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 정록에게

20220703

2023.08.02 | 조회 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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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

 

 

- 겨울이 되면 하고 싶은 것

 

여자친구 재우고 나오기, 나 재워줄 여자친구 찾기, 아침까지 잠 자기, 씨 없는 수박 먹기, 다이어리 모으기, 유명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연예인 되기, 촌스럽지 않은 어투로 백화점 가보기, 가장 비싼 옷을 일곱 벌 사서 엄마 주기, 커피 시키지 않고 카페 앉아있기,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로 손자국 남겨보기, 누가 지나가나 기다리기, 히터 틀고 낮잠 자기, 악몽은 꾸지도 기억하지도 않기, 귀가 큰 동물 되어 죽은 사람 말도 들을 줄 알기, 죽은 사람이 그리워하는 이름마다 적어놓기, 대신 불러주기, 미연아, 수진아, 너 내가 죽은 것 아냐? 같은 말은 전하지 말기, 언젠가,라는 말을 쓰는 사람에게 언제요? 물어보기, 언제요? 언젠데요? 약속 받아내기, 받아낸 약속날에 너 만나러 가기, 너무 오래 뛰는 심장으로 안아주기, 첫키스 다시 하기, 복원하기, 밤안개 속으로 걸어가기,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들여다보기

 

- 여름에 내가 하고 있는 것

 

아침은 나에게서 고양이, 고양이에서 정민의 차례로 든다. 내가 그녀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할 때 보통 정민은 내게 등을 보인 상태다. 나는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자는 네가 안쓰럽기도 하고, 너를 보기 위해 내가 꿈에서 달아났을 때, 여전히 그 속에 있는 네가 서럽기도 하여 잠깐 등을 맞댔다가 이내 견디지 못하고 네가 가진 등 뒤의 점을 이어본다.

 

정민과 고양이가 자는 모습이 꼭 엄마와 딸의 모습 같아 사진을 몇 장 찍고, 뽀뽀를 하고, 깨어난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가, 우리가 같이 네 얼굴에 공격하듯 부리를 쪼아댈 때, 잠든 정민은 내 말에 대답을 못 하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할 말을 고양이에게 하고, 그럼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고양이가 네게 말을 전해줄 것이라 믿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처럼 내가 네 배제되지 않은 아침을 수호하는데 네가 나의 저녁을 지켜주는 덕에 나는 적은 용량의 사랑마저 아깝지가 않다. 계절이 이동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자전하는 것이 오로지 행성의 탓임을 믿을 때 그녀가 나의 잠을 대신 자듯 나를 쓰다듬고, 땀을 닦아주고. 그러면 나는 꿈의 입구에서 잘 다녀올게, 어디 가지 말고 있어, 그렇게 잠시 밤의 외출을 행한다. 내가 너를 믿을 때 너 또한 나를 믿고 있다는 것. 나는 여름의 밤마다 먼저 세상에 두고 온 네가 생각나 허겁지겁 밤을 마무리 지어서 꿈 이야기는 늘상 뒤죽박죽이지만, 그래도 정민은 내 이야기를 아침마다 들어준다. 그랬구나, 그런 꿈을 꿨구나. 그럼 나는 다시 어서 네가 나오는 꿈을 꾸고 싶어진다.

 

정민이 일어날 즈음이면 어느새 해는 저물어가지만 그것은 여전히 계절이 이른 탓, 네 아침에 내 아침을 맞춘다. 계절이란 시간보다 타인과의 속성, 그래도 좋은 것이기에 나는 새벽의 산책을 자처한다.

 

-오늘의 나

 

살 좀 빼려고 시작한 일이 배고프고 글 쓰는 몸이 되도록 나를 도와주고 있다. 어제는 뮤지컬을 봤는데 오페라 하우스에 가는 길에 잔광이 스며든 여름처럼 목이 갈라져서 물을 찾아 헤매다 시간이 부족해 쉽게 포기했더니, 정민이 달려가 물을 사 오는데, 나를 위해 마실 것을 사 오는 일이 내가 기억하기론 두 번째라 붙기도 안기도 싫은 여름에 아이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이에게 내가 뭘까? ‘내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가정하고 상상하다 보면 무엇도 될 수 없으니 그만두어버리는데 신기하다. 내가 스물두 해동안 애써 나를 끌어오는 동안 얘가 일 년 동안의 주연을 이미 무언가로 만들어버렸다.

 

그게 정녕 무엇인지 나는 비유를 통해서만 알 수 있겠지. 침을 삼키기도 힘든 열병이라든가, 배가 고픈데 주변 식당이 패밀리 레스토랑밖에 없어서 모종의 이유로 식사를 포기한 저녁이라든가, 계획을 세운 서울 나들이에 나만 유행에 뒤떨어진 것 같은 옷을 입은 기분, 혹은 너무 멋을 부리려다 이상한 옷을 입은 기분, 내 생일 파티에 초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엄마가 피자를 몇 개 시켜둘까? 많이 시켜야겠지? 묻길래 몰래 울었던 어릴 적 기억…….

 

엄마도 울었을까? 몰래 외로웠지만 나는 힘껏 외로웠어서 티가 났을 수도 있겠지. 내가 외로운 걸 숨기지 못할 만큼 서툴러서 엄마도 외로웠을까? 그런데 언젠가 그것에 무뎌지거나,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거나, 정말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줬다면 또 어땠을지 나는 모르지

 

어린 딸의 생일을 엄마만큼 축하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엄마가 알아버리면 어떤 기분일지도 영영 모를 테고.

 

정록아 네가 저번에 말했지 어떻게 타인이 너를 그렇게나 있는 힘껏 껴안을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고

 

나는 이제 엄마도 모르도록, 다만 밖에 나갔다 커피를 몇 잔 마시고 영화를 연달아보고 조금 울다 오면, 혼자서도 잘 다니고 씩씩하다는 말을 듣는 스물에 그제야 모든 것이 맞물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외롭지 않고 가끔 옛일에 화가 나거나 지난 사람들에게 서운하지만 적어도 혼자 단단하다고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지만 정말로, 정말로 상관없었고 제쳐두었고 나는 나의 글과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가족과 앞으로의 여행과 내가 맞이하는 낮들만이 중요했는데

 

직접 구사한 언어로 듣진 않았지만정민이 나를 너무나도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외롭게 한다

정확히는 모든 것이 상관없었던 과거의 나와 언젠가는 정민을 잃거나 정민으로 인해 크게 슬플 미래의 나를 외롭게 해 그게 걱정이 돼 너무나

그때 엄마는 슬플까? 엄마가 슬퍼할 만큼 내가 티 나게 외로워질까?

정민이 이미 들여다보고 쓰담아준 내가 문이 열린 채로 방치된다면 이제 창으로 들어오는 신 바람에 나는 계절도 알 수 없이 웅크리겠지. 무언가 전이된 것처럼 배는 부풀고 영혼은 그늘에서도 죽지 않고 계속, 외롭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외로운 일은 없다

먼 미래다

혹은 가깝거나

땅은 솟고 파도가 칠 새도 없이 세상이 거대한 실내가 되는 이야기다 멸망은 올 텐데 어쩔까 정록아

사랑해서 너무너무 무섭다 이게 지금 나의 고민이야 정말 어쩌지

나를 보겠다고 열심히 뛰어오고 글을 쓰고 생일을 두 번 챙기면 기어이 울고야 마는 아이를 어쩌면 좋니

얘는얘는반짝반짝하다

투명하다

희고 촉촉하다

그 친구도 그런지 궁금하다 사랑하면 다 투명해 보이는지 정민 고유의 투명인지

너는 무섭지 마라

하지만하지만조금은 무서워해라

너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아주 힘껏 무서워하겠지 나랑은 다른 이유로

내가 네 멸망을 구경해 줄게

나도 잘 부탁한다

또 보자주연!

 

 

*

 

 

2273일 구독자가 없어 정록에게만 발송했던 여름의 메일링을 바깥에 풀어둔다. 시계는 둥근 모양이고 계절은 돌아온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날씨는 아마 삼십도 안팎을 웃돌 것이다. 나는 체크 문양의 코르지가 달린 슬리브리스를 입을 것이고 혹은 시집을 찢어 만든 패치워크 티셔츠를 꿰어 입을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입지 않을 것이다. 몸이 아닌 것을 얹고 몸인 척하지 않을 것이다. 냉장고에 들어가 순두부를 으깨어 크레이프 케이크로 만들 것이다. 여름은 그런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친구들>이라는 이름의 요리책을 내어 내가 그들을 어떻게 분리해 냉각시켜 먹었는지를 자극적이고 구체화해서 적어둘 것이다. 만남과 이별과, 그러니까 죽음이 추상적이고, 별을 보고 무슨 모양이냐 묻지 않듯이, 자세를 잡고, 묻더라도

별은 별 모양.

이라는 대답만 돌아오듯이. 언제나 심장은 심장이었다.

 

- 겨울이 되면 하고 싶은 것

 

자동응답기 들었다 놓기, 마당 전면에 봉숭아 심기, 다연이랑 늑대거북이 보기, 휴게소에 딸린 주유소 가기, 가죽으로 된 위조지폐 쓰기, 병뚜껑으로 만들어진 천변에서 눈천사 만들기, 양철 튜브 입기, 마라 엽떡 먹기, 슬로우모션으로 생각하기, 영생하는 사람 죽이기, 사람이 아니어도 되기, 철조망 덮개로 만들어진 이불 덮기, 잠들지 않기, 외국 식수로 샤워하기, 실수하기, 실종되기, 무형 되기, 기우뚱하기, 난동 부리기, 무모해지기, 태어나기, 심신상실, 방금 말한 거 빼고 모두 다.

 

- 오늘의 나

 

하루 종일 밥이 아닌 것을 먹었더니 속이 느글거린다. 한강에 다녀왔다. 치킨에 흑맥주를 먹었다. 다연은 한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해가 지는 시간과 뚝섬 한강 공원 여의도 한강 공원 잠실 한강 공원 이촌 한강 공원 망원 한강 공원 반포 한강 공원 같은 걸 모조리 찾아보고 다연을 최고-최상-최선-한강에 놓아두고자 했다. 갤러리를 열어보니 물을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고 다연의 사진만 있었다. 모두 세아려보니 97장이었다. 다연은 자기 전에 린스 나라에 사는 린스 친구들이 어떻게 비누 친구들과 샴푸 친구들과 물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지를 지어냈다. “다여나. 내가 너를. 제일 믿고. 너밖에 없고. 너를 제일 조아해서. 묻는 거니까. 솔직하게 대답해야 대. 이거 꿈이야?”라는 나의 질문으로 시작되어, 아프다고 생각하면 꿈에서도 아파버려서 꼬집어 생채기가 나도 이곳이 여전히 꿈인지를 알 수 없다는 나에게, 왜 여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까지나 꿈이 아닌지를, 현실인지를, 알려주는 방법으로 다연은 동화를 선택했다. 현실 인식이 꿈같은 동화로부터 나온다니.

 

다연의 이야기는 배수구에서 시작된다. 배수구에는 린스 친구, 샴푸 친구, 폼클렌징 친구, 폼클렌징 친구가 있다. 린스 친구와 샴푸 친구는 곧잘 결혼을 한다. 그들이 아이를 낳으면 올인원이 탄생한다. 린스-샴푸-친구들과 폼클렌징-바디워시-친구들은 구별된다. 잘 만나지도 않는다. 린스와 샴푸는 헤어이고 폼클렌징과 바디워시는 바디이기 때문이다. 또 비누는 기름이고 물은 물이기 때문에 물과 린스-샴푸-폼클렌징-바디워시-친구들은 이어지지 않지만, 흔치 않은 경우에 이미 사랑에 빠진 채로 배수구에 들어온다. 가끔 누군가가 린스-샴푸-폼클렌징-바디워시-통에 물을 담아 흔들어 쓰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정상) 린스들은 물과 사랑에 빠진 (비정상) 린스를 보면 놀라?

 

아니? 종종 그런 일이 있다고 괜찮대.

 

 

다연의 동화는 정말 동화 같아서 나를 현실로 이끈다. 뭐 그런 식의 이야기인데, 이는 내가 아는 법학과가 상식선에서 만들어낸 이야기 중 가장 아름답다. 처음부터 픽션으로 시작하지 않고,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한 이야기는 아름답다. 문학이 아닌 것은 아름답고 문학일 수 있는 것은 아름답다.

 

나는 시를 쓰지 않고 산 날보다 시를 쓰고 살아온 날이 더 길다. 나는 시-인간에 가깝고 다연은 시보다 멋진 것-인간, 시보다 나은 것-인간에 가깝다.

 

다연은 나에게 시를 적어준다. 나는 다연의 전공인 법에 대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다연의 비웃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다연은 나에게 시를 써주고 싶다 말한다. 나의 반경에는 시를 쓰는 친구들이 많고 실제로 써주기도 하지만 나에게 시를 써주고 싶다직접적으로 말한 이는 다연이 처음이다. 나는 그의 비웃음이 두렵고 다연은 나의 비웃음이 두렵지 않다. 적어도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두려움이 작다. 그러므로 다연의 모든 이야기는 아름답다.

 

꿈속에서 이름 모를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깨어나 다연에게 가장 먼저 이른다.

 

네가 아닌 다른 애인을 만난 게 당황스러워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나 멋진 사랑을 했어,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도.를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다연은 내가 이제껏 만나온 연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모양으로, 어떤 마음으로 간절히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지를 모두 안다. 나의 연인이었던 이들 역시 현재 나의 연인인 다연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안다.

 

그러니까 - 겨울이 오면 하고 싶은 것

 

무섭지 않기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며 무서워하기

무섭지 않기

무서워하기

무섭지 않기

무서운 것만큼은 싫다

무서워하기

무섭지 않다고 착각하기. 혼자서도.

 

무언가를 두려워할 때 그 이유에는 필연적으로 소중함이 뒤따른다. 정록은 지금 무서울까? 멸망되었을까? 정록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아주 힘껏 무서워하겠지 나랑은 다른 이유로

나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겨울이 오기 전 완성해버린 것

 

무섭지 않기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며 무서워하기

무섭지 않기

무서워하기

무섭지 않기

무서운 것만큼은 싫다

무서워하기

무섭지 않다고 착각하기. 혼자서도.

 

무섭다고 생각하며 무서워하기. 무서운 것을 투 두 리스트 하기.

 

아직 꿈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없는 이곳에서 내가 여전히 무서움으로써

깨지 않았음에도 누군가에게 이를 것이다. 내가 무서웠어. 여전히 무섭고 앞으로도 무서울 것을 알고 있어. 나는 계속 무서울 것임으로

지금도 무섭다.

 

 

 

 

 

 

<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는 선인장도 안아 주는 '미지'와 고양이처럼 나뒹구는 비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주연'이 함께합니다.

· 미지: poem.aboutyou@gmail.com / 마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 주연: micoks2@naver.com / 답장에 답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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