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이별 여행’을 기억한다. 세계 2차 대전이 터져 생이별한 연인. 9년만에 다시 만나 이별 여행을 떠난다. 결국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서로를 떠나보낸다. 쿨하고 단호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헤어지면 헤어지는 거지 왜 굳이 여행을 같이 가냐고. 나같이 찌질한 사람들이나 이해한다. 그들에게 사랑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지독하다. 이별은 마취 없이 암종양을 적출하는 고통이다. 그러니 이별 여행 따위의 괴상망측한 퍼포먼스라도 벌여야 겨우 사랑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츠바이크가 창조한 두 연인처럼 나도 이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헤어진 연인과 함께. 원래 우리도 여름쯤 해외여행을 떠날 참이었지만 소망은 산산조각났다. 그 소망이라도 채워야 그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 그와는 차마 연락할 수도 없는 사이. 게다가 코로나 정국으로 출국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없었다. 내가 ‘최면 감수성’이 유독 높은 사람이라 그랬다. 팍팍한 하루가 끝나가는 자정께. 스마트폰으로 유투브 앱을 열고 10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최면술사 채널에 접속했다. 그 중 ‘가을 오솔길 따라 찾아가는 전생 체험’이라는 영상을 틀었다.
나직하고 건조한 술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 오늘은 가을 정취가 절정인 오솔길을 따라 나의 전생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아름다운 오솔길에 서 있습니다. 하늘은 푸르르고 볕은 노랗습니다. 길 오른쪽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절정인 숲이, 왼쪽에는 황금빛 밀밭이 보입니다. 오솔길을 따라 걸어봅시다. 발 끝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밟힙니다. 티없이 서늘한 바람이 코끝을 스칩니다.’ 술사의 안내를 따라 3D 그래픽을 구축하듯 머릿속에 오솔길의 풍경을 그렸다. 혼신을 다해 10분쯤 집중하자 트랜스 상태에 돌입했다. 계속 영상을 들으며 전생을 따라가는 대신 나는 여기서 영상을 껐다.
환상 속 오솔길에서 숲 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시 걷자 공동묘지가 나왔다. 묘지는 수십 개쯤. 비석 중에는 이름이 드러난 것도, 지워진 것도 보였다. 그 이름들을 하나씩 읽는 기분이 쓰라렸다. 그 중 가장 멀끔한 비석 앞에 멈췄다. 선명히 새겨진 석 자는 헤어진 그이의 이름이었다. 무릎을 꿇고 맨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손톱 밑에 이끼와 흙이 잔뜩 꼈다. 이윽고 새하얀 관이 나왔다. 관을 여니 그가 누워있었다. 흰 패딩점퍼와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흰 발목양말과 컨버스 운동화 차림으로. 숱 많은 속눈썹에 내려앉은 한 점 흙조각을 떼어내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마치 산 자마냥 사자가 눈을 떴다. 우주처럼 까만 눈동자가 날 응시했다. 알고 있었다. 이건 내 환상이 만든 가짜라는 걸. 진짜를 내 안에 가둘 수 없어 만들어낸 정교한 가짜라는 걸.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켰다. 이별 여행의 신호탄이 올랐다.
같이 숲을 빠져나오니 타이베이 시내가 펼쳐졌다. 해 기우는 시내를 우리는 함께 걸었다. 하수구 옆 으깨진 바퀴벌레 시체를, 맥 없이 드러누운 검은 유기견을, 알 수 없는 한자로 도배된 복권가게를 스쳤다. 땅거미가 깔릴 때쯤 야시장에 도착했다. 홍등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리는 포장마차만 족히 200개는 돼 보였다. 그가 앞서서 아무 가게 앞에나 척 하니 앉았다. 맥주와 굴전, 동파육이 나왔다. 신선하고 보드랍지만 약간 비린내 나는 굴전과 달달 쫄깃하지만 느끼한 동파육. 그는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역시 가짜다웠다. 진짜와 함께 왔다면 가게부터 내가 골라야했을 것이었다. 고기파인 그는 굴 따위 먹지 않는다. 아니 원체 입맛이 없는 친구였다. 뭘 시켰든 몇 젓가락 먹지도 않고 버렸을 것이었다. 쌉쌀한 라거를 한 번, 두 번, 세 번 넘기니 포장마차의 홍등이 훅 꺼졌다.
밤하늘을 보았다. 타이베이의 매연이 걷히며 낯익은 별자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곰자리가 유난히 환했다. 다시 땅을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이었다. 낡은 시계처럼 내 옆에 작은 모닥불이 틱틱 거렸다. 낡아빠진 양탄자 옆에 내 가짜 연인이 앉아있었다. 뒤에는 황토색 천으로 둘러싸인 둥근 텐트가 보였다. 몽골식 게르였다. 나도 옆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서먹서먹하게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 청승맞은 가요나 함께 불렀다. 코끝과 발끝이 얼어들어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내 등 뒤에서 날 끌어안았다. 역시 진짜보다 나은 가짜. 진짜는 내 등을 안아준 적이 거의 없었다. 보통 심하게 다투고 화해할 때 나만 진짜의 등을 안고 토닥이고는 했었다.
초원의 기온은 곤두박질 치고 온몸이 한기로 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허리를 끌어안고 게르의 문을 열었다. 안에 미색 양탄자가 깔린 30미터 가량의 복도가 나왔다. 복도 맨 끝에 문이 하나 나왔다. 문고리를 돌리니 맥없이 훅 열렸다. 그 곳은 서울 W호텔 객실이었다. 객실 통창 아래 아차산의 묵직한 그림자와 형형색색 네온불빛이 빛나는 수영장이 보였다. 평소 파티를 좋아하던 진짜라면 수영장으로 질주할 것이었다. 반면에 가짜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욕실로 데려갔다. 역시 환상 속이라 그런가. 분홍색 입욕제가 풀린 완벽한 욕조가 준비돼 있었다. 가짜와 나는 쭈뼛쭈뼛 옷을 벗고 욕조로 들어갔다. 그의 쇄골에 볼을 기댈 수 있었다. 눈이 감겼다. 언제나 약간 빨랐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따뜻한 물 속에서 그의 손가락이 꼼지락대며 내 발가락을 간질였다. 못내 나는 키들거렸다.
발자국 하나 찍힌 적 없는 눈밭을 닮은 이불 위에 우리는 누웠다. 두 몸이 포개졌다. 그의 열 손가락이 내 열 손가락 사이로 녹아들었다. 농익은 과일 두 개가 짓눌리듯 입술이 겹쳐졌다. 조심스레 우리는 서로의 혀를 맛보았다. 목덜미 너머 호텔 어메니티의 향기가 희미해지고 익히 알던 살내음이 불어왔다. 맘껏 채워진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진짜는 결코 날 채워주지 않았다. 그와 자면서 나는 괴란쩍고 허탈하고 서글프기만 했다. 내가 그를 좀더 원할 때면 그는 혼곤히 잠들어버렸다. 몇 시간을 미동도 없는 긴 속눈썹을 바라보다 졸아버리고는 했다. 가까스로 잠들면 그제야 그는 나를 원했다. 새벽녘 웃옷을 비집고 들어오는 손길이 잠을 방해하면 부아만 치밀었다.
한참을 안고 궁글었던 가짜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뽀얀 이불에 꽁꽁 싸여 우리는 창밖만 물끄러미 구경했다. 어느덧 아차산 뒤로 노르스름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둠이 푸르러지고 푸름이 노래지고 노랑이 발그레해지는 시간이었다. 여느 때 같은 새벽일뿐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저며들고 있었다. 알래스카의 오로라조차 이보다 아리따울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하얀 커플 패딩을 입고 봉천동 시장 골목의 평상 앞에 앉아있었다. 처음 사귀던 그 날도 패딩 빼고는 똑같았다. 우리는 서로 첫눈에 반해 첫만남에 입맞춤을 나눴다. 새벽 출근 중인 할아버지와 오토바이를 탄 아주머니, 고양이 급식소에 아침 먹으러 나온 길고양이까지 우리의 미친짓을 다 보았다. 늘상 보던 어스름, 존재감 없는 행인들, 모든 식상한 풍경들이 한순간에 특별해졌다. 평생 가봤던 여행지를 다 떠올려봐도 그 여름 새벽의 봉천동보다 이색적이지 않았다. 우리는 여행 한 번도 못 가보고 끝난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반해버렸던 그 때부터 이별까지 매 순간은 다 여행이었다. 그렇게 여행의 고양감과 환희를 우리는 하루하루 잊어만 갔다. 결국 서로에게 영원히 없는 사람이 돼 버렸다.
어느새 눈 앞에는 봉천동 골목 대신 공동묘지가 펼쳐졌다. 새벽 어스름 사이사이에 싸리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스란야시장, 테를지 초원, W호텔. 전부 과거에 가봤던 곳들이었다. 환상이 그렇다. 암만 감미롭다 해도 환상 속에서는 과거만 곱씹게 된다. 환상과 과거를 훌훌 털어버릴 시간이었다. 그 전에 장례를 끝마쳐야 했다. 우리 엉덩이 밑에는 평상 대신 하얀 관이 있었다. 관을 다시 열 때 흡사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었다. 가짜는 희미하게 미소하며 관에 다시 누웠다. 커플패딩을 벗어 그를 덮어주었다. 뚜껑을 닫았다.
뒤를 돌아보니 신나가 담긴 약수통과 라이터가 놓여있었다. 명치에 압통이 엄습하면서 울음이 컥 터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신나를 관 위에 뿌렸다. 다섯 걸음쯤 뒤로 물러나 라이터를 내던졌다. 드라마틱하게 버섯구름이 터지지는 않았다. 게르 앞 모닥불처럼 천천히 관이 타들어갔다. 이를 악물고 눈물도 참았다. 한참이 지나고 불길이 잦아들었다. 이제는 그가 사라졌겠지 싶어 다가가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모서리만 살짝 그을린 채 관은 건재했다. 이 정도 애도로 그를 잊기에는 태부족이었던 것이다.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홍수로 박살난 댐처럼 엉하고 울음을 놓아버렸다. 마치 세살바기처럼 나는 버둥대며 통곡했다.
세살바기 같지만 그래도 나는 서른살바기이다. 서른 살만의 장점이 있다. 보통 그 때쯤에는 깨닫는다. 죽도록 사랑했던 연인도 이별하고 10년 지나면 희미해진다는 사실을. 한참을 울고 났더니 머릿속이 비워졌다. 한동안은 창자 끊어지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겠지. 몇 번이고 환상 속에서 이별 여행을 떠나겠지. 그래도 언젠가는 잊혀질 거야. 그리고 미래에는 이번보다 환상적인 여행이 펼쳐지겠지. 눈물로 귓바퀴가 멍멍해지면서 슬슬 잠에서 깼다. 내 방 암막 커튼 그리고 눈꺼풀 틈새로 무언가 들어오고 있었다. 사랑이 떠났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경외. 아침의 빛이었다.
최서영
사랑과 창작에 자격은 필요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여자 사람, 진짜 원하는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자 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조창현
안녕하세요. 글 잘보았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최서영
저는 막상 써놓고 오그라들어서 읽지도 못하겠네요. ㅎㅎ 재밌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김트루
같은 여행으로도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니. 아직 해보지 않은 이별 여행의 무게를 간접적으로 느껴보네요. 어쩌면 겪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언젠간 겪을 그 여행을 위해 지금부터 사부작사부작 짐을 싸놓고 준비해보려합니다.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최서영
이별 여행보다는 사랑의 여행을 만끽하셨음 합니다. ㅎㅎ 이번 글은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생각하며 써봤는데 오그라들어 못 읽겠네요. ㅠㅠ
의견을 남겨주세요
작은방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느낌이에요. 글을 읽으면서 저도 환상 여행을 다녀 온 것 같아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최면술사 유튜브도 있군요😮)
최서영
읽는 동안 재밌으셨다니 보람차네요!! 댓글은 힘이 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월간 사생활
서영 님 글은 유독 더 강한 개성이 담긴 것 같아서 늘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날 것에 가까운 생각을 그대로 글로 담아내시는 그 작법을 전 개인적으로 몹시 좋아합니다. 한 편으로는 난해한 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담긴 공감이 서영 님 글만의 독보적인 매력 같아요. 앞으로도 늘 기대하겠습니다.
최서영
제가 가진 건 날것이라는 것밖에 없는데 요새 그 부분도 닳아버리는 기분이에요. 참 힘드네요..ㅎㅎ 다음글도 빨리 마감쳐야하는데 바쁘네요.. 응원과 모임운영 항상 감사드립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서영📓
먹먹해져서 어떤 댓글을 달아야하나 고민이 되던 글이었어요. 제가 그 꿈속에 놓여졌다고 생각하면 견딜수 있었을까 하는 잊고 있던 유한함에 대해 떠올리게 했던 글입니다. 같은 주제로도 이렇게 다양한 글이 나오네요. 신기한 경험입니다!
최서영
맞아요. 항상 다른 분들 글에 놀라곤 한답니다. 제가 낼 수 없는 분위기와 발상이 너무 신선해서요. 이런 게 단체로 글 쓰는 묘미겠죠!! 응원 감사드립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고래
작가님께서 하신 여행을 함께 따라가게 되었어요. 가본 적 없는 타이베이와 아차산의 전경이 보이는 호텔이 어떻게 이렇게 제게도 선명하게 보일까요, 작가님의 글 덕분에 저도 못 가본 곳을 가보았네요. 그리고 글이 맺어지기까지 작가님께서 느끼셨을 망망한 그리움에대한 마음이 저에게도 느껴저서 가슴이 뭉클했어요.. 너무 너무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최서영
누구나 이별하고 찌질대는 순간들이 있겠죠? 아직은 전 사람을 다 보내지 못해서 가끔 이별여행을 떠난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별 여행 말고 사랑의 여행길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JR
와 유투브로도 최면이 가능하군요! 저도 소설 한 편을 후루룩 읽은 기분이에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최서영
피드백 감사드려요. 읽는 분이 계신 것만으로도 힘이 난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