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속초 밤바다 같다면

[월간 사생활] 02. 나의 사적인 여행

2021.04.15 | 조회 4.1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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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생활

지극히 사적인 공간 속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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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꺼내 쿰쿰한 옷장 냄새가 나는 겨울 외투 주머니에서 발견한 지폐 한 장보다 더 짜릿한 건 갑자기 떠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적지가 속초라면 더더욱 말이다.

속절없이 가는 속초.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이상한 마력이 아닐 수 없었다. 짧다면 짧은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바다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건만 속초의 바다는 내게 전혀 다른 바다였다. 어쩌면 바다 그 이상이었을지도.

지인들이 그냥 속초에 살라고 할 정도로 편도로 꼬박 2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그 거리를 정말 동네 마실 가듯 드나들었다. 남편은 내비게이션 없이 강원도 일대를 꿰뚫었고 그에 비해 방향 감각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도 웬만한 길은 다 아는 경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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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온몸 내달려 속초 바다에 도착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뜨거운 여름 햇빛에 뒤섞여 코끝에 잔잔히 나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좋았다.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에 두 볼이 있는 힘껏 빨개져도 그마저도 좋았다. 모래사장과 바다, 늘 똑같은 풍경이지만 늘 새로웠다.

특히 나는 속초의 밤바다가 좋았다. 대부분의 속초 여행도 밤바다를 보기 위함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지만 오히려 안도와 위안을 주는 그런 밤바다. 강한 바람과 함께 떠밀려오는 위험한 파도라 할지라도 수십만 번 내리치고 부딪혀 날카로운 돌을 둥그렇게 깎아내어 안심하고 맨발로 밟고 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밤바다. 눈부시게 파랗지 않아도 여전히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걸 알려준 그런 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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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보니 더욱 명확해졌다. 나는 속초 밤바다처럼 되고 싶다. 한없이 유약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견고하길 그리고 한결같기를. 수없이 내리치는 곤경과 난항 속에서도 뚝심 있게 한 곳만 내리치기를. 빛나지 않아도 여전히 가치 있기를. 네가 그런 것처럼 나도 더 많은 타인을 포옹할 수 있기를.

어렸을 적, 책장에 켜켜이 꽂힌 위인전 속 특정 인물처럼 되고 싶던 책만 너덜너덜해지는 것처럼 속초의 밤바다를 하릴없이 찾나 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득 품고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속초의 밤바다를 보러 가나 보다.

때로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존재처럼 속초의 밤바다는 늘 나한테 그런 존재다. 차가운 밤바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굳이 벌거벗음을 드러내며 바다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차가운 바다 내음만으로도 나를 감싸 안아주는. 그렇게 잠식되어도 좋으니 한없이 밀려들어만 오길. 내가 가진 헛헛함을 채워주고 부족함은 씻겨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망설이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 7시,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그때, 나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건다. 목적지는 속초, 소요 시간 1시간 58분. 역시, 막히진 않는다. 벌써 파도가 코끝에 일렁인다.

 

 

김트루

이름처럼 진솔한 글을 쓰려고 노력 중입니다. 실제로도 겁이 많아 거짓말은 잘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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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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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의 프로필 이미지

    서영📓

    0
    over 4 years 전

    저는 속초에서 나고 자랐지만 여전히 속초바다는 동경의 존재에요. 살 땐 몰랐지만 도시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언젠가 가야하는 곳. 돌아가야할 곳이 되어버렸어요. 내일 부모님 뵈러 저녁에 떠날 예정인데 속초가기 전 날 밤에 이런 글을 읽네요. 멋진 밤바다 사진과 멋진 글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 조이의 프로필 이미지

    조이

    0
    over 4 years 전

    밤 버스를 타고 처음 속초에 갔던 날이 생각이 나네요. 바다가 너무 가고 싶은 요즘 이 글을 읽으니 더욱 바다가 그리워지는 밤입니다 ㅜㅜ

    ㄴ 답글 (1)
  • 고래의 프로필 이미지

    고래

    0
    over 4 years 전

    바다를 보러갈 여유가 되면 가는 곳 중 속초, 양양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면 있는 고성을 가곤해요. 차안에서 주욱 가기엔 이제 허리가 아파서, 길게 느껴지긴 하지만 도착했을때의 바다의 반겨줌은 늘상 짜릿하고 행복해요, 그런 기분이 덩달아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ㄴ 답글 (1)
  • 최서영의 프로필 이미지

    최서영

    0
    over 4 years 전

    80년대 노래가사 같기도 하고 좋네요. 여행을 다녀올때마다 삶의 지향점을 되새기고 좋은 기운도 받고 온다니 부러워요. 여행길이 혼자가 아닌 점도 너무 좋네요 >

    ㄴ 답글 (1)
  • JR의 프로필 이미지

    JR

    0
    over 4 years 전

    사진이 너무너무 멋져요! 속초바다에 대한 애정이 가득 느껴져서 기분 좋게 읽었네요 :) 각기 다른 바다가 여기저기 정말 많은데, 마음에 쏙 드는 바다를 이미 알고 계시다니 너무 행복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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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방의 프로필 이미지

    작은방

    0
    over 4 years 전

    항상 가는 여행지가 있다는게 부러워지는 글이었습니다. 처음 속초에 갔을 때 잠이 안 와서 숙소창으로 보이는 밤바다를 지켜본적이 있는데 저도 바다가 있는 곳에서 자랐지만 뭔가 다르더라구요. 그 생각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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