겪었던 일이 영향을 주었나요?

영국 유학 중에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2014년 여름 방학을 미국 언니 집에서 보내기 위해 숙소를 정리하고 미국에 갔는데 휴스턴 공항에서 24시간 갇혀 있다 영국으로 강제 출국당한 사건을 겪었어요. 2010년 처음 미국 입국 시에 제출했던 비자 관련 서류가 뒤늦게 문제가 된 것이죠. 당시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이민자들과 함께 입국 심사에서 2차 조사를 받는 세컨더리 룸으로 이동해서 강도 높은 심사를 받았어요. 24시간 동안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4번 심문을 받았는데 잠 안 재우는 고문이 어떤 건지 알겠더라고요. 결국 비자 취소에 입국 금지를 받고 영국으로 추방되면서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그 후로부터 1년이 채 못 돼 갑작스러운 암 진단을 받게 되었어요. 혈액암의 일종인 호지킨 림프종이었어요. 한국에 들어 와서 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학업을 지속하지 않으면 학생 비자가 취소되기 때문에 졸업을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래서 공부와 일을 계속하며 타지에서 혼자 외롭고 힘겨운 항암 치료를 견뎌야 했어요.

지금은 담담하게 말하지만 심리적 충격과 신체적인 고통을 어떻게 견뎠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나요. 이런 경험이 삶의 경로에 영향을 준 것 같은데 이런 시련과 아픔을 겪고 난 후에 깨달은 점은 무엇인가요?

미국 공항에서 그런 일을 겪고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와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당장 갈 곳도 없어 너무 막막했어요. 그때 스코틀랜드의 발달 장애인 센터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을 지인이 알려 주었어요. 그곳에 지원해서 두 달간 숙식하며 일하게 되었지요. 나를 품어 준 그곳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이 위로가 되었어요. 내내 마음을 짓누르던 휴스턴 공항에서의 트라우마에서 회복시켜 주었죠.

암 투병할 때 항암 치료실에서 만난 벨파스트 출신의 전담 간호사와 9개월 동안 나눈 인간적인 교감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깊이 남아 있어요. 항암 치료를 하는 8시간 동안 통증을 잊을 수 있게 유쾌한 말벗이 되어 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재밌는 시를 직접 지어서 문자로 보내 주었죠.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처음에는 고통과 무력감에 압도당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삶에 자연스럽게 융해되는 것 같아요. 나에게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발견하거나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과 장소와 연결되면서 더 단단한 내면을 쌓을 수 있었고 삶의 회복력과 탄력성을 키우는 기회가 되었어요.

질병의 고통이나 부정적 사건이 오히려 인식의 전환이나 세계관의 확장으로 다가왔네요.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오게 된 과정도 쉽지 않았지요?

당시에는 제 의지와 바람과는 상관없이 상황에 떠밀려 오게 됐어요. 스페인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관련한 일을 찾으려고 국제기구와 비영리 단체 등 15군데 넘는 곳에 지원했지만 실패했어요. 영주권 없는 유학생 출신이 일자리를 얻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방콕의 한 인권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것도 할 수 없었어요.

유학 시절에 만난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너무 어렸거든요. 당시 저희 부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어요. 남편은 축구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아기가 태어나고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공장과 경호 일을 병행하며 경제적으로 고군분투했지요. 둘 다 이주민으로서 스페인에서 살아가기 녹록지 않았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만 아기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출국 전,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아기를 안고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어려울 때 기댈 가족이 있는 본국이 있으니 행운이었죠. 본국에 돌아갈 수도 없고, 가족을 재회할 기약도 없는 난민들과 일하면서 한국으로의 귀국이 일종의 특권이었다고까지 느껴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난민에 대해 더 안타깝게 느껴졌겠네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동안 어떤 일을 했나요?

귀국하자마자 난민과 이주민 관련해 경험과 경력을 쌓을 기회를 찾으려 시도했지만 정보도 인맥도 없어 쉽지 않았어요. 우선 생계가 급했고 익숙한 활동 분야라 대학교수들의 노동조합에서 일 년 동안 사무차장으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곳에서도 외국인 교수들이 당하는 임금 차별, 불합리한 처우에 관해 개인적으로 관심이 컸었지요.

교수 노동조합을 그만두고는 난민 인권 활동을 했던 사람들과 운 좋게 연결되어, ‘난민 조력 시민모임이란 이름으로 미등록 체류 난민 신청자의 의료 지원과 법률 자문을 연계하는 등의 일을 집단적, 개인적으로 조력하기 시작했어요. 그 일을 통해 알게 된 사회 복지사들로부터 채용 제안을 받아, 이주 가정 사례 관리자로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어요. 필리핀, 라오스, 베트남 등에서 온 결혼 이주 여성과 위기 이주 가정을 방문하고 상담해 타 기관으로 의료와 복지, 법률 서비스를 연계하고 병원이나 출입국 사무소에 동행해 통역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이주 배경 아동을 대상으로 방과 후에 영어와 미술 수업도 진행했지요. 동시에 외국인 보호소에 구금된 이주민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정서적인 지원을 하는 시민모임 마중에 자원 활동가로 참여하고, ‘난민을 읽다라는 정기 온라인 책 모임의 운영자로 참여했어요.

작년에 했던 특별한 경험 중 하나는 이주민과 정주민의 상호 문화 소통을 위한 표현 예술 심리 치료 워크숍에 5회 참여하면서 그림책을 함께 발간한 일이에요. 자하연구소와 이주민과 정주민의 다문화, 상호 문화 교류를 주제로 한 나의 자장가라는 그림책인데요. 미술에서 손 뗀 지 거의 10년이 넘었는데 한 달간 바닥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하면서, 내가 배운 기술과 재능을 이런 계기로 다시 끄집어낼 수 있다는 데에 큰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자하연구소: 다문화 상호 문화 교육과 표현 예술 상담을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는 교육 치유의 공간. https://jahainstitutecentre.modoo.at

*나의 자장가 프로젝트: 이주민과 정주민이 함께하는 이 프로젝트는 이주가 배제와 경계가 아닌 만남과 소통의 연결 고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유유리는 9개국 언어로 된 나의 자장가그림책의 그림을 그렸다.

 

이주 배경 가정을 위한 일을 하다가 어떻게 난민을 지원하는 단체를 만들게 되었나요? 한국에서는 난민 문제에 대한 논쟁이 많잖아요.

한국 사회는 난민에 대한 인식과 정보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어요. 단지 이주민이란 이유로, 난민이라는 이유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가치, 존재감이 사라지는 모습을 많이 봐요. 그렇게 억눌린 모습과 저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요. 특정 국가와 종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런 편견이 강하죠.

제도의 부당함이나 차별에 대한 부분도 있지만 사실 더 큰 문제가 있어요. 난민을 위험하고 피해를 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이 사람들이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노동력으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며 물건 검수하듯 취급한다는 거예요. 인격을 가진 사람에 대한 고려가 없는 거죠. 그 누구도 그럴 자격이 없어요. 다름과 차이를 떠나, 각자의 존재는 어디서든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하니까요.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제가 이주민이나 난민에게 단순히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배우고 같이 성장하는 활동가와 파트너로 동등한 관계를 맺을 때 보람과 긍지를 느껴요. 제가 만난 난민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경영인, 정치가, 소설가, 변호사 등 참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대부분 언어와 취업 장벽, 차별 때문에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곳에서 다치는 경우가 허다해요. 그것을 보면서 본국에서 난민들이 가졌던 다양한 경력과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가 없을까, 고민하면서 올해 한옥커즈(Hanokers)’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난민들과 한글 배움터를 운영하며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메타버스 콘텐츠 개발, 한옥 체험업, 1:1 외국어 튜터링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난민들의 언어 자원을 활용해 프리랜서 일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몇 명의 파트너와 수개월간 시도했지만, 번번이 큰 벽에 부딪히고 있어요. 난민들의 법적 지위에 따른 취업 직종의 제한 등 법적, 제도적 장벽도 있지만, 제가 가진 인적, 물적 자원의 한계가 가장 컸었죠. 하지만 저의 구상에 귀를 기울여 주고, 진지하게 조언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주위에 있으면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어요. 일을 한다는 것은 생계 해결을 넘어 삶의 동력이자 나침반이고 그건 저에게도 난민에게도 마찬가지지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볼 거예요.

 

관련된 예산이나 지원이 미미하니,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일이네요. 지금 하는 일에서 갈등이나 어려운 점이 있다면요?

일단 아기가 어려서 육아와 병행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스페인에 있을 때 출산한 아이가 벌써 4살이 되었어요. 남편은 현재 스페인의 난민 쉼터에서 일하기 때문에 가족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만 같이 지낼 수 있어요. 앞으로 어디에 정착해서 아이를 키우며 같이 살지, 생계와 육아를 어떻게 분담할지, 불확실한 점이 많고 장기적으로 삶을 계획하기 어려운 변수로 작용해요.

그다음으로 힘든 점은 경제적인 부분이죠. 한국에는 난민 관련된 일자리가 흔치 않고 노동량에 비해 보수도 적고, 대부분은 단기 프로젝트나 재단 지원이나 개인 후원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활동비 형태로 지급받는 것이 다예요. 그래서 단기 연구직, 도서관 강의, 영어 과외, 영상 편집 등 다른 일들을 병행할 수밖에 없어요.

마지막으로, 저는 난민의 취업과 경제적 통합 분야에서 활동의 지평을 넓히고 경험을 축적하고 싶거든요. 사실 2017년 스페인에서 석사 논문을 쓰면서 그 주제에 주목하게 되었고 귀국 후 한국에서 실현해 보고 싶었어요. 유럽에서는 대학, 기업, 노조, 지역 사회가 난민에게 훈련과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노동 시장에 통합시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는데, 한국에서는 난민과 관련해 이슈를 인권 운동 밖으로 확대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사회적으로 난민 혐오 같은 배타적 담론이 지배적인 데다 난민 보호의 제도적인 미비함이 강조되다 보니 인권 변호사와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구조적, 정책적 개선에 관한 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그래서 함께 일할 사람, 즉 사업 파트너와 후원자를 찾는 것이 더 어렵다고 느껴져요.

악조건 속에서도 계속 일하는 이유는 어떤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에 몰입하게 되는 원동력이 있다면요?

이 일을 하면서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제가 수많은 사람을 만나 관계 맺고 생각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감과 소통 능력이 의외로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오랫동안 그들을 관찰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얻어진 결과일 수도 있고요.

성취, 성과, 결과 여부를 떠나 내가 배워 온 이런저런 지식과 경험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다는 효능감이 쌓였어요. 내면의 가치에 집중할 때 자신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부분이 있어요. 어떤 일이든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 같아요. 저도 이 일을 통해 자신을 재발견한 케이스에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분명한데 각오가 필요한 직업 같아요. 주변의 반대로 있을 것 같고요. 만약 이런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모든 일에는 어느 정도 각오와 준비가 필요하지요. 제대로 된 기본 지식을 가지고 정책과 법, 제도, 각각의 사례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시야와 노력이 필요하고, 두 번째로는 이주민, 난민들과 일할 때 마주치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와 개방적 태도, 소통 능력인 것 같아요.

기니 출신인 제 남편은 지금은 스페인의 CEAR(Comisión Española de Ayuda al Refugiado) 난민 쉼터에서 통역과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저처럼 이주학이나 그와 관련한 학위는 없지만, 18살에 스페인으로 건너와 사회 통합을 위한 노력 속에서 카리타스(Cáritas), 적십자(Red Cross) 같은 난민 구호 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여러 난민 이주민 단체, 커뮤니티와 연결되고자 노력했어요. 그 덕에 스페인과 주변국의 난민 보호 시스템과 실상에 대해 어떤 측면에서는 활동가보다 더 잘 알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난민과 인권 운동은 상상력을 발휘하면 담론과 이슈의 지평을 얼마든 확장할 기회가 있어요. 기자, 예술가, 기업인 등 다양한 네트워크가 가진 잠재성에 주목하고 자신의 자원을 쌓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요?

뻔하지 않은 삶. 안될 것 같아 시도조차 안 하고 지나온 것들이 많아요. 다른 한편으론, 논리나 의지만으로 살아지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때론 엉킨 실타래같이 복잡하고 모호한 순간들이 오더라도 그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인생의 경로가 항상 일관될 순 없고 외부적 요인이나 변수가 따르지만, 원칙과 주관이 있다면 어떤 길로 가도 삶의 구심력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알리고 싶은 것이나 바라는 것들이 있다면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자신의 나라에서 밀려나듯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국에서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그 고통을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삶의 터전도 국적도 갑자기 잃어버린 사람들 앞에서 국경을 지키고 국익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요. 안전히 설자리가 필요한 그들에게 조금씩 공간을 내주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울까요.

힘 있는 나라의 국민들은 전 세계 국가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죠. 반면에 국적을 잃은 채 새로운 땅에서 삶을 재건하길 희망하는 강제 이주민들이 전 세계 인구 100명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우리가 알았으면 합니다.

리고 사람 앞에 제발 불법이란 단어를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법을 위반하는 행동을 할 수는 있어도 사람이 어떻게 불법일 수가 있을까요? ‘불법 체류자란 표현 안에는 체류 기간이 지난 이주민을 범죄자로 낙인찍는 부정적 이미지가 씌워져 있어요. 유엔과 국가인권위원회는 대신 미등록 이주민, 이주 아동이란 표현을 쓰도록 권고하고 있어요.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단어를 사용하고, 관련한 교육을 반드시 하고, 언론과 국가 기관에서부터 제대로 된 용어를 사용해야겠습니다.

 

[인터뷰어_유희재] 아동·청소년 대상으로 진로 콘텐츠 개발과 강의를 한다. 교육 출판 기업에서 교육과 연구 개발을 담당했고, ·중학교 및 공공 도서관에서 진로교육과 독서토론, 글쓰기, 문해력 수업을 하고 있다. 읽고 쓰는 삶을 통해 지속 가능한 행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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