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만난사이_24년상반기

어느 골목길을 지나

<영원히 머금고 갈 기억>에 대하여, 수요지기 S가 쓰다

2024.05.08 | 조회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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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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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아주 좋은 기회가 내게도 왔다. 오랜 시간 꿈꿔왔던 기회였다. 넉넉한 월급과 모두가 알아주는 회사 타이틀. 이 기회 앞에서 수 많은 날을 눈물로 보냈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골목길’에 위치한 전 회사는 무슨 일을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나서야 “아~ 그렇구나”하고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다. 연혁은 오래 되었지만, 스타트업과 다를 바 없이 삐걱거렸고, 같이 일했던 후배가 “회사가 선배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요?”라는 질문에 “아무 것도 없는 땅 위에 뭐든 내게 하라고 내버려뒀잖아”라는 답이 튀어나오는 곳이었다. 화장실에 부족한 휴지를 직원들이 직접 채우는 것보다 더 창피한 일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일을 애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도 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을 사랑하는 것, 그보다 더 외로운 일이 있을까?

 작은 회사에서도 에이스가 되어보겠다고 패기 넘치던 나는 드디어 5년 만에 듬직한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은 어수선했다. 오빠와 새언니까지 끌어들인 자기소개서와 열심히 잠도 못 자가며 준비한 면접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내가 되겠어?’라는 의문은 함께했다. 그래서일까? 합격 메일을 받은 그 벚꽃이 휘날리는 4월의 오후. 누구보다 놀라고 또 속상했다. 틈만 나면 이런저런 사업을 함께해보자던 팀장님과 팀원에게 전할 나의 비밀.

 나는 애정했다. 절대 회의실을 빠져나갈 수 없는 우리들만의 밀회와 맨땅에 헤딩 후 내 머리에 지는 피딱지들. 아무 거래처도 없는 대구의 이불공장으로 출장을 가자며, 출장 전날 연고도 없는 거래처 열 군데에 전화를 돌리는 수고마저 훗날 즐거웠노라 하는 순간이 되리란 걸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당연히 저명한 정답을 고를 수 밖에 없던 상황을 미워하고 부정했다. 솔직하게 털어놓은 고백에 더 좋은 기회이니, 잡지 않고 응원해 주겠다는 대답. 꼿꼿하던 다리가 풀리며 나는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 곧 사라질 내 자리에서, 항상 휴지를 채워 넣던 화장실에서, 퇴근하는 지하철과 버스에서 형용 불가한 감정에 압도되어 울고 만다. 애정하는 업무와 지구 끝에서도 나를 지지해 줄 팀원들과 생이별을 앞둔 장본인이 나라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이 감정을 서운함이라고 또 섭섭함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대상은 내 자신이 되는 걸까? 세상에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퇴사하는 오늘, 내가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해주는 그런 기적이 또 있기를 바란다. 넉넉한 월급과 대단한 회사 타이틀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함께했던 날들이 우리 모두에게 남아 더 커다란 기회로 피어났음을 감사하며, 오늘 내가 죽는다면, 이 작은 회사와 업무로 내 마음 가득 채우며 살았던 날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겠노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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