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점점 더 서로를 미워하게 됐는가

우리가 몰랐던 파시즘의 진짜 원인

2026.06.10 | 조회 10 |
0
|
from.
Mollue

Intro. 선한 담론의 역설

홀로코스트 이후 인류가 만든 가장 선한 담론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특별하다." 그런데 만약 바로 이 담론이 21세기 파시즘의 연료 중 하나가 됐다면?

20세기 초, 독일에서 나치즘은 어떻게 주류가 되었을까요? 지금까지 학계의 주류 의견은 대체로 이랬습니다. 유럽 전반에 깔린 반유대주의와, 1차 세계대전 배상금으로 인한 경제적 무력감이 결합하여 히틀러라는 선동가에게 대중이 손을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2020년대에 다시 파시즘 담론이 부상하는 걸까요?

분명 차별하면 안 된다고 교육받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헌법 정신이 뿌리 내린 국가들,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먼저 파시즘과 유사한 현상들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만약 나치즘이 뿌리 내린 이유가 단순히 배고픔과 무력감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있다면? 21세기 파시즘의 귀환 역시 그 '다른 무언가'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찾았고, 그 해법의 실마리를 쇼펜하우어의 사유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파시즘이 지금 진짜 있나요?

파시즘(Facism)의 정의부터 다시 짚겠습니다. 파시즘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국가와 민족을 개인보다 절대적 우위에 두는 극단적 전체주의·권위주의 이념입니다. 대표적 특징으로는 ① 극단적 민족주의, ② 강력한 권위주의와 독재, ③ 폭력과 군국주의가 있습니다.

현대 선진국들에 독재자가 없고 군국주의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파시즘이 없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로 생각해봅시다. 카리스마 있는 강한 지도자들이 각광받고 있지 않나요? 국가 생존권을 이유로 폭력과 전쟁이 일상화되고 있지 않나요?

국가 단위가 아닌 '집단' 단위로 들어가면 파시즘적 특징이 더 자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집단의 가치가 최고이고, 타 집단의 가치는 평가절하하며, 내집단의 이익을 위해 외집단에 대한 폭력과 갈등이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극단적 부족주의와 폭력이 일상화 되고 있는 거죠. 이게 확장될 때, 국가 단위의 파시즘이 나타나게 된다는 점에서 파시즘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는 것이 자명해보입니다.

여기에 알고리즘이 기름을 붓습니다. 내집단의 의견을 강화하는 콘텐츠만 노출하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은 내집단에 대한 동질감을 극대화하고, 외집단에 대한 이질감과 타자화를 가속합니다. AI의 발달은 이 과정을 더욱 정밀하게, 더욱 개인화하여 작동시킬 것입니다. 나치즘보다 심한 수준의 분열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지고 있는 지금, 파시즘에 대한 재고찰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집단적 파시즘의 정서적 연료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1. 우리가 알던 파시즘의 공식

결핍과 무력한 대중

기존 담론에서 파시즘의 토양은 '결핍'에서 시작합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천문학적 배상금과 1929년 대공황이 겹치며 독일 중산층이 붕괴했습니다. 직장을 잃은 대중은 경제적 무력감을 느꼈고, 이는 삶의 통제권 상실이라는 심리적 무력감으로 전이됩니다. 개개인이 고립되고, 사회 전체가 집단적 불안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희생양 찾기와 타자화

결핍이 만연해지면 필연적으로 '외부의 적'이 필요해집니다. 고통의 원인을 자신이나 구조에서 찾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바깥에서 찾는 것은 달콤합니다. 외부의 적은 반드시 '나'와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결백이 증명될 뿐만 아니라 안전하니까요. 이 메커니즘을 파시즘은 정교하게 활용합니다. 나치 독일은 독일 국민의 배고픔과 굴욕을 '유대인 자본가의 착취' 탓으로 돌리며 유대인을 철저히 타자화했고, 이는 집단적 분노의 방향을 고정시켰습니다.

선동가의 등장, 폭력의 제도화

조직화된 분노는 홀로 폭발하지 않습니다. 카리스마 있는 선동가가 등장하여 복잡한 사회문제를 단순하고 자극적인 슬로건으로 압축합니다. 사유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저 반복되는 적의(敵意)에 몸을 맡기면 됩니다. 이렇게 대중의 분노는 합법적 폭력의 옷을 입고 제도화됩니다.

그렇다면 처방전은?

→ 경제적 결핍을 해소하라

→ 선동가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라

→ 편견을 교육으로 극복하라

오랫동안 학계와 정책 입안자들이 내놓은 처방전은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복지 확충, 민주주의 교육 강화, 혐오 표현 규제 모두 각각의 학술적 기반이 있는 처방들입니다. 분명 타당한 처방들인데, 왜 효과가 충분하지 않은 걸까요?


2. 왜 처방전이 효력을 잃었는가

21세기는 역사상 전례 없는 풍요의 시대인데..

처방전대로라면, 경제가 성장하고 복지가 강화될수록 파시즘의 토양은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국가들에서 극우 정당들이 선거를 통해 원내 주류로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적 결핍과 가장 거리가 먼 나라들에서 포퓰리즘과 집단 혐오가 가장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원인 진단 자체가 틀린 건 아닐까요?

제도는 '묵시적 합의' 위에서만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처방전들을 집행하는 '제도'는 왜 무너졌을까요?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거, 의회, 사법부와 같은 민주주의 제도는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도를 실제로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성문법이 아니라, 제도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묵시적 합의, 즉 규범과 관습입니다. 법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모두가 지켜온 '당연한 것들'이 제도의 진짜 뼈대입니다.

하버드 정치학자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가 무너지는가》에서 이 묵시적 합의가 무너지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분석합니다. 민주주의는 외부의 적에 의해 쿠데타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서서히 잠식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지목한 민주주의의 두 가지 보이지 않는 뼈대가 있습니다.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 정치적 경쟁자도 권력을 가질 동등한 자격이 있다는 암묵적 합의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정치적 경쟁자는 '패배시켜야 할 상대'가 아닌 '제거해야 할 적'이 됩니다. 선거는 그 순간 생존을 건 전쟁이 됩니다.

규범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 권력을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까지 휘두르지 않는 자제력입니다. 법의 문자는 지키되 정신을 위반하는 '합법적 위법'이 민주주의를 안에서부터 갉아먹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게이트키핑(Gatekeeping)의 실패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정당은 극단주의자가 권력의 문턱을 넘지 못하도록 막는 필터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소셜미디어의 등장이 이 필터를 무력화했습니다. 이제 극단적 포퓰리스트는 정당의 검증 없이 직접 대중에게 자신의 언어를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방전이 옳더라도, 그것을 작동시키는 제도적 전제 조건인 상호 관용과 규범적 자제라는 묵시적 합의가 붕괴하면 처방 자체가 무효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제도 실패는 파시즘의 확산 경로를 설명하지만, 파시즘의 수요 자체가 왜 사라지지 않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경제학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의 처방전은 대부분 공급 차단에 집중했습니다. 선동가를 막고, 혐오 표현을 규제하고, 극단주의 정당을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수요가 살아있는 한, 공급은 언제든 다시 생깁니다. 기존 공급자를 막으면 새로운 공급자가 등장할 뿐입니다. 미국 금주법이 술을 없애지 못하고 오히려 밀주 산업을 키웠듯, 파시즘에 대한 수요인 그 분노의 원료를 없애지 못하는 한 처방전은 구멍 난 댐에 손가락을 꽂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수요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21세기 현대는 '배고픔' 보다 '풍요'가 어울리는 시대인데도, 파시즘 수요가 있다는 건 기존의 원인 진단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3. 아렌트에서 찾은 진짜 원인

디즈레일리라는 이상한 인물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19세기 영국 총리를 지낸 유대인 혈통의 정치가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를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조명합니다.

당시 유럽 사회에는 유대인이 막후에서 세계 경제와 정치를 조종한다는 '유대인 음모론'이 팽배했습니다. 보통의 유대인이라면 이 낙인에 억울해하거나 방어적으로 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디즈레일리는 완전히 다른 전략을 취했습니다. 아렌트가 포착한 디즈레일리의 전략적 논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적이 씌운 낙인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우리 유대인은 세계를 막후에서 지배할 만큼 특별하고 우월한 혈통이라고 선언하는 것.

아렌트는 이 지점을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주류 사회가 씌운 낙인에 맞서기 위해 '가짜 특별함의 신화(쇼비니즘)'를 내면화하는 기제,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정서적 전초기지였습니다.

집단적 쇼비니즘, 현대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되다

디즈레일리가 개인 차원에서 구사했던 이 기묘한 방어기제가, 21세기 현재 '집단적 나르시시즘(Collective Narcissism)'으로 광범위하게 복제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아그니에슈카 골렉 데 자발라(Agnieszka Golec de Zavala)는 2009년 집단적 나르시시즘 척도(Collective Narcissism Scale)를 개발하고, 이것이 외집단 혐오와 극우 포퓰리즘과 강력한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실증했습니다. 낙인에 맞서기 위해 집단의 특별함을 과장하는 심리가, 집단 간 혐오와 배타성을 체계적으로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팀의 인턴이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태도가 있어 팀장이 그에게 'MZ스럽다'고 했습니다. 분명 부정적 의미로 나타난 발언이지만, 인턴은 그 프레임을 역이용하여 '그래 맞아. 나는 MZ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라며 긍정적인 정체성으로 교체합니다. 이로인해 팀장은 'MZ' 집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화되고, 인턴은 팀장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 집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고착화 됩니다. 이렇게, 인턴과 팀장의 관계는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악화됩니다. 이것이 디즈레일리의 전략과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이렇게 행동하면 주류 집단의 반발을 사고, 그 반발이 다시 해당 집단의 쇼비니즘을 강화합니다.

피드백 루프 속에서 집단적 쇼비니즘은 점점 더 단단해집니다. 한 집단이 "우리는 특별하다"고 선언할수록, 인접 집단은 위협을 느끼고 자신들의 특별함을 더 크게 선언합니다. 사회 전체가 서로의 쇼비니즘을 강화하는 '군비경쟁'에 돌입합니다.


4. 파시즘 심층 분석: 인권담론이 파시즘에 기여했다고?

선한 담론의 기형적 변이

그렇다면 이 패턴이 왜 지금, 이렇게 광범위하게 퍼진 걸까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반성하며, 인류는 "인간 개개인은 누구나 존엄하고 특별하다"는 인권 담론을 사회 전반에 심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필요한 치료제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광장의 동등한 주체로 존중하기 위한 가장 선한 언어였습니다.

하지만 이 담론이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시스템과 결합하면서 치명적인 변이가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인권 담론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모두가 존엄하다"는 공존의 언어가, 개인을 끊임없이 타인과 경쟁시키는 시스템 속에서 뒤틀려 변질된 방식입니다.

→ "우리 모두는 존엄하다" (공존의 언어)

→ "나만 특별해야 한다" (독점의 언어)

이 기형적 변이가 파시즘의 연료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21세기에만 나타난 현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20세기 파시즘으로 돌아가 봐도, 나치즘이 반유대주의를 통해 작동한 방식을 떠올려보면 비슷한 구조가 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힘든데, 저 유대인들은 왜 저렇게 잘 사는가."

절대적 결핍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파시즘의 분노로 전환된 것은 타 집단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결핍이 매개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물론 이러한 주장은 학계에서도 낯설기 때문에 아직 실증한 연구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절대적 결핍을 통제한 상태에서 상대적 결핍 변수를 분리해 분석한다면, 우리가 알던 파시즘의 공식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례를 떠올려보면 이 가설이 더 선명해집니다. 만약 절대적 결핍이 파시즘의 핵심 원인이라면, 오늘날 세계 최빈국들에서 파시즘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를 떠올려 보세요. 대량 실직과 급격한 생활 수준 하락이 닥쳤지만, 사회는 분열 대신 금 모으기 운동이라는 연대로 응답했습니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는 있었지만, 그것은 대량 해고에 맞선 정당한 저항이었지 타 집단을 향한 쇼비니즘이 아니었습니다. 절대적 결핍이 파시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는 마땅히 이보다 나아야 한다'는 자아상과 현실의 괴리가 핵심 방아쇠일 수 있습니다.

처방도 달라져야 합니다. 인권 교육을 줄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인권 교육이 한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쟁 시스템이 어떻게 공존의 언어를 독점의 언어로 뒤틀어버리는지, 그 맥락을 함께 다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나만 특별해": 과보호 세대의 탄생

저출산 기조와 맞물려, 오늘날의 아이들은 가정 안에서 오직 자신만을 위한 과보호와 찬사 속에서 자랍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렉 루키아노프는 《나쁜 교육(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2018)에서 이 현상을 정밀하게 추적했습니다.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조건 특별하며, 네 마음이 곧 정의"라는 메시지를 흡수하며 성인이 된 세대는, 거대한 특권의식과 타인에 대한 암묵적 지배욕을 품은 채 사회로 나옵니다.

나르시시즘적 상처: 진짜 비극의 시작

진짜 비극은 '나만 특별한' 사람들이 냉혹한 현실의 링 위에 올라섰을 때 시작됩니다. 대입 실패, 취업난, 주거 불안, 커리어의 벽. 입으로는 '특별하다'고 배웠지만, 처지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부품에 불과하다는 잔인한 현실이 덮쳐옵니다.

이때, 비대한 자아상과 초라한 현실 사이에서 나르시시즘적 상처(Narcissistic Injury)가 발생합니다.

기존 파시즘 담론은 배가 고파서(환경적 결핍) 분노한 대중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배고픔이 원인이 아닙니다. '특별한 내가 대접받지 못한다는 정서적 굴욕감(=상대적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분노에서 출발합니다. 이걸 바탕으로 다시 20세기의 파시즘을 살펴본다면 설명이 가능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존의 처방전이 무효한 이유입니다. 경제적 복지를 강화해도, 정서적 굴욕감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파편화된 파시즘의 완성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아렌트가 공통감각(common sense)이라 불렀던 타인의 처지를 상상하는 능력을 완전히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로 달려가 같은 상처를 입은 부족을 찾습니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저 반대편 젠더/세대/인종/외국인(이)가 내 몫을 가져가서 그래."

"우리가 불행한 건 저 세대/소득수준/반대 정치집단(이)가 적폐라서 그래."

그렇게 젠더, 세대, 당파라는 작은 집단 단위의 쇼비니즘이 완성됩니다. 알고리즘은 이들의 확증 편향에 정밀하게 기름을 부으며 외집단에 대한 타자화와 혐오를 극대화합니다.

파시즘의 수요는 상대적 결핍을 느낀 사람의 분노에서 나타납니다. 이 분노에 불을 지필 '선동가'가 나타나면 언제든 파시즘이 공급될 수 있습니다.


Outro.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해법: 마야의 베일을 걷어내라

의지(Wille)라는 이름의 환상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의 모든 욕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동력을 지목합니다. 맹목적인 삶의 의지(Wille zum Leben). 이 의지는 목적지가 없습니다.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나는 특별해야 한다'는 요구가 바로 이 맹목적 의지의 산물입니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나르시시즘적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가 집단적 분노로 폭발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시선에서 보면, 파시즘의 뿌리는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아니라 욕망 자체의 구조적 불충족성에 있습니다.

개체화의 원리: 분리라는 근원적 착각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마야의 베일(Veil of Māyā)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타인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이고 특별한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것이 '개체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가 만들어낸 근원적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가 서로 완전히 분리된 섬이라는 이 착각이야말로 인간 이기주의의 뿌리입니다.

마야의 베일은 내가 너와 다르다는 환상을 심습니다. 이 환상이 강해질수록 타인의 고통은 '남의 일'이 되고, 이기주의는 당연한 것이 됩니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은 이 베일이 가장 두꺼워진 상태입니다. 내 집단이 최고이고, 외집단은 제거해야 할 적이 되는 것.

동정심(Mitleid): 베일이 걷히는 순간

반대로, 마야의 베일이 걷히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동정심(Mitleid)이라고 부릅니다. 직역하면 '함께 고통받음'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내 고통과 다르지 않음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 '우리 집단 vs. 우리의 적(=그들)'이라는 구분선이 사라지고 이기주의와 집단적 쇼비니즘의 뿌리가 뽑힙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권에서 쇼펜하우어가 개체화의 원리를 꿰뚫어본 사람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 사이에 본질적 차이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한 공통감각(common sense)의 철학적 토대입니다. 아렌트가 전체주의는 공통감각, 즉 타인의 처지를 상상하는 능력을 말살함으로써 작동한다고 진단했을 때, 쇼펜하우어는 그 공통감각의 회복이 어디서 오는지를 이미 답하고 있었습니다.

아렌트: 전체주의는 공통감각을 말살함으로써 작동한다

쇼펜하우어: 마야의 베일을 걷어낼 때 동정심이 회복되고, 공통감각은 살아난다

"결코 나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쇼펜하우어는 《결코 나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으리라》에서 실천적 삶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 핵심은 단순하지만 강력합니다.

"행복이란 덜 불행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은, 행복을 '특별한 나'에 대한 외부의 인정에서 찾는 한 인간은 영원히 맹목적 의지의 노예로 남는다는 진실입니다. 행복의 조건을 낮추는 것, 자신의 평범함을 직시하는 용기, 운명이 나에게 부여한 조건을 원망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나르시시즘적 상처가 발생하는 회로 자체를 끊는 방법입니다.

중요한 구별: 정당한 분노와 나르시시즘적 분노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구별이 있습니다. 이 글이 말하는 나르시시즘적 상처는 실제 차별이나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정당한 분노와 다릅니다. 불평등한 구조에 맞서는 분노는 정당하고, 그것을 나르시시즘으로 치부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오늘날에는 '차별 받는다'는 언어가 구조적 불평등이 아닌, 단순히 자아상이 위협받는 상황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구분의 기준은 "나의 분노가 타인의 권리 침해에 대한 반응인가, 아니면 나의 자아상/특권이 위협받는 것에 대한 반응인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는 저항이고, 후자가 파시즘의 연료입니다.

개인적 깨달음이 사회적 방어막이 된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해법이 제도와 정책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은 그 제도적 설계의 영역까지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어떤 제도도 개인의 내면에서 분노의 수요가 끝없이 생산되는 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외집단을 향한 집단적 분노는 그 분노에 기름을 붓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분노의 수요를 만드는 나르시시즘적 상처가 진짜 문제입니다. 알고리즘은 이미 존재하는 욕망을 증폭할 뿐, 욕망을 처음 만들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21세기 파시즘에 대한 진정한 해독제는 이중적입니다.

→ 제도적 차원: 상호 관용 규범 재건을 통한 제도의 정상화

→ 내면적 차원: 마야의 베일을 걷어내고 평범함을 수용하는 용기,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동정심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 인간의 내면에 있음을 포착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그 내면을 바꾸는 철학을 남겼습니다.

실천 공식:
타인이 틀렸다고 느낄 때, 이 질문을 한번 내부에 던져보면 어떨까요?
"내가 특별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지금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 질문 하나가 마야의 베일에 첫 번째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특별한 나'라는 환상을 내려놓을 때, 파시즘이 피어오를 토양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것이 쇼펜하우어가 이미 200년 전에 마련한, 21세기를 위한 답이 아닐까요?


작가의 말

몇몇 분들은 한국의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정규직·비정규직 문제, 과도한 교육열, 능력주의 심화 등을 지적하며, 외환위기가 결국 오늘날 사회적 갈등의 시초였다고 말합니다. 이 아티클에서 해당 내용을 분리해서 본 이유는, 그것은 외환위기로 인한 상처가 남긴 흉터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이식으로 인해 정규직·비정규직 문제가 심화되었고, 경제 불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고가 확산되면서 교육열과 능력주의 문제가 뒤따랐다는 것입니다. 본 글은 '절대적 결핍 자체가 파시즘의 원인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는데,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문제들은 이 논지와 맞지 않아 별도로 다루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결코 나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어떻게 민주주의가 무너지는가》

아그니에슈카 골렉 데 자발라 외, "Collective narcissism and its social consequence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2009)

조너선 하이트·그렉 루키아노프 《나쁜 교육(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Mollue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6 Mollue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전달합니다.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8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