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만 완벽하게 보장받는 재산권은, 이 이론에서 포용적 제도가 아니라 착취적 제도다
Intro. 죄수를 보내기에도 위험한 땅
18세기 말, 영국 하원의 한 위원회가 죄수들을 보낼 땅을 고르고 있었다. 감옥은 넘쳤고, 아메리카 식민지는 독립해 버려 더는 사람을 부릴 수 없었다. 후보지 가운데 하나가 감비아강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르망(Lemane)섬이었다. 위원회는 그곳을 반려했다. 반려 사유를 뒤에 나올 논문은 이렇게 전한다.
죄수들에게조차 사망률이 너무 높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문장을 한 번 더 읽어보자. 본국에서 치워버리려는 사람들이다. 형기를 채우러 배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고, 살아 돌아올 것을 전제하지 않은 인력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내기에도 그 땅은 위험하다고 판단됐다. 위원회는 아프리카의 다른 후보지를 검토했고 그마저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죄수들이 실려 간 곳은 결국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숫자를 보면 과장이 아니었다. 시에라리온에 세워진 정착지에서는 유럽인의 46퍼센트가 첫 해에 죽었다. 불라마에서는 1년 사이 61퍼센트가 죽었다. 감비아에서 나이저강까지 육로로 이동한 한 탐험대는 여섯 달 만에 유럽인의 87퍼센트를 잃었고, 탐험을 마치기 전에 나머지도 모두 죽었다. 말라리아와 황열병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두어야 한다. 이 병들은 현지 성인들에게는 대체로 치명적이지 않았다. 어릴 때 앓고 살아남아 면역을 가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죽은 것은 면역이 없는 외지인이었다. 뒤에 나올 이야기에서 이 구분이 계속 중요하게 쓰인다.
그리고 이 사망률 표가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의 근거가 됐다.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 사회 제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이 국가의 번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힌 공로였다.
수상자들의 결론은 대체로 이렇게 요약되어 유통된다. 국가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지리도 자원도 문화도 아니고 제도다. 그리고 그 제도의 핵심은 재산권이다. 여기까지는 정확한 요약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대학원 수업에서 한 교수가 열을 올린 적이 있다. 자신은 친시장주의자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친시장이라고 하면 규제 철폐와 법인세 감면으로, 끝내는 재벌을 옹호하는 말로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찬성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는 토대이고 그것 역시 친시장의 범위라고, 그는 몇 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뜻밖이었다. 그때까지 나도 친시장을 그가 반박하고 있는 바로 그 뜻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규제를 걷어내고 세금을 깎아 기업이 하기 좋게 만드는 것.
이 구분 자체는 경제학 안에서 새로울 것이 없다. 시장을 지키는 일과 이미 자리 잡은 기업을 지키는 일은 다르다는 것 — 시카고대의 루이지 징갈레스는 그 둘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을 오래 되풀이해 왔다. 다만 그 구분은 강의실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같은 단어를 두고 그와 내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도, 그가 그렇게까지 힘주어 말해야 했던 것도 그래서다. 재산권을 튼튼히 하자는 말은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자는 말로 이어지고,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자는 말은 다시 기업이 하기 좋게 해주자는 말로 이어진다. 세 문장은 한 줄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서 뜻이 바뀐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새로 들어온 사람이 이미 자리 잡은 강자와 겨룰 수 있다는 뜻이다. 기업이 하기 좋다는 것은 이미 자리 잡은 쪽에 유리하다는 뜻이다. 둘은 자주 반대를 가리킨다. 반독점은 시장을 위한 것이지 그 기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진입장벽을 낮추는 일도 그렇다.
그리고 아세모글루가 말한 재산권은 그 두 번째보다도 넓다. 애초에 그는 시장이 알아서 좋은 결과를 낸다고 보는 쪽이 아니다. 이 연구가 보장하라고 한 재산권과, 우리가 그 말에서 떠올리는 재산권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내용도 범위도 아예 다른 것이다.
사망률이 제도를 갈랐다
식민지를 개척하는 목적은 경제적 이익이다. 그런데 이익을 뽑아내는 방식은 두 갈래로 갈린다. 본국 사람들이 직접 건너가 눌러사는 방식과, 사람은 보내지 않고 자원과 노동만 빼내오는 방식이다.
어느 쪽을 택할지는 지배국의 취향이 아니라 조건이 결정했다. 당신이 그 시대의 영국인이고, 두 땅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고 해보자. 하나는 부의 기회가 있다고 알려진 땅이고, 다른 하나는 부의 기회가 있다고 알려졌지만 먼저 간 사람들이 절반쯤 죽었다는 소문이 도는 땅이다. 대부분은 앞쪽을 고른다.
그래서 사망률이 낮은 곳에는 사람이 갔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죄수가 갔고, 죄수를 관리할 간수가 갔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할 사람이 갔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본국에서 누리던 것을 그대로 요구했다. 내 땅과 내 재산을 국가가 함부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라는 요구다. 본국 정부로서는 자국민의 이 요구를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본국의 제도가 그 땅으로 옮겨 심어졌다.
사망률이 높은 곳에는 사람이 가지 않았다. 대신 군대와 관리인이 갔다. 오래 머물 생각이 없는 조직에게 필요한 것은 재산권 보호 장치가 아니라 수탈 장치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많이 빼낼 수 있는가에 최적화된 규칙들이 만들어졌다.
- 사망률 낮음 → 유럽인이 직접 살러 감 → 내 재산을 지켜줄 법이 필요함 → 포용적 제도
- 사망률 높음 → 유럽인은 안 살고 군대와 관리만 보냄 → 빨리 뽑아 나갈 시스템만 필요함 → 착취적 제도
그리고 이 제도들은 독립 이후에도 남았다.
여기서 흔히 나오는 반문 하나를 미리 정리하고 가자. 결국 질병이 많아서 가난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연구자들의 답은 이렇다. 앞에서 짚었듯 이 병들은 현지인에게는 이미 면역이 있는 풍토병이었고, 현지의 경제 활동을 마비시키지 않았다. 죽은 것은 외지인이었다. 그러니까 이 연구에서 질병은 현지인의 생산성에 작용한 변수가 아니라, 외지인이 어떤 종류의 지배 방식을 고를지에 작용한 변수다. 질병 자체가 오늘의 빈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질병 때문에 선택된 지배 방식이 남긴 제도가 오늘의 빈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쁜 제도는 왜 살아남는가
그런데 200년쯤 지났다. 식민지는 대부분 독립했다. 나쁜 제도라는 걸 알면 바꾸면 되지 않나?
바꾸는 게 그렇게 쉬웠다면 이 연구는 애초에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규칙 하나를 새로 만드는 데도 논의와 갑론을박이 필요한데, 있던 규칙을 없애고 다른 것을 세우려면 기존 규칙으로 이득을 보던 쪽부터 설득해야 한다. 연구는 세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새 제도를 세우는 비용이 크다. 정부의 수탈을 제한하고 재산권을 보장하려면 행정, 사법, 조세, 등기까지 사회 기반 시스템 전반을 다시 짜야 한다. 그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있는 나라는 이미 그 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인 경우가 많다.
둘째, 기득 집단이 작을수록 바꿀 이유가 없다. 수탈로 생기는 몫을 나눠 갖는 사람이 적을수록 한 사람 몫이 커진다. 몫이 크면 제도를 바꿀 유인이 사라진다. 역설적이게도, 착취가 소수에게 집중될수록 그 구조는 더 단단해진다.
셋째, 기존 규칙에 최적화된 투자가 이미 쌓여 있다. 정경유착과 뒷돈이 작동하는 환경에서 사업을 키운 쪽에게 공정한 규칙은 개선이 아니라 손실이다. 지금까지 쌓아 온 관계망과 노하우가 하루아침에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착취적 제도는 자기를 닮은 제도를 계속 낳는다. 이것이 이 연구에서 가장 덜 인용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연구의 핵심은 나쁜 제도가 나쁘다는 진단이 아니라, 나쁜 제도가 왜 스스로 유지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밖에서 좋은 제도를 얹어주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오랫동안 그런 방식이 시도됐다. 원조와 차관에 조건을 붙여, 주는 쪽이 좋다고 판단한 제도를 받는 쪽이 채택하게 하는 방식이다. 두 저자는 2013년 논문에서 이 방식의 뿌리를 겨눴다. 경제학의 표준적인 정책 조언은 정치를 괄호에 넣은 채, 시장의 실패가 보이면 되도록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정책이든 그 사회에서 힘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를 함께 건드린다. 그것을 계산에 넣지 않으면 교정하려던 실패보다 큰 것을 잃을 수 있다. 좋은 제도의 목록을 아는 것과 그 제도가 그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 재산권은 누구의 것인가
2001년 논문에서 제도는 하나의 지표로 측정됐다. '수용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지수다. 민간 정치위험 평가회사가 만든 것으로, 1985년부터 1995년까지의 평균값이며, 0에서 10까지의 척도다. 값이 높을수록 정부가 개인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지 않는다는 뜻이다. 표본은 유럽의 식민지였던 64개국이었다.
여기까지 읽고 이렇게 정리하기 쉽다.
결국 재산권이구나. 국가가 기업 것을 안 건드리면 되는 거구나.
그렇게 읽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저 지수를 만든 곳은 학술기관이 아니라 정치위험 평가회사이고, 그런 회사가 그 데이터를 파는 상대는 해외에 돈을 넣으려는 투자자다. 논문도 그 점을 숨기지 않는다. 이 변수는 외국인 투자에 관한 것이며 만든 회사가 애초에 외국인 투자자를 위해 이 데이터를 생산하기 때문이라고 적어 두었다. 그러니까 그 숫자가 실제로 재고 있는 것은 넣은 돈이 안전한가에 가깝다. 여기서 기업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지표를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읽은 것이다. 다만 그 지수는 이론의 정의가 아니라 통계 분석에 쓰인 대리변수다. 정의는 따로 있다. 아세모글루 본인이 노벨상 수상강연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가 든 것은 식민지 바베이도스다.
그곳의 잉글랜드 플랜테이션 엘리트는 자기 농장과 노예를 완벽하게 안전히 보유할 수 있었다. 국가가 그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다. 수용 위험이라는 잣대만 들이대면 높은 점수가 나올 상황이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쓴다. 그것이 바베이도스가 사회로서 안전한 재산권을 가졌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의상, 노예 상태였던 인구의 다수는 자기 노동에 대한 권리조차 없었다. 투자하고, 사업을 시작하고, 직업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강연에서 그는 아예 못을 박는다.
우리는 시종일관 강조했다 — 여기서 '재산권'이란 엘리트만이 아니라 사회의 광범위한 다수의 권리를 뜻한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소수가 완벽하게 보장받는 재산권은 이 이론에서 포용적 제도의 증거가 아니다. 정의상 착취적 제도다. 재산권을 누리는 사람의 범위가 좁을수록 그 사회는 착취적인 쪽으로 분류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정의도 같은 방향이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엘리트만이 아니라 사회의 광범위한 다수"를 위한 안전한 재산권과 경제적 기회를 요구하며, 여기에는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고 신규 기업의 진입을 장려하고 허용하는 것이 함께 들어간다.
그러니까 기존의 큰 기업을 보호하는 것은 이 정의를 만족시키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저자들은 이 차이를 두 사람으로 설명한다.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산업의 혁신으로 부를 이뤘고, 멕시코의 카를로스 슬림은 통신 독점을 쥐고 정치적 특혜를 통해 부를 이뤘다. 그런데 책이 짚는 것은 그다음이다. 게이츠는 1998년 미국 법무부로부터 독점 지위를 남용했다는 혐의로 제소당했다. 세계 최고 부자라는 사실이 그것을 막지 못했다. 슬림 쪽도 심사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97년 멕시코 경쟁위원회는 그의 통신회사가 시장지배력을 갖고 있다고 판정했다. 그런데 그 판정은 아무 결과도 낳지 못했다. 암파로(recurso de amparo)라는 구제 절차로 결정을 무력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그것을 권리를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법 앞의 평등에 뚫린 구멍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덧붙인다. 슬림이 미국의 제도 아래 놓였을 때, 그가 늘 쓰던 돈 버는 방식은 통하지 않았다고. 저자들의 정의를 이 자리에 대보면 이렇게 된다. 포용적 제도의 증거는 기업 우대가 아니라 기업 권력의 제약이다.
노동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따로 다뤘다. 2013년 논문에는 「지대, 노조, 민주주의」라는 절이 있다. 여기서 그들은 먼저 인정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노조가 비조합원 대비 조합원 임금을 밀어올려 경제적 왜곡을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고. 그리고 곧바로 반박한다. 노조는 민주화에서 결정적 역할을 해 왔다고 — 유럽의 노동운동에서 폴란드의 연대노조, 남아프리카의 노총에 이르기까지. 그러니 노조로 인한 고임금이라는 노동시장 실패를 교정하는 일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이미 지배적인 집단을 경제적으로 강화하는 정책, 또는 그들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집단을 약화시키는 정책이야말로, 정치권력의 균형을 더욱 기울이고 의도치 않은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특히 높다.
정리하면, 이 이론에서 재산권은 기업에게 주는 특혜의 이름이 아니다. 누구의 것이든 함부로 가져가지 않는 상태의 이름이고, 그 '누구'에는 자기 노동을 파는 사람도, 시장에 새로 들어오려는 사람도 들어간다. 그 '누구'가 좁아지는 순간 그것은 포용적 제도가 아니게 된다.
이 잣대를 우리에게 대면
아세모글루는 한국에 대해 직접 말한 적이 있다.
수상 발표 당일 그는 한국 경제가 민주화 이후에 속도가 붙었고, 더 건강한 방식으로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이 여전히 대기업에 지배되고 있으며 거기에는 이득과 비용이 함께 따른다고 덧붙였다.
한 달쯤 뒤 한국 언론과 한 서면 인터뷰에서는 더 구체적이다.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와 성장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동시에 재벌을 편들었다. 경제 성장이 민주화 이후 더 빠르고 건강해진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지금은 한국의 제도가 근본적인 진통을 겪고 있다. 양극화가 심화됐고, 재벌과 정치 사이의 정경유착이 정치 부패를 현실로 만들었다.
앞에서 확인한 정의를 여기에 대보면 말이 맞아떨어진다. 특정 기업집단을 편드는 것은 재산권을 넓히는 일이 아니라 좁히는 일이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 — 새로 들어오려는 기업, 하청 관계에 있는 기업, 자기 노동을 파는 사람 — 의 몫이 그만큼 불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의 다른 문제도 지적했다. 경쟁과 효율성을 저해하는 과도한 규제도 문제다라고. 이 문장을 빼고 인용하면 그의 말을 반쯤만 옮기는 셈이 된다. 다만 앞뒤를 보면 그가 말하는 규제는 경쟁을 막는 규제, 즉 진입장벽 쪽이다. 그 역시 같은 방향이다. 새로 들어오려는 사람의 자리를 막는 것은 규제든 특혜든 똑같이 좁히는 일이다.
로빈슨은 2025년 가을 한국을 찾아 이렇게 물었다. 한국은 어떻게 상대적으로 낮은 불평등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혁신적이고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사회가 되었을까. 그리고 스스로 답했다. 한국에서 정치적 포용을 만들어낸 것은 국민들이었다고.
2001년 논문이 다룬 64개국은 모두 유럽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고, 원인을 추적하는 지렛대로 쓴 것도 유럽인 정착민의 사망률이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이 표본에 들어 있지 않다. 한국이 아세모글루의 논의에 등장하는 곳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2012)의 남북한 비교이고, 그것은 계량 분석이 아니라 서술적 사례다.
그래서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나쁜 제도가 유지되는 세 가지 이유를 다시 떠올려 보자. 새 제도의 비용이 크고,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작을수록 단단하고, 기존 규칙에 최적화된 투자가 이미 쌓여 있다는 것. 이것은 저개발국에만 작동하는 설명이 아니다. 이미 포용적 제도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포용적 제도라 불리는 서구의 제도들도 처음부터 그 모양이었던 것은 아니다.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친 혁명과 항쟁으로 얻어낸 결과다. 재산이 지켜지는 사람의 범위가 저절로 넓어진 적은 없다. 매번 그 선 바깥에 서 있던 사람들이 밀어서 넓혔다. 로빈슨이 한국에서 정치적 포용을 만들어낸 것은 국민들이었다고 한 것도 같은 이야기다.
그러니 물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좋은 제도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좋은 제도를 만들어 갈 것인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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