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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기술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

칩을 따라잡으면 모델이, 모델을 따라잡으면 규칙이 앞서 있다

2026.07.08 | 조회 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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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lue

앞선 상편에서 우리는 디지털·AI 인프라가 어떻게 새로운 수탈의 통로가 되는지를 진단했습니다. 영토에서 행동 데이터로 원료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같았죠. 이제 질문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인정할 게 있습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종속은 한 겹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체 AI를 갖자" 같은 한 방의 해법으로는 풀리지 않아요. 종속이 어떻게 겹겹이 쌓여 있는지부터 봐야, 진짜 출구가 보입니다.

종속은 한 겹이 아니다

레이어 1. 하드웨어: 칩은 여전히 그들의 것

이 구조를 인식한 국가들이 내놓은 대표적 해법이 소버린 AI(Sovereign AI)입니다. 데이터가 외국 서버를 거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의 AI를 갖자는 거죠. 방향은 맞습니다. 그런데 소버린 AI를 훈련하려면 GPU가 필요한데, 2025년 말 기준 AI용 고성능 GPU 시장의 80% 이상을 엔비디아(NVIDIA)가 쥐고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주권을 확보해도 하드웨어는 그대로 종속인 겁니다. 상편에서 살펴본 쾃의 세 기둥 중 하드웨어 레이어가 고스란히 남죠.

쾃의 세기둥이 궁금하다면?

 

레이어 2. 프론티어: 만들어도 따라잡지 못하면

설령 자체 모델을 만들어도 문제는 남습니다. OpenAI, Google, Anthropic의 최전선 모델과 성능 격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막대한 자원을 쏟고도 결국 다들 프론티어 제품을 쓰게 됩니다. 다른 산업을 키울 수 있었던 자원만 날리고, 경쟁력은 되레 떨어지죠.

한국도 지금 이 시험대 위에 있습니다. 정부는 2025년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이른바 국가대표 AI)를 시작해 5개 정예팀을 뽑고 GPU와 데이터를 지원하고 있는데요, 목표부터가 '글로벌 최고 모델의 95% 성능'입니다. 목표 설정 자체에 프론티어와의 격차가 전제로 깔려 있는 셈이죠. 2026년 1월 1차 평가에서 5팀은 3팀으로 압축됐고, 격차를 좁힐 수 있느냐는 여전히 열린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격차를 뛰어넘었다는 사례조차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2025년 초 중국의 DeepSeek은 '효율 혁신으로 격차를 뛰어넘은 사례'로 거론됐습니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프론티어에 근접했다는 거였죠. 그러나 Microsoft 보안팀은 DeepSeek 관련 계정이 OpenAI API 출력값을 대규모로 추출한 흔적을 포착했고, OpenAI도 증류(distillation)* 정황 증거를 언급했습니다. DeepSeek은 부인했고 결정적 물증이 공개된 것도 아니지만,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독립'처럼 보인 것조차 프론티어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물음표가 남은 겁니다.

*증류(distillation): 큰 모델(교사)에 수많은 질문을 던져 얻은 답변으로 작은 모델(학생)을 학습시키는 기법. 1등의 풀이 과정을 통째로 받아 적어, 그 시행착오의 시간을 건너뛰고 성적을 올리는 방식이라 보면 됩니다. 기법 자체는 업계에서 널리 쓰이지만, 남의 모델 출력을 약관을 어기고 대량 수집하면 문제가 됩니다.

 

레이어 3. 규칙: 규제가 독점을 지킨다

그럼 제도로 막으면 될까요? EU의 AI Act*, 한국의 AI 기본법*이 대표적입니다. 핵심 논리는 위험 관리. AI를 위험 등급으로 나눠 규제하는 방식이죠. 소비자 보호 효과는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아세모글루의 '좋은 제도(inclusive institutions)' 기준에 대보면 한계가 드러납니다. 권력 집중을 막는가? 부의 분배를 규정하는가? 새 진입자를 들이는가? 현행 규제는 셋 중 어느 것도 직접 건드리지 않습니다.

AI Act: EU가 2024년 제정한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규제법. AI를 위험도에 따라 4개 등급(금지·고위험·제한적·최소)으로 나눠 차등 규제합니다.
AI 기본법: 2026년 1월부터 시행된 한국의 AI 법(정식 명칭: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 EU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포괄적 AI 법제로, 사람의 생명·권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고영향 AI'에 안전성 의무를 부과합니다.

오히려 거꾸로일 수 있습니다. 두 갈래로 나눠 보죠. 첫째, 비용의 비대칭입니다. 무거운 규제 요건은 이미 대형 법무팀을 갖춘 OpenAI·Google은 감당하지만, 스타트업과 후발 국가엔 또 하나의 진입장벽이 됩니다. 둘째, 기준을 설계하는 권력입니다. 빅테크는 규제를 없애달라고 로비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감당할 수 있고 남은 넘지 못하는 높이로 문턱을 조각해달라고 로비하죠. 실제로 EU는 2026년 5월, 산업계 부담을 이유로 고위험 AI 의무 적용을 2027년 말로 16개월 연기하는 데에 합의했습니다. 규제의 높이와 시간표가 누구의 사정에 맞춰 조정되는지를 보여준 장면입니다.

이렇게 규제가 의도치 않게, 때로는 의도대로 독점 구조를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것. 경제학이 오래 다뤄온 '규제 포획(regulatory capture)*'의 AI판입니다. Jacobides et al.(2025)이 짚듯, 주요 AI 모델 대부분을 만드는 '공급자(미국·중국)'와 그걸 채택하는 '채택자(한국·EU)'는 규제 논리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는데, 채택자가 공급자의 규제를 그대로 베끼면 효과가 날 리 없습니다.

*규제 포획: 규제기관이 규제 대상 업계의 논리에 사로잡혀, 규제가 오히려 기존 강자를 보호하게 되는 현상. 시험 규칙을 정하는 회의에 전교 1등만 앉아 있는 상황을 떠올리면 됩니다.


하드웨어, 프론티어, 규칙. 종속은 이렇게 세 겹입니다. 그리고 세 해법(자체 칩, 자체 모델, 자체 규제)의 공통된 약점이 보이시나요? 전부 '주어진 궤도 위에서' 한 칸씩 따라잡으려는 시도라는 겁니다. 칩을 따라잡으면 모델이, 모델을 따라잡으면 규칙이 앞서 있죠. 같은 트랙에서 추격하는 한, 선두는 늘 저만치 앞에 있습니다. 중국조차 반도체부터 GPU까지 자체 개발에 국가적 자원을 쏟아붓고 나서야, 성능 격차를 안은 채 내수 시장을 대체하기 시작한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트랙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궤도를 갈아타야 한다

여기서 "그냥 효율적인 걸 사다 쓰면 되지" 하는 반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비교우위 논리죠. 그런데 이 논리는 이미 시험대에 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20세기 내내 남반구는 원자재를, 북반구는 산업재를 수출하는 '효율적' 분업에 충실했고, 그 결과 남반구는 계속 가난했습니다. 경제학은 이를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이라 부릅니다. 비교우위는 한 시점의 스냅샷일 뿐, 거기 안주하면 낮은 부가가치 자리에 영구히 묶인다는 거죠. '데이터는 대고 프론티어 모델은 사 쓰는' 역할에 머무는 순간, 디지털 분업의 주변부가 고착됩니다.

탈출구는 비교우위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갈아타는 데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을 넘은 것도 아날로그 전자에서 이긴 게 아니라 반도체라는 새 궤도에 먼저 올라탔기 때문이죠. 경제추격론의 이근 교수는 후발주자란 기존 궤도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 새 궤도를 선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기존 궤도에서 기본 체력을 길러야 갈아탈 힘도 생깁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정동 교수(서울대 공대, 『축적의 길』)가 말한 '개념설계 역량'에 닿습니다. 남이 그린 설계도를 받아 빠르게 실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당면한 문제의 속성을 새롭게 정의하고 백지 위에 해법의 밑그림을 처음 그려내는 능력. 노하우(Know-how)가 아니라 노와이(Know-why)의 힘입니다. 추격자에서 규칙 설계자로 올라서는 것, 그게 진짜 점프입니다.

AI에서 '새 궤도'는 어디인가

그렇다면 AI에서 그 새 궤도는 무엇일까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모른다'를 무력함으로 읽지는 마세요. 지도가 아직 안 그려졌다는 건, 누구도 규칙을 확정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궤도가 굳어버린 시장에선 후발주자에게 자리가 없지만, 궤도가 흔들리는 지금은 설계의 창이 열려 있다는 의미죠. 어떤 전환이 올지, 어떤 기회의 창이 열릴지는 아직 열린 질문입니다. 그리고 열린 질문이야말로 후발주자에게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Outro. 지도는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1부에서 우리는 기술이 저절로 진보를 담보하지 않음을 봤습니다. 2부에서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와 테크노 봉건주의를 해부했고요. 그리고 3부에서 그 구조가 국경을 넘어 작동하는 방식(상편)과, 거기서 벗어날 길(하편)을 따져봤습니다.

정직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합시다. 소버린 AI는 불완전하고, 현행 규제는 권력 구조를 건드리지 않으며, 점프의 다음 궤도는 아직 안 보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반복해서 보여준 게 하나 있습니다. 기술의 방향은 결정론적이지 않다는 것.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 그 전환점에서 새 규칙을 설계하는 자리에 섰던 사람들이 다음 판을 만들었습니다. 산업혁명 뒤 노동법이 생긴 것도, 인터넷에 GDPR이 입혀진 것도, 구조를 먼저 읽고 규칙 투쟁에 뛰어든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AI 시대에 살아남는다는 건 단지 대체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당연해 보이는 구조를 뜯어보고, 규칙이 다시 쓰이는 그 창 앞에 먼저 서는 것입니다.

작가의 말말말

1️⃣ 소버린 AI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곧 "그냥 빅테크에 맡기자"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소버린 AI로도 실질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는 무엇인지를 고안하는 적극적 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 Michael G. Jacobides, Annabelle Gawer, Nikolaus Lang, David Zuluaga Martínez, "The Political Economy and Geopolitics of AI Regulation," 2025
  • Raúl Prebisch & Hans Singer, terms-of-trade thesis (1949~);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
  • 이정동, 『축적의 길』 (2017)
  • 이근, 『경제추격론의 재창조』 (2014)
  • Daron Acemoglu & Simon Johnson, Power and Progress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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