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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한 밴드의 공연을 봤다. 관객과 밴드가 한 공연장에 모여서 카카오톡으로 소통하는 작은 공연이었다. 노래와 연주를 하는 두 사람도, 공연을 보는 관객도 같은 동네 주민이어서 그런지 마스크를 낀 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과 달리 스마트폰 안에서는 거리낌 없이 살가운 문자가 오갔다.
밴드의 한 멤버가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 갔던 해외여행 사진을 보여줬다. 자연스레 채팅방에서도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하늘을 날아서 타국에 가는 일이 꿈같이 멀게 느껴진다.
쉽게 체념하고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 나는 지금의 일상에 금방 적응했다. 지난 여행 사진을 본다든지 하면서 추억에 젖는 일도 없었다.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고 회의도 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접촉하면서 이게 더 편하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날 밤만큼은 낯선 사람들과 낯선 나라에 대한 꿈을 꾸었다. 일상에 뿌리내리는 것이 유리한 세상이라고 해도, 역시 가끔은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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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여행을 좋아한다. 저렴한 물가와 따뜻한 날씨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그곳에 있다. 느긋한 사람들과 느슨한 건축이다. 안과 밖의 경계가 느슨한 건물과 사람들 사이를 걷다 보면 나도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다. 눈치 보지 않고 시원하게 뻗어있는 무성한 식물의 커다란 잎사귀와 반쯤 눈을 감은 채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는 동물들을 보면 나도 그곳의 분위기에 동화된다. 갑자기 내리는 폭우에 모든 것을 멈추고 기다릴 때면, 효율이니 속도니 하는 것을 잊어버린 조금 다른 내가 되는 것이 좋다. 나는 그런 내가 좀 더 나다운 것 같아서,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는 것 같은 겨울이면 나를 녹이기 위해 비행기 표를 끊었다.
처음 동남아에 간 것은 서른 무렵이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던 이십대를 지나, 어디에든 속하고 싶은 서른이 되어 있었다. 면접을 보고 첫 출근까지 보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사십만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홀린 듯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렇게 처음 혼자 떠난 해외 여행지가 치앙마이였다.
치앙마이는 인천에서 방콕으로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이동해야 하는데, 나는 방콕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늦은 밤 도착한 방콕공항은 밤에도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공항에 남아 있었다. 나는 처음이라는 작은 모험에 들떠있었다. 공항에서 자는 것도, 혼자 해외여행을 가는 것도, 이렇게 따뜻한 나라에 온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아침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고, 특별할 것이 없는 공항을 구석구석 구경한 뒤 공항 밖으로 나가보았다. 까만 밤하늘과 따뜻한 공기가 훅하고 들어왔다. 방콕의 첫인상이었다.
다음 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숙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근사한 인테리어와 풍경에 비해 저렴한 숙박비와 읽을 수 없는 주소 한 줄이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숙소는 ‘치앙마이의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서도 조금 더 들어간 숲속에 있는 한 부부의 집이었다. 숙소는 사진보다 근사했고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한적하고 낯선 길을 따라 걸었다. 우거진 식물 사이로 단층 건물이 듬성듬성 있고, 담은 낮고 문은 열려있었다. 느슨한 담장 안으로 고양이 몇 마리가 놀고 있어 다가갔는데 금세 따라와 얼굴을 비볐다. 잔뜩 햇볕을 받은 털은 까슬하고 따스했다. 거리에 있는 동물들의 표정을 보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낯선 사람에게 얼굴을 비벼오는 고양이 앞에서 여행 첫날의 긴장이 풀렸다.
조금 더 걷다가 식당에 들어갔다. 오래된 선풍기가 작은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문이나 창문은 마치 흔적처럼 자리만 남은 듯 그대로 뚫려있었다. 그 사이로 거리의 따뜻한 바람과 사람들의 소리가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했다.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며 낯선 도시의 평범한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라고 느낀 것은 비행기에 내려 공항철도를 타러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볼 때였다. 나도 그 속에 섞여 같이 달렸지만 왠지 웃음이 났다. 이유도 모른 채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멀리 떠나고 싶어지는 것은 그날의 기억 때문이다.
작은방
집에서 모든 걸 다 하는 실내형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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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영
역시 외국 고양이들은 친근해서 좋아요 ㅎㅎ 전 아직 동남아를 못 가봤어요. 얼른 코로나가 끝나서 훌쩍 떠나고 싶네요!!
작은방
그러네요, 일년이 넘어가니까 저도 요즘엔 여행이 가고 싶어 좀이 쑤시네요. 다른 분들 여행기를 읽으니 더 그런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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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아..작가님 글 읽으니까, 제가 또 태국 여행을, 또 태국 중에서도 치앙마이를..너무 즐겁게 다녀온 기억이 떠올라서, 잠시 괴로웠(?)네요 ㅠㅠㅎㅎ...너무 떠나고 싶어져서요!!! ㅎㅎㅎ 여행가고싶다......그런 설레임이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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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트루
저도 첫 동남아 여행의 기억이 떠오르네요. 신혼여행으로 동남아를 갔는데 잊을 수 없어서 매년 동남아를 방문했죠. 이번엔 코로나때문에 좀처럼 가지를 못하는데 그때의 설레임과 더위, 풍경, 느낌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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