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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어떻게 '포식자'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가

기술과 권력, 능력주의의 끔찍한 콜라보

2026.06.24 | 조회 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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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lue

테크 '포식자'의 시대

줄리아노 다 엠폴리는 포식자들의 시간을 통해 현대 기술 엘리트들을 '포식자(predators)'로 묘사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산업의 승자가 아니라, 기존 질서와 규칙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자들입니다. 실리콘밸리의 기술 재벌들은 자신들이 '인류의 미래를 만든다'고 선언하지만, 그 미래의 설계도를 그리는 손은 언제나 그들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그들이 말하는 기술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이고, 이를 피할 수 없다는 일종의 무기력을 통해 그들의 선전을 응원하며 주식을 사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빅테크 기업가들이 그리는 미래가 정말 인류가,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일까요? 우리가 그리는 미래는 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인류가 꿈꾸는 미래를 만듭니다"
내가 꿈꾸는 미래는 무엇일까. 사실 내가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빅테크가 말하는 미래가 기대가 아닌 공포로 다가온다는 사실은, 그들이 말하는 '미래'가 내가 원하는 '미래'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응원을 멈추지 못할까요? 포식자가 규칙을 부수는데도 우리가 박수를 보내는 이유, 그 뿌리에는 21세기의 가장 강력한 신앙이 있습니다. 바로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주의 신화: 포식자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먼저 범위를 분명히 하겠습니다. 능력주의 자체의 공과, 가령 교육과 계층 이동을 둘러싼 더 넓은 논쟁은 그 자체로 한 시리즈로 기획이 가능한 주제입니다. 오늘은 그중 한 가지에 집중합니다. 능력주의가 어떻게 테크 포식자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가.

저 또한 열심히 한 사람이 그 결과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열심'과 '노력'만으로 그 결과를 100%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일론 머스크와 샘 알트만 같은 빅테크 기업가들을 바라볼 때, 그들의 능력과 노력을 바탕으로 성공을 거둔 기업가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기행(奇行)에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갑니다. 그들의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기행이 용인되는 것입니다.

능력자에게는 대가마저 면제된다

2022년 말,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한 직후를 떠올려봅시다. 그는 440억 달러에 회사를 사들인 뒤 전체 직원의 절반가량을 단번에 해고했고, 이사회를 해산했으며, 인증 배지를 월 구독 상품으로 바꾸고 차단됐던 계정들을 줄줄이 복원했습니다. 한 기업의 규칙을 한 사람이 며칠 만에 갈아엎은 셈입니다.

물론 비난 여론은 거셌습니다. 광고주들이 줄줄이 이탈했고, "대체 왜 저러느냐"는 조롱과 우려가 쏟아졌으며, 해고 방식을 두고 소송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를 멈춰 세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어떤 비판도 그의 권한을 실제로 제한하지 못했고, 그는 별다른 대가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으며, 비난은 머지않아 '비전을 못 알아보는 자들의 소음'으로 치부됐습니다. 능력이 평범하다 여겨지는 경영자가 같은 일을 했다면 진작 쫓겨났을 행동이, 머스크였기에 '천재의 과감함'으로 버텨낸 것입니다.

능력주의의 작동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두가 박수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센 비난 속에서도 능력자의 규칙 파괴가 아무 제약 없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 능력이 출중하다고 인정받은 자에게는 규칙을 부술 권리뿐 아니라, 그 대가를 면제받을 권리까지 따라붙습니다.

스타링크는 정말 '아무도 못 본 미래'였을까

머스크를 향한 능력주의의 헌사는 규칙 파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위성 인터넷 사업 '스타링크'는 흔히 '남들은 떠올리지도, 해내지도 못한 일을 머스크가 비로소 이뤄낸 작품'으로 칭송됩니다. 그런데 위성 군집으로 지상 인프라를 건너뛰고 지구 전체를 연결한다는 발상은, 사실 머스크가 처음 떠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1990년대에 모토로라가 주도한 '이리듐(Iridium)'이 저궤도 위성 77기를 띄워 전 지구 통신을 실현하려 했습니다. 음성 통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지상망을 건너뛰는 위성 군집이라는 핵심 구상은 같았습니다. 한국에서도 SK텔레콤(당시 한국이동통신)이 이 컨소시엄에 소수 지분으로 참여해 한반도 게이트웨이를 맡았고, 1990년대 후반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글로벌' 비전이었지만, 정작 각 나라에서 굴러가려면 이렇게 현지 사업자와의 합작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리듐은 1년도 안 돼 무너졌습니다. 단말기는 수천 달러대였고 통화료도 분당 수 달러에 달했으며, 그러면서도 실내나 도심에서는 잘 터지지도 않는 불편함 앞에서 사람들은 "이걸 굳이 왜 써?"라고 물었습니다. 가입자는 끝내 기대에 한참 못 미쳤고,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은 사업은 1999년 파산했습니다.

똑같은 비전이 20여 년 뒤 스타링크에서 성공한 것을, 머스크의 실행력 덕분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가 해냈습니다. 재사용 로켓을 활용해 가격을 대폭 인하하여 상업성을 마련했습니다. 이 과정을 살펴본다면, 재사용 로켓을 현실로 만든 것은 분명한 성취입니다. 그러나 그 재사용 로켓조차 실시간 착륙 제어를 돌릴 연산력, 값싸진 센서, 발전한 소재공학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습니다. 20세기 말에 이리듐이 무너진 것은 누군가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시대가 아직 그 기술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발상도 시대와 비용 구조가 받쳐주지 않으면 파산하고, 받쳐주면 혁명이 됩니다. 능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물론 같은 시대에 블루오리진 같은 경쟁자도 있었고, 끝내 스타링크가 앞선 데는 머스크의 실행력이 작용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논점을 확인해 줍니다. 똑같은 시대의 토대가 깔린 뒤에야 실행력이 결과를 가를 수 있었던 것이지, 그 토대가 없던 시절에는 누구의 실행력으로도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런데 능력주의는 이 '때'와 '먼저 실패한 선행자들'을 지우고, 결과만을 한 사람의 선견지명으로 기록합니다.

능력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이들의 '능력'은 과대평가받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기존 질서는 자신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조율이 아닌 파괴를 선택하고, 우리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가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그 무비판적 수용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능력 뒤에 가려진 두 가지: 출발선과 공적 기반

능력주의는 타고난 특권을 바탕으로 성취된 결과마저도 노력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됩니다. 빅테크 창업자의 막대한 부는 천재성과 노력의 결과물로 묘사되고, 그들이 이를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공에는 노력과 능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층의 조건이 깔려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개인에게 주어진 출발선입니다. 앞서 규칙을 부순 머스크를 다시 떠올려봅시다. 그는 남아공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단순히 집이 부유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남아공에서 백인 남성으로 자랐고, 어머니가 캐나다인이었던 덕에 캐나다 국적을 거쳐 북미로 건너갈 수 있는 통로를 가졌으며, 인터넷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 그 길목에 설 수 있는 세대였습니다.

경제적 부, 태어난 나라와 환경, 인종과 성별, 심지어 '언제 태어났는가'라는 시대적 운까지. 이 모든 조건은 본인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다른 출발선에 서 있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이 출발선의 차이를 지우고, 결승선의 결과만을 '순수한 능력의 산물'로 읽습니다.

둘째, 사회가 먼저 깔아둔 공적 기반입니다. 개인의 출발선을 걷어내도, 성공의 토대에는 사회 전체가 미리 감수한 위험이 남아 있습니다.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기업가형 국가에서 이를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혁신의 상징으로 여기는 기술 상당수, 가령 인터넷과 GPS는 물론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과 음성비서의 기반 기술까지, 그 씨앗은 정부의 공적 자금이 뿌린 것이었습니다. 실패하면 세금이 사라지는 초기 단계의 위험을 사회가 떠안았고, 성공이 확인된 뒤에야 기업가가 그 열매를 따 갔습니다. 만약 이 공적 기반이 없었다면 오늘의 '혁신'은 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능력주의는 사회가 먼저 낸 몫을 조용히 지우고, 수확만을 한 개인의 천재성으로 기록합니다.

머스크 본인의 사례로 좁혀봐도 다르지 않습니다. 스페이스X의 로켓은 흔히 머스크가 홀로 일군 성취로 그려지지만, 그 토대를 먼저 깔아둔 것은 미국 정부 기관인 NASA였습니다. NASA는 회사가 자리 잡기도 전에 로켓과 우주선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댔고, 파산 직전이던 스페이스X에 거액의 화물 수송 계약을 맡겨 사실상 회사를 살려냈습니다. 또한, NASA가 우주왕복선을 퇴역시키며 그 빈자리를 민간에 처음 열어주며 스페이스X가 들어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심지어 우주선이 대기권에 재진입할 때 타버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핵심 부품조차, NASA 연구소가 수십 년 전 개발해둔 소재를 넘겨받아 개량한 것이었습니다. 머스크가 그 기술을 더 싸고 빠르게 다듬은 것은 분명한 실력이지만, 출발점에는 정부가 오래 쌓아온 연구와 위험 감수가 있었습니다.

테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로 민간 투자가 완전히 얼어붙었을 때, 테슬라를 버티게 한 것은 미국 정부의 저리 융자였습니다. 게다가 초기 테슬라가 흑자를 낸 비결은 사실 자동차를 잘 팔아서가 아니라, 배출가스 규제가 만들어낸 '탄소 배출권'을 규제를 못 맞춘 다른 자동차 회사들에 팔아서였습니다. 사회가 정한 '규칙'이 테슬라의 초기 살림을 떠받친 셈이죠. 2015년 LA타임스는 머스크의 세 회사가 받은 정부 지원을 모두 합치면 약 49억 달러에 이른다고 추산했습니다.

결국 빅테크 창업자의 성공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 주어진 출발선, 그리고 공공의 기여가 모두 종합된 결과입니다. 능력주의의 진짜 문제는 이 셋 중 뒤의 둘을 지워버리고, 전부를 첫 번째 항목 하나로 환원한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빅테크가 주도하는 기술 발전 방향에 반기를 드는 것은 '능력이 부족한 구시대 사람들의 불평'으로 축소됩니다. 이를 통해 기술 발전 방향에 대한 건설적 논의가 불가능해지고, '포식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이 설정됩니다.

아세모글루와 존슨이 권력과 진보에서 지적하듯, 빅테크는 단순히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기술 발전의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며, 공론장에서 지배적 위치에 서도록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입니다. 이 모든 것의 기반에는 능력주의가 있습니다.

테크노 봉건주의: 아래에서 작동하는 정당화

지금까지는 능력주의가 위에서 어떻게 포식자에게 면죄부를 주는지를 봤습니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의 진짜 무서운 힘은 아래에서 작동할 때 드러납니다. 지배받는 사람들이 그 지배를 스스로 정당화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 메커니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최근 학계에서 유력하게 거론되는 분석틀, '테크노 봉건주의(Technofeudalism)'입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가 주창한 이 개념은, 디지털 플랫폼을 소유한 기업들이 '클라우드 영주(cloud lords)'로서 플랫폼을 사용하는 이들로부터 '클라우드 임대료(cloud rent)'를 징수하는 구조를 포착합니다. 이 프레임에서 소셜미디어 이용자, 앱 개발자, 앱스토어 판매자,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모두 새로운 형태의 봉건적 소작인입니다.

봉건제에서는 농노가 자신의 낮은 지위를 '태어날 때의 신분' 때문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른바 외면화(externalization, 원인을 내 바깥으로 돌리기)입니다. 반면 테크노 봉건주의에서는 플랫폼에서의 낮은 지위를 "내 콘텐츠가 좋지 않아서", "내가 알고리즘을 이해 못해서", "내 네트워크가 약해서"라는 식으로, 즉 내 잘못으로 내면화(internalization, 원인을 내 안으로 돌리기)합니다. 바로 여기서 능력주의와 테크노 봉건주의는 한 동전의 양면이 됩니다. 능력주의가 위에서 포식자의 성공을 '능력의 정당한 보상'으로 번역한다면, 테크노 봉건주의는 아래에서 개인의 실패를 '능력의 정당한 대가'로 번역합니다. 착취는 구조 안에 있지만, 죄책감은 개인의 몫이 됩니다.

아세모글루의 연구가 보여주듯, AI 기술 개발이 자동화에 편향되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 필연성이 아니라 보상이 엉뚱한 방향을 향하도록 짜인 구조, 즉 잘못 정렬된 인센티브의 산물입니다. 지배적인 AI 기업들은 자동화 소프트웨어를 기업 고객에게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도록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능력주의가 이 구조를 정당화하는 한, 그 어떤 개별적 노력도 구조 자체를 바꾸지 못합니다.

Outro

저번주에는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 저절로 인류 문명의 진보로 이어지지 않음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산업혁명의 성냥팔이 소녀들, 일제강점기의 수탈 철도. 이 모든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기술의 방향을 설정한 소수가, 그 기술이 만들어낸 부를 독점했다는 것입니다.

이번주는 그 소수가 어떻게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살펴봤습니다. 능력주의는 위에서 착취를 재능의 당연한 보상으로 번역하고, 테크노 봉건주의는 아래에서 구조적 착취를 개인의 실패로 내면화시킵니다. 포식자들은 이 두 겹의 정당화 덕분에 규칙을 파괴하고 새 질서를 세우는 동안, 저항의 에너지는 분산되고 내부를 향합니다.

그러니 다음에 누군가의 성공이 '순수한 능력의 결과'처럼 보일 때, 이 등식 하나만 기억해두면 좋겠습니다.

성공 = 능력 × 출발선 × 타이밍 × 공적 기반 

이 중 어느 한 항이라도 0이면, 전체가 0이 됩니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대가 받쳐주지 않으면, 설 출발선이 막혀 있으면, 사회가 깔아둔 기반이 없으면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덧셈이 아니라 곱셈인 이유입니다. 능력주의가 부리는 마술은, 성공의 크기는 그대로 둔 채 이 곱셈에서 뒤의 세 항을 슬그머니 '1'로 바꿔치기하는 것입니다. 출발선도 1, 타이밍도 1, 공적 기반도 1로 놓으면, 등식에는 능력 하나만 남습니다. 성공 = 능력. 분명히 출발선과 타이밍과 공적 기반이 함께 실어 나른 결과인데도, 그 몫까지 전부 능력 한 사람의 공으로 환산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포식자들의 시간'은 그저 실리콘밸리 안에서만의 이야기일까요? 다음주에는 이 구조가 국경을 넘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른바 '테크 신식민주의'의 실체를 들여다봅니다. 글로벌 표준이라는 이름 아래, 데이터를 둘러싼 21세기판 수탈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콰메 은크루마가 1965년에 남긴 신식민주의 분석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60년 전 아프리카 지도자의 경고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스마트폰 속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말말

1️⃣ 능력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노력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은 분명 동기부여의 원천이 됩니다. 문제는 그것이 '극단화'될 때입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의 역설을 지적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이 순전히 자신의 것이라 믿을수록, 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 능력을 잃어갑니다. 테크 포식자들이 규칙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능력자의 혁신'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능력 없는 자의 불평'이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2️⃣ 주식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빅테크 주식을 사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가 상승에 환호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구조적 착취에 눈을 감는 것은, 자신이 소작인임을 알면서도 지주의 땅값 상승을 응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도 그 주식을 당장 팔지는 않겠습니다만, 적어도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면서 보유하고 싶습니다.

3️⃣ 오늘은 능력주의가 테크 포식자를 정당화하는 방식만 다뤘습니다. 하지만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교육, 계층 이동, 일상의 자기 평가까지 훨씬 깊게 뻗어 있습니다. 이 거대한 주제는 언젠가 따로 한 편으로 제대로 기획해 발행해보려 합니다. 

 

참고문헌

Acemoglu, D., & Johnson, S. (2023). 권력과 진보(Power and Progress: Our Thousand-Year Struggle Over Technology and Prosperity). 생각의 힘.

Acemoglu, D., & Johnson, S. (2024). Learning from Ricardo and Thompson: Machinery and Labor in the Early Industrial Revolution, and in the Age of AI. Social Science Research Network.

da Empoli, G. (2026). 포식자들의 시간(L'Heure des prédateurs)(이세진 역). 을유문화사.

Mazzucato, M. (2015). 기업가형 국가(The Entrepreneurial State: Debunking Public vs. Private Sector Myths)(김광래 역). 매경출판.

Varoufakis, Y. (2024). 테크노퓨달리즘(Technofeudalism: What Killed Capitalism)(노정태 역). 21세기북스.

Sandel, M. J. (2020).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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