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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생활] 02. 나의 사적인 여행

2021.04.29 | 조회 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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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생활

지극히 사적인 공간 속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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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와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준비하던 때다당시 남자친구와 나는 3년간 활동하던 극단에서 퇴직을 한 뒤 꽤 오랜 시간동안 미래에 대한 걱정에 머물러 있었다과거를 떨치기 위해서는 앞으로 걸음을 내딛어야 했던 당시, 난 고민을 떨쳐내고 과감한 걸음을 내딛어 보기로 결심했다각자 모아 둔 돈으로 영국행 비행기 표와 스페인 출국 비행기 표를 단번에 끊어버렸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길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떠나는 긴 여행의 경비를 모으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져야 했다우리는 평일과 주말 가릴 것 없이 밤낮으로 일을 했다주말이 되면 나는 레스토랑으로남자친구는 돌잔치 행사장으로 향했다평일 밤과 낮을 나눠 나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들고 이불 포장 상자를 접었으며남자친구는 김치찌개 식당에서 서빙을 하거나 아버지의 대리기사를 하며 용돈을 챙겼다남자친구는 본인을 콧수염이라 부르며 반말을 일삼는 단골 아저씨들 이야기와어르신들 앞에서 100일된 아기보다 재롱을 열심히 떨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일과를 마친 밤이되면 전화기너머로 피곤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곤 했다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비슷한 일상들이 반복됐다

돈을 벌기 위한 일상에 매진하느라 하루하루는 몹시도 분주히 흘러갔지만, 반대로 그 바쁜 일상 속에서 멈춰있는건 나 뿐인것 같았다일을 하는 내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라는 고민이 끊이질 않았고단순 노동 만으로도 여행경비를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나 자신이 무용해지는 것 같았다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내 재능은 조금도 사용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사명이라도 생긴 듯이 여행 준비를 잘 하고자 했다지금의 무료함을 행복한 여행으로 보상 받고 싶었다삶에서 많은 돈을 모으려고 한 적도 없었으므로단 한번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환상은 당장의 불안을 잠재워 주었다떠나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날마다 커져갔다유럽여행을 다녀오면돈과 비교할 수 없는 재산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여행을 통해 수많은 영감들을 얻을 수 있기를한 뼘 더 성장할 수 있길 바랬다

돈을 벌면서, 하루하루 여행 계획을 세우고 허무는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큰고모로부터 연락을 받았다오랜만에 듣게 된 큰고모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짧은 안부를 오고간 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사실을 들었다큰고모가 내게 서둘러 오길 바란다고 했다. 일하느라 그리 충분하지 않은 시간을 쪼개어 큰고모 댁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못 본 사이 주름과 흰머리가 늘어있는 큰고모가 나를 반겼다

안방으로 들어서니 바닥에 누워 계신 할머니가 보였다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냈지만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화장실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실 때 고관절과머리를 다치신 것 같다고 큰고모가 설명해줬다병원 가기를 미루고 있는 할머니 때문에 큰고모가 홀로 간병중인데 욕창이 점점 퍼져서 곤혹스럽다고 했다그런 큰고모에게 나는내가 돕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개를 숙이고 할머니의 손을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나를 못알아 보는 할머니에게 내 이름을 중얼거리다가일을 가야한다고 말씀드리고 이내 일어났다큰고모는 내게 요즘 많이 바쁘냐고밥 잘 챙겨먹으라고 말했다사는게 바빠서 그렇지 뭐라며 대답을 짧게 흐렸다여행을 준비 중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나 보다 작아진 큰고모를 짧게 안고는 서둘러 대문 밖을 나섰다.

일을 하는 내내 할머니의 멍한 얼굴과 큰고모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그리고 할머니 허벅지와 둔부에 깊게 파인 욕창이 떠올랐다그럴 때마다 나는 그 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할머니가 고통중에 있는데 친손녀인 나는 여행이나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기 싫어서였다할머니의 죽음이 부디 유럽여행의 시기와  겹치지 않길 바랬다큰고모에게 할머니 안부도 자주 여쭙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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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즈음 할머니가 요양병원으로 입원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나는 여전히 돈을 모으기 위한 아르바이트에만 몰두 하고 있었다시간은 돈이었다공과금과 월세 지출 때문에 모자란 여행 경비를 시간으로 메꿔야 했다그렇게 할머니에게 가기를 미루고 미루던 중이었다결국 죄책감에 떠밀려 한달만에 할머니를 다시 보러갔다.

요양병원으로 가는 길은 내가 자란 동네라 익숙한 거리였다할머니의 손을 잡고 거닐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 할머니는 내게 엄마같은 존재였다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과거에 떠올렸던 늠름한 할머니 대신나보다 한참 작아진 할머니가 침대위에 누워있었다자는 듯한 할머니를 조심스레 불렀다할머니의 두 눈이 한참 내 얼굴을 더듬다가나를 알아보았다다행이었다그러나 할머니는 내가 하는 말을 거듭 다시 되물었다귀가 많이 안좋아졌기 때문이었다다른 할머님들과 간병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큰 목소리로 재차 말하기가  부끄러웠던 나는 말을 줄이고 아꼈다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었는데 그 말은 더욱이나 크게 말하기 부끄러웠다할머니를 일으켜 앉히고할머니가 밥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할머니 몸 곳곳에 번진 욕창을 눈에 새겼다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것 뿐 이었다밥을 많이 먹어야 얼른 낫지”  잔소리만 하며 할머니의 메마른 손을 만졌다.

그러다 문득 할머니가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여기서 나가면 내가 저랬었구나말하려고’ 찍어 달라고 했다나는 가만히 핸드폰을 들어 할머니의 얼굴에 카메라 방향을 맞췄다할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나도 할머니의 웃음 같은 희미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할머니가 말끔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희망이었다그럴수 있을거라고 막연하게 바랄 수 밖에 없었다

또 올게일 가야해서” 라고 말하고 금새 자리에서 일어났다어여가밥 잘 챙겨먹고”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나는 할머니가 누워야 가겠다고 했다할머니가 누웠고내가 나가는 문을 할머니가 바라보지 않을 때 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병실 문을 닫는데 문이 너무 무거웠다기운 없는 할머님할아버님들만 계신 그 병원은 무덤 같이 고요했다난 빠른 걸음으로 병원 밖을 나섰다그 이후로도 할머니 곁에 머무르기보다 떠나기를 준비하는 내 모습은 계속 되었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례식장에서 할머니의 차가운 손을 잡게 되었다병원에서 차마하지 못한 말을 영원히 닫힌 할머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긴 말도 아니였다남 앞에서 말하기 부끄러워도 손녀라면 할 수 있는 말 이었다고맙고 미안하다는사랑한다는 그런 말 이었다

그로부터 두달 후꿈에 그리던 여행지에 도착했다처음 보는 이국적인 풍경에 눈과 몸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하루에 30km를 걸었다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정교한 건축물상점이 즐비한 거리모두가 근사했다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바다와 절벽끝이 없을 것 같은 평야가 인상적이었다있는 힘껏 모든 순간이 내 것이 되길 바랬다하지만 내가 보는 풍경을 우리 할머니는 다시는 못 보리라는 생각이 밀려오면 그 어떤 것도 허무해졌다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여행이었으나 나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걷고 걸어도 어디에 서있는지를 모르는 기분이었다떠나온 길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방법은 영영 없었다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해도아마 나는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나는 그런 사람이었다하지만 내가 그렇게 떠난다 하더라도 아마 우리 할머니는 나를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할머니는 언제나 내가 어딜 가든 무사히 다녀오기만을 바래줬었다긴 시간을 떠난 적도 있었다내가 연락 없이 불쑥 나타나도할머니는 길게 묻지 않았다꼬깃꼬깃한 만원 지폐를 손에 쥐어주며 살 좀 찌라고 했다이제는 반대로 내가 할머니의 안녕을 바라며 지내고 있다깜깜 무소식의 기분이 이런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떠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던 내 예상은 이런 식으로 맞게 되었다그토록 바랬던 여행을 통해 보고 겪은 근사한 것들은 내 것이 될 수 없었다바쁘게 돈을 모으고 여행을 다녀왔던 시기를 떠올리면마주 봤던 화려한 유럽의 풍경보다 내가 등졌던 낡고 낯익던 풍경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어둡고 조용하던 요양병원 복도내가 예쁘다며 바라보던 병실 안 할머니들의 흐린 눈빛들티비에서 흘러나오던 구원에 대한 설교할머니가 먹다 절반을 남긴 흰 죽 과 오렌지할머니의 희미한 웃음과 살 속 깊게 곪은 자국들나의 어려움을 이해해주려 했던 큰고모와 할머니의 얼굴그런 것들만 선명히 떠오른다

그리고 그 기억들로 나는 알게 되었다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들을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그것들이 진정내가 가진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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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할머니 입맛, 골밀도 낮음, 그리고 서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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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의 프로필 이미지

    서영📓

    0
    over 4 years 전

    고래님 글 읽다가 예전 할머니 병원에 계실 때 일이 떠올라 문장 읽다가 멈칫 멈칫 하다가 눈물이 났어요. 저희 할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으시고 본가에서 여전히 돌봄을 받고 계시는데 매번 본가에 내려갈때마다 할머니와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해요. 다녀오면 항상 후회가 남아요. 할머니한테 더 말 많이 할걸. 할머니 더 많이 안아드릴걸. 갈 때마다 할머니 사진을 찍어요. 후회할까봐. 그런데 매번 후회하는거 같아요. 작가님 삶을 위해 자기돌봄의 의미로써 그 여행은 반드시 필요했으리라 생각해요. 제가 너무 주제 넘게 이야길 한거 같아요. 한문장 한문장 작가님 마음을 꾹꾹 눌러담은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ㄴ 답글 (1)
  • 김트루의 프로필 이미지

    김트루

    0
    over 4 years 전

    여행과 가족은 비슷한 것 같단 생각을 해요. 떠나기 전엔 참된 의미를 알기가 힘든 것 같아요. 여행도 떠나봐야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가족도 누군가 떠나야 비로소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깊게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늘 마음 속에 깊이 새기면서 여행이든 가족이든 소중하게 하루하루 기억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도중에 고래님의 글을 보니 더욱더 확신하게 되네요. 저는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요. 여행이든 가족이든 제 삶이든. 그렇기 때문에 지나간 일이지만 고래님의 여행도, 고래님의 할머님에게도 진심을 담아 안녕을 기원합니다.

    ㄴ 답글 (1)
  • JR의 프로필 이미지

    JR

    0
    over 4 years 전

    예전에는 여행의 중요도가 인생에서 꽤 높았는데, 조금씩 내려가더라고요. 이렇게 예쁜 풍경이 있고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 가족들은 평생 모를 수 있는 호사를 나 혼자만 이렇게 누려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저는 정말 평생 이런 생각 안할줄 알았거든요.. 떠나면 모두 해결될 줄 알았는데 불안은 잠재워지지 않더니, 이제는 저도 여행에서 다른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네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ㄴ 답글 (1)
  • 최서영의 프로필 이미지

    최서영

    0
    over 4 years 전

    저도 아기적에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그런가.. 글이 슬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기로 인해 나머지 가족들하고는 멀어졌지만, 가족 중에 가장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자란 거 같아요. 사람과 사람의 기억은 그렇게 자양분이 되는 거 같아요. 하나 덧붙이자면, 저도 유럽이 생각보다 인상깊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여행 다녀오면 훌쩍 성장한다던데,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요. 이색적인 볼거리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 진정성 있는 소통이 우리를 자라게 하나봅니다.

    ㄴ 답글 (1)
  • 작은방의 프로필 이미지

    작은방

    0
    over 4 years 전

    요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글을 읽다가 눈물이 났어요. 저희 할아버지는 뭐가 하고 싶다는 말은 없으셨는데, 할머니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신것에서 왠지 제가 위안을 받았어요. 각자의 사정이 모두 이해가 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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