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 천사는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

* 김복희

2023.07.17 | 조회 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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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

 

※ 공지

<흑심>의 연재 시간이 변경될 예정입니다.

주연: 수요일 자정

미지: 토요일 자정

혼동 드려 죄송해요. 잘 부탁드려요!

 

 


 

 

집에는 뜯어 놓은 물티슈가 세 개나 있다.

 

비타민 젤리는 네 통을 열어 두었다. 라이터는 셀 수 없이 많다. 새것과 헌것에 대해 생각하고, 새것에서 헌것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헌것을 잊어버린 뒤 새것을 헌것으로 만드는 행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나는 잃어버리지 않고 잊어버린다.

 

태어난 뒤로는 모두가 헌 사람이다. ‘태어남의 경계가 고민된다면 언제 처음 버섯을 먹어 보았나를 기억하면 된다. 기억상으로, 나는 일곱 살 즈음 처음 버섯을 먹었고 씹는 순간 뱉었다. 입에 넣는 건데도 맛이란 게 없을 수 있구나. 그제야 없는 맛을 알았다.

버섯과의 첫 경험이 기억나지 않을 때는 바나나를 떠올려도 좋다. 혹은 아몬드. 유산균. 나는 유산균을 좋아한다. 현미밥. 나는 현미밥도 좋다. 땅콩잼. 종이. 종이를 언제 먹어 봤지? 머리카락. 남의 머리카락. 선풍기. 선풍기 날개를 먹자 새장에 갇혀 버리는 사람에 대해 쓰고 싶다. 선풍기 사람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사람. 너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구나, 같은 말을 듣고 ISFJ 일 것 같고. 또 뭘 먹어 보지. 첫 키스. 그건 한 번 먹고 마는 게 아니라 한 번 사서 계속 먹을 수 있는 것에 가깝다. 알사탕. 나는 사탕을 육 개월에 한 번꼴로 먹는다. 사탕을 한 번 빨고 반년 뒤에 다시 빨고 싶다. 육 개월 전에는 초코맛이었다가 육 개월 뒤에는 초코 바나나맛으로 변하는 사탕을 갖고 싶다. 아몬드 맛. 유산균 맛. 현미밥. 땅콩 맛. 종이 맛. 머리카락 맛. 엄마 머리카락 맛. 아빠 머리카락 맛. 맛이 없는 맛. 아무 맛도 나지 않으면서 입에 머금고 있어야 하는 맛. 우리는 그것을 농담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틀에 한 번 책을 먹는다. 책에서는 전나무 맛이 나는데 종이가 두꺼울수록 이에 끼지 않고 소화도 잘 된다. 오래된 책을 먹으면 단풍 냄새가 난다. 아마 제본상의 문제인 것 같은데 인간은 그게 무엇이든 백 번을 씹기만 하면 삼킬 수 있다. 이번 달에는 배수아가 옮긴 아글라야 페터라니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를 먹었다. 표지가 양장이라 금세 어금니가 묵직해졌지만 폴렌타 맛이 나지 않는 폴란타를 먹다 보니 마음이 상쾌해졌다. 책에서는 종종 버섯 맛이 난다. 읽지 않고 먹어버리는 헌 책이 있고 읽어 놓고 먹지 않는 헌 책이 있다.

 

이하 폴렌타속에 나오는 음식은 다음과 같다.

_소금과 버터를 넣은 폴렌타

_솜사탕

_마늘 넣은 닭고기 구이

_해바라기 오일을 곁들인 검은 빵

_스마티 초콜릿으로 장식한, 망자를 위한 거친 밀가루 케이크

_깜짝 선물이 든 껌

 

모든 음식을 씹을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음식은 비벼진다. 닭고기와 스마티 초콜릿을 비벼 먹는 장면이 책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안 읽어서 모르겠다.

지옥에 가면 지구에서 남긴 음식들을 한꺼번에 비벼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어서, 완벽한 비율의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 나는 매번 콩나물과 고추장을 조금씩 남기고 있다. 단것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한다.

 

엊그제 친구와 지하철역을 걷던 와중 2023년도부터 시행된 만 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어 버리는 것 때문에 우리나라가 낙태를 금지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죽음과 사람을 연결시키지 않는다. 문보영 시인은 트위터에서 공간 거부는 결국 공간 찬양과 이어지는 것 같다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공간자리에는 어떤 단어가 들어가도 잘 읽힌다.

 

나는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 진중한 것 같아. 죽음을 멀리서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오늘 점심 뭐 먹어? 잘 잤어?처럼. 어제는 죽었다 깨어나서 뭘 했어? 죽어 보니 어땠어? 묻게 된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죽어 버리는 생각. 그래도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 왜냐면 나는 약도 먹고 싶고 울고 싶고 <도그빌> 같은 영화가 꽤 괜찮은 영화라며 떠들고 싶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

 

죽지 말자고 생각하면 죽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누구든,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음.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을 때, 버스를 탔다면 분명 다쳤을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니 버스를 타지 않은것은 잘한 일이라 자위한다. 또 이것은 죽음과 연결된다. 죽지 않았으면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나는 누가 죽는다고 해도 응원을 할 수 있고 슬프지 않고.라고 쓰는데 왜 항상 울게 되지. 명확히 말을 할 수가 없지. 죽음과 관련된 말을 하면 언제나 울게 된다. 씀은 말과 같기 때문에 나는 죽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항상 운다. 항상. 언제나. 너는 항상을 모르지. 너는 언제나도 모르고 도 모르고 매일도 모르고 지속도 모르지. 나는 항상 언제나 늘 매일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저녁에도 마음이 밤처럼 무너진다. 하지만 무언가 무너진다는 것은 쌓아 올렸다는 뜻이고.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래도 책상에 올려놓은 쓸 데 없는 (쓸 데 있는) 책들은 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동시에 네가 넘어지면 좋겠다. 일으키려고.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하면 죽고 싶어진다. 죽음죽음죽음 해도 죽고 싶어진다. ? 해도 죽고 싶어진다. 으음너너 하면 뭔지 모르겠다. ?

죽음

죽음? 죽음??

. 죽음.

죽으음

죽음

 

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

 

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

             죽어

             죽어

             죽으

죽음죽음죽음죽음죽으라고

                               죽

                               음

                               죽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음음

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       

     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             O        O        O

 

 

이런 게 항상이다. ‘언제나. ‘이고 매일매일이다. 죽음죽음

 

에세이가 사이트에 올라간다면, 메일로 발송된다면 나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죽음ᅟᅮᆨᅟᅳᆷ같은 글자나 ㅈㅇ 으ᅟᅳᆷ따위의 글자로 보일까?

화면에 오류가 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대충 죽이라는 글자로 죽을 만들었고요 음이라는 글자로 음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시 같다. 죽음으로 만들어진 죽음.

 

정직하지 않은 에세이를 적어 보고 싶다. 읽기 쉽게 쓰고 싶다. 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나는 뭐든 시를 위해 한다. 내가 네 죽음을 시로 쓰면 어쩌지? 네 마음을 시로 쓰면 어쩌지? 그때는 죽어야지. 학교에는 시를 잘 쓰는 사람이 많다. 나도 형태적으로 적고 싶은데 웃긴 시가 제일 좋아서 뭘 해도 웃겨 보인다. ? ? 넌 죽음이 웃겨? 나도 죽음으로 만들어진 죽음이다. 나도나도 죽음으로 만들어진 죽음인데 글은 웃기고 나는 안 웃겨. 나는 웃을 수가 없어.

 

죽음을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삶의 종착지가 죽음이라면, 죽음이 결말이 되면, 우리 모두는 죽음으로 가는 것이 되고, 죽음이 목표가 되고, 죽음이 비극적이라면 목표는 비극이 되고, 비극적이지 않고자 목표가 아닌 비극을 본인과 동일시하여 그의 입장에서 메타인지한다면, 나처럼 죽음에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죽음이 사당역이라면 나는 서울대공원역에 있고 싶다. 그곳이 서울숲이라면 구로에 있고 싶다. 죽음이 버섯이면 나는 서랍이고 싶다. 죽음과 가깝지도 죽음에 관여하지도 않고 싶다. 버섯과 서랍은 음싶은 사이니까. 그런데 누가 서랍에 버섯을 넣으면 어떡하지? 한강 작가는 저녁도 넣어놓던데

죽음이 언제나 나와 동반하는 세계라면나는 나에게서 떠나고 싶다. 가뜩이나 먼 곳. 그것은 내가 나의 몸과 일치되지 않는 감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근원적인 이야기다.

 

죽어 있다면 다시 죽을 필요도 없다.

 

이랑이 부른 <환란의 세대>의 가사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우리가 먼저 죽게 되면.

일도 안 해도 되고

돈도 없어도 되고

울지 않아도 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만나지 않아도 되고

편지도 안 써도 되고

메일도 안 보내도 되고

메일도 안 읽어도 되고

목도 안 메도 되고

불에 안 타도 되고

물에 안 빠져도 되고

손목도 안 그어도 되고

약도 한꺼번에 엄청

많이 안 먹어도 되고

한꺼번에 싹 다 가버리면 멸망일 테니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 좋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깔끔하다

 

그러니까 노래에서는 헤어지지 않아도된다 말하지만 죽으면 헤어지게 되잖아. 헤어지지 않아도 헤어진 기분이 들잖아. 언니가 죽으면, ‘이제는 언니가 아니야가 아니라 언니였던 것이 되잖아. 그러면 깔끔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그래도 죽지는 마, 하고 말하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없다.

 

그래서 죽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죽으라는 말은 물론 아니고. 죽지 말라고 부탁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읽힌다면 그렇게 읽도록 두고 싶고. 그렇게 읽어줬으면 좋겠고 근데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내 책임 아니라고 따지고 싶고. 따지면 울게 되는데 죽으면 안 울어도 되고. 이게 죽으라는 말은 절대 아니고. 나는 죽음이랑 멀어지고 싶다. 하루 종일 배고픈 사람처럼 죽음죽음 거리기 싫다. 아무나 붙잡고 죽지 좀 말라고 사람을 당황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시나 쓰면서 살고 싶다. 시를 쓰면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 하게 돼서 잠깐 안 쓰고 있다. 나는 시에서 멀어지고 싶다. 아니다 죽음에 대해 많이 쓰고 분할되고 싶다. 연연하고 싶다. 죽음을 대상화하고 동력으로 만들고 그래서 시를 잘 쓰고 싶은데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시를 안 쓰고 싶다.

 

나는 영원히 지하철역에 앉아 있고 싶다. 사당과 낙성대 사이, 사당역과 방배역 사이, 사당과 남태령 사이, 사당과 총신대 입구역 사이. 그곳에만 있고 싶다. 하나의 역에서 이어지는 네 개의 길. 투명해진 채로 지하에 앉아 만 나이 같은 이야기 없이 조용하게. 사람들이 자리에 앉거나 서거나 하며 휴대폰을 보는 모습, 사람이 사람에게 목을 대고 자는 모습,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 자리를 양보하기 싫어 자는 척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보고만 있고 싶다. 죽으면 여기저기를 떠돌며 역과 역 사이에 앉아 아무거나 구경할 수 있을 텐데. 분명히 그럴 수 있을 텐데. (분명하지 않다.)

 

친구는 아이를 지웠다. 지웠다는 말은 이상하다. 없앴다, 살고자 했다, 도 이상하다. 사랑했다, 도 이상하고.

그냥 그렇게 되었다.

아이를 낳는 것이 낳는 일이라면

낳지 않는 것은 낫는 일이 되나.

아픔이 낫는다는 말도 이상하다. 아픔은 낫는 것이 아니다. 그건 받아들이는 거다. 내가 죽은 사람을 받아들이듯이. 그러나 죽은-사람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죽었는데 어떻게 사람일 수 있지. 사람이었던 것, 여자친구였던 것. 언니였던 것. 엄마였던 것. 사람이 아닌 것(버섯. 양파. 땅콩.)을 평생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슬프지만 사람을 평생 보지 못한다고 하면

평생이라는 것을 저버리고 싶다.

너도 그러니?

 

날아갈 것 같다.” 내가 말한다. “하지만 날아가고 싶지 않아새가 답한다.

 

자동 응답기에 목소리를 녹음해 두고 싶다. 김복희 시인은 천사는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고 적었다. 사람은?

 

친구는 아이를 지운(없앤,살고자,사랑한,나은,)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그때 아이를 낳았다면, 당시 애인이었던 사람과, 책임감으로라도, 억지를 써서라도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고 말했다. 나도 그랬을까.

1. 나도 누군가의 책임이었을까

2. 우리가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까

3. 그렇다면 연결될 수 있었을까

4. 차라리 내가 네 아이였다면 어땠을까

억지를 써서라도.

 

억지인 것을 안다. 알아서 나는 조용히 있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는 타인의 죽음을 구경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집에는 같은 물건이 20%, 30%, 40%씩 사용된 채 여기저기 분포되어 있고

사람은 없다. 나는 80% 정도 사용된 헌 것에 불과하다. 나와 물건의 공통점은 한 집에 있다는 것, 살고 있지 않다는 것. 나와 물건의 다른 점은 그들은 같은 것이 여럿 있고 나는 나 같은 것이 하나 있다는 것.

 

내가 나 하나라는 것.

죽으면 죽지 않아도 되지만 죽으면 죽어 버린다는 것.

 

그것이 같고 다르다.

 

 

 

<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는 선인장도 안아 주는 '미지'와 고양이처럼 나뒹구는 비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주연'이 함께합니다.

· 미지: poem.aboutyou@gmail.com / 마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 주연: micoks2@naver.com / 답장에 답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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