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딱히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어릴 적 자주 떠난 가족여행 때문일 것이다. 우리 가족은 오래 전 국내여행을 자주 다녔다. 엄마는 운전석, 아빠는 조수석, 그리고 동생과 나는 뒷좌석에 앉아 다섯 시간이고 여덟 시간이고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얼마나 남았어?" 묻고 물어도 여전히 도착은 커녕 갈 길이 멀었다. 동생과 나, 둘 중 한 명이 중간에 토를 하면 일단 차가 멈췄다. 아빠는 다시 조수석에 앉으며 자신의 무릎 위에 나를 앉게 해주었다. 울렁거리는 속이 조금은 편해지라고 아빠는 내 바지 지퍼를 내려 주고 창문도 열어주었지만,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멈춘 한 휴게소에서 차 문을 쾅 하고 닫아버리고 혼자 차도 위를 걸었다. 금세 아빠에게 잡혔지만 그래도 속이 후련해 멀미는 멈췄다. 여전히 그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와 아빠는 주로 우리 자매를 데리고 유적지 탐방을 다녔다. 아빠는 비석에 적힌 한자를 천천히 읽으면서 최대한 설명해주려 했지만 한자풀이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역사와 상관없는 아빠 본인의 이야기로 끝나곤 했다. 시인인 엄마는 여행을 다녀온 후 종종 시를 썼다. 아빠는 필름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람이 아닌 풍경사진만 주구장창 찍어댔다. 어린시절 여행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창고에는 아빠가 찍었던 풍경사진이 지금도 여전히 가득하다.
동생이 중학생이 되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우리 가족의 여행은 뜸해졌다. 뜸해진 시기는 정확하게 엄마의 신장암, 신장제거 수술 했던 전후였던 것 같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싶은 때에 이번엔 아빠가 아팠다. 아빠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환자실은 출입이 하루 두 번으로 제한됐다. 나는 아빠와의 면회를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이번에 아빠가 퇴원하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가족여행을 가야한다고. 못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 눈물이 고였다. 아빠는 "의료기술이 좋아져서 내 목숨 줄이 붙어 있는 것이지 옛날사람 같으면 이번 일로 죽었을 것"이라면서 나를 또 울렸다. 아빠의 섬뜩한 말 뒤로 우리 가족은 괌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엄마는 오래 전부터 반나절 짧은 여행이라도 여행일기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토끼눈처럼 빨개진 눈으로 숙소에서 일기를 끄적이곤 하셨다. ‘화장실 다녀오니 서영이가 커피를 사옴’, ‘9시에 출발’ 같은, 특별할 것이 하나 없는 내용인데도 엄마는 비밀번호를 외우듯이 달달 외우다가 여행 틈틈이 영수증이나 핸드폰 메모장에 끄적이셨다. 여행 좀 즐기지. 여행 중에는 여행에만 집중해주지. 어쩔 땐 그런 모습에 고개가 절로 절레절레 흔들어지지만, 나 또한 엄마 딸인지라 여행이 끝나고 난 뒤 남는 건 사진과 글밖에 없다는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저번엔 아빠가 중환자실까지 가더니 이번엔 엄마가 아팠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엄마는 신장이식이 아니면 신장투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제 정말 우리에게 가족여행이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행 같은 거 필요 없으니 제발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만 더 허락해달라고 기도했다. 지인들은 중국에서 장기를 살 수도 있다는 무서운 말을 희망인 듯 건네기도 했다. 엄마는 신장기능이 떨어지는걸 알면서도 자신의 피를 갈아엎는 신장투석이 무서운지 투석날짜를 자꾸 늦췄다. 한 개 남은 신장이 5%까지 기능이 떨어질 때까지 엄마는 버티고 버텼다. 5%라니. 나는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고인다.
내가 엄마에게 내 신장을 주겠다고 하면, 동생은 자신이 줄 거라고 하고, 아빠는 자식들에게 몹쓸 짓 하지 말라고 자신의 신장 매칭률부터 보자고 했다. 아빠는 본인도 아픈 몸이면서 그렇게 엄마를 타일렀다. 결국 엄마는 이모의 신장을 받았다. 지금 엄마의 새로운 신장은 60%까지 신장기능을 회복했다. 투석을 받는 와중에 썼던 시들이 모여 엄마의 네 번째 시집 <복사꽃소금>이 출간됐다.
개인적으로 엄마가 냈던 시집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지만 읽기는 가장 어려운 시집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엄마의 시집 속에는 신장투석을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시를 쓰겠다는 유언 같고 결연한 시구들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 시 속에 숨은 나의 성정을 발견한다. 출퇴근길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독서를 즐기는 나는 엄마를 닮았다. 내가 엄마의 속에 살았고, 엄마의 속이 내 속에 늘 살고 있다.
코로나로 멈춰버린 우리의 여행 대신 나는 엄마의 시를 읽는다. "입에서 입으로 전수되는 지도를 갖고 있는 캇크부족/한 사람을 잃으면 지도 한 장을 잃는 것/길을 알려주고, 세상을 알게 해주던 이름이 잊혀지는 것/...지도 한 장에서 말들 우르르 몰려나오고/그리운 얼굴이 당도한 길/" 채재순 <말지도>
우리는 캇크부족처럼 시나 사진 속에 없는 지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사는 중이다. 서로 길을 찾고 묻고 나아가는 것을 반복한다. 평생 글 쓰는 일 말고는 직장을 다녀본 적 없는 아빠가 갑자기 취직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빠가 취직이라니. 남들에게는 놀랍지 않은 그 일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특별한 일이다. 엄격하기만 했던 엄마가 신장이식 후 한 달 동안 서울 동생 집에 지내며 평생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봉인 된 것들이 무장해제 되었다. 이렇듯 우린 각자의 새로운 모습을 통해 서로를 발견하고 또 알아간다.
실은 멈춰버렸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여행은 아주 조금씩 서행 중이었던 셈이다. 길이 아니던 것이 갑자기 길이 되기도 하고, 그 속에서 우리 중 누구라도 언제든 행방불명될지 모르는데, 그걸 알면서도 매번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서로에게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 마디 말이 길이 되는 지도를 들고 우리는 지금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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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 모두 여행이라 예상치 못했던 순간순간에 불행같은 일이 닥치지만 훗날 그것은 또 다른 길이 되어 주는 것 같아요. 잠시 길을 잃는 듯 해도 함께 있는 모든 시간이 길인것을 '^'
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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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트루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녀온 지 꽤 오래되었네요. 아빠 차에 올라타 고속도로를 달리면 그 순간 여행이 시작되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하기 보다 누구와 함께 떠나는지가 가장 중요했네요. 여행은 자주 다니라는 말이 있죠. 가족과 함께 자주 떠나는 여행을 곧 기획해야겠어요:) 여행을 통해서 가족이 같은 피를 나눈 것 말고, 다른 생각도 나누길 바라면서요:)
서영📓
저도 그때 이후로 여행을 못 가고 있답니다. 하루하루가 가는것이 불안하기도 하고 조급해지기도 해요. 근교라도 다녀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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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제가 어릴적 아버지가 출장을 자주 다니셔서 휴가 때가 되면 아버지가 일하시는 곳으로 가족여행을 갔던 일이 떠오르네요! 하지만 저는 작가님과 다르게 남아있는 사진이 별로 없네요 ㅜㅜㅜ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보니 많이 남겨둘걸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ㅜㅜ 좋은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영📓
남는건 사진과 글이더라구요. 우리 많이 남겨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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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한마디 말이 길이 된다니.. 어떻게 이런 따듯하고 힘이되는 글을 쓰셨는지 한참을 거듭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함께가는 가족이 있으신것에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서영📓
거듭해서 읽어주셨다니 너무 영광이에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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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영
글이 힐링 그 자체네요. 여행이 서행 중이었다는 대목이 가슴에 와닿아요. 가족과의 여행이 아니더라도, 멈춰선 듯 보이는 모든 인생이 사실은 잠시 서행 중인 거겠죠. 마지막 가족 사진이 뭉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서영📓
감사합니다 서영님! 코로나때문에 우리 모두가 서행중이지만 천천히 나아가고 있어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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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방
오랜 친구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한 사람을 잃으면 지도 한 장을 잃는 것’이라는 어머님의 시를 계속 되뇌었어요.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심해서 항상 후회하는지라 더 와닿네요. 아름다운 여행이 되시기를 :)
서영📓
감사합니다! 저도 저의 엄마의 시구절이 불쑥 불쑥 생각날 때가 많아요. 그게 지도 같다고도 느끼고요. 우리가 하는 글쓰기가 그런 지도를 만들어간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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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와 정말 따뜻한 글이네요. 가족이라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예상치 못한 면모를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작가님 가족의 여행길이 앞으로도 순탄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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