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스치는 수많은 공간들 중에서 내가 가장 신경 쓰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숙소’다. 호텔보다는 호스텔이나 백팩커를 선호하는데, 기분 좋게 씻을 수 있는 적당한 수압에 따뜻한 물, 침대에는 벌레가 없어야 하고 과하게 삐걱대지만 않으면 된다. 까다로운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주로 그 도시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 10위권 안에 들면서 리뷰가 좋은 곳들, 그 중 하나가 나의 선택을 받는다.
누군가와 방을 공유하면서 살아 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도 나는 도미토리가 불편하지 않다. 보통 불편한 경험은 숙소의 형태보다 같이 묵는 사람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배정받은 2층 침대는 쾌적하고 냉난방도 적당해서 행복하게 잠들어 있는데 바로 아래 침대에서 누군가 섹스하는 소리를 들으며 새벽에 강제로 깨는 경험 같은 것. 하. 이런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주로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 도미토리 이외에 다른 옵션을 고려한다는 것은 숙박에 꽤 예산을 써야 한다는 뜻이라 나는 여전히 호스텔을 찾는다. 불쾌한 기억만큼 즐거운 경험이나 재밌는 우연도 다 사람이 모여있는 곳에서 생겨나고, 또 그곳에서 우연히 접하는 정보들이 그 여행을 완전히 바꿔놓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이상하게 자리 잡은 ‘파티’ 게스트하우스 문화를 선호하지 않아서 꼭 파티가 없고 조용한 곳으로 찾아간다. 친구들과 여행을 할 때는 성향을 고려해서 호텔이나 에어비앤비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혼자 가는 여행이라면?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젠 백발백중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같은 방에서 잠들 생각을 한다.
숙소는 단순히 씻고 자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 항상 흥미로웠다. 아무리 좋은 숙소를 예약해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쾌한 경험을 할 수 있고 아무리 저렴한 곳을 예약해도 의외의 즐거움과 마주친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추천도 그 사람이 함께 머문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동일하게 작용하지 않고, 끝내 주는 조식도 아침잠이 많은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서비스가 아닐 수 있다.
각자가 원하는 이상적인 숙박의 모습은 다르다. 이상적인 여행의 모습 또한 각기 다르다. 물론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이런 흐름으로 작동하지만.
적당한 숙소만 고르고, 또 가능한 반경 안에서 맴도는 목적 없는 방문이 이어졌다. 꼭 무언가 하고 싶어서 가는 경우보다는 일단 훌쩍 떠나고 싶어 비행기에 올라타는 때가 더 많았다. 골목을 걷고, 동네 고양이와 인사하고, 동네 사람들이 좋아하는 빵집에 가는 일을 즐거워하는 알맹이 없는 사람이라, 대부분의 여행은 평화롭고 평탄해서 평범하기까지 했지만 나에게는 항상 즐거웠다.
분명 즐겁긴 했다. 딱히 인생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멀리 떠나 차분히 쉬고 돌아오는 일정만 반복하던 어느 순간, 더는 여행만으로는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이럴 수가. 이게 말이 돼? 내가 여길 어떻게 왔는데. 여전히 내 안에 스트레스가 있어. 돌아와서도 자꾸 의식하다 보니 지하로 꺼져가는 자존감에 몸서리치면서, 나는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빠르게 성취감을 주는 경험이 필요했다. 설령 돈만 내면 딸 수 있는 자격증일지라도 무언가를 얻고 싶었다. 헛되이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어릴 적부터 막연히 ‘해보면 좋겠다 리스트’에 있었던 스쿠버다이빙 코스를 알아봤다. 일주일 후로 항공권을 예약했다. 그리고 내 여행의 반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구글맵으로 세계여행도 해볼 수 있는 시대. 원하는 나라, 원하는 도시의 모습을 언제든 볼 수 있는 시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의 대부분이 그 안에 있다. 묵었던 호텔, 갔던 장소를 떠올리면서 사람들은 디지털 세계여행을 떠났다가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올 수도 있다. 언제든. 눈으로 담았던 것들을 비슷하게나마 다시 볼 수 있다. 언제든. 눈으로 담았던 것들을.
그런데도 나는 온갖 장비를 직접 몸에 매달았다. 버거웠다. 태어나서 처음 오리발도 했다. 강사님이 계시니까 죽지는 않겠지 하는 강한 믿음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나는 수영을 못한다. 바다에 글자 그대로 ‘뛰어드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수면 아래와 만난 것도. 3미터, 5미터, 10미터 그리고 15미터쯤 내려갔을까.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내 숨소리만 부르륵. 들려온다. 서투른 다이버가 그 어떤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눈앞에 현란한 풍경이 펼쳐졌다. 별천지. 신세계. 새로운 세상. 인투디언노운. 거기에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다른 세상과 삶들이 있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의 경험은 너무나 강렬해서 매 순간이 놀라웠다. 작은 물고기들이 주위를 맴돌고, 아름다운 산호가 꽃밭처럼 각양각색의 모양과 색상으로 펼쳐진 모습. 물 속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들이 나를 휘감았다. 이런 게 있었어. 끽하면 평생 모를뻔했어. 같은 곳을 두 번, 세 번 들어가면 조금은 눈에 익은 모습들도 보인다. 그 동네에 사는 물고기는 어떤 모습인지 익숙해진다. 짧은 오픈워터 교육을 받고 자격증으로 성취감만 얻으려 했는데, 물에 뛰어든 나의 시야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당연히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곳을 볼 수 있다고 깨달았을 때의 감각. 항상 편안한 곳, 조용하지만 아기자기한 동네의 예쁜 골목을 찾아 헤매는 여행을 했는데. 여기구나. 물속은 편안하고 고요하고 예쁜 꽃밭으로 가득했다.
무언가 완전히 뒤집혔다.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곳, 때로는 직접 가본 경험보다 타인의 여행기가 훨씬 더 좋은 곳들이 있어 여행지를 고르는 것도 막막할 때가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행복하지만 그게 여행의 주된 목적이 아니기를 가끔은 바랐다. 겉으로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몸을 던져 들어가면 알 수 있는 곳이 눈앞에 있었다. 인생의 공간이 확장되는 경험. 삶의 지도에서 영원히 깜깜할 줄 알았던 부분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제 더 이상 숙소를 보고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 다녀왔다는 바닷속을 찾는다. 나도 저기 가면 저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뭐. 못 보면 어때. 거기에 오롯이 존재하는 또 다른 삶을 구경할 수 있는데. 당분간은 떠나지 못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바다를 그리워한다.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감각으로. 내 몸 전체를 움직여 갈 수 있는 나의 새로운 여행지를.
잉여인간 JR.
항시 혼란한 마음을 조악한 글로 꺼내어 근심을 덜어내면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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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
저는 수영을 못 해 탐험해보지 못한 세계인데, 완전히 뒤집혔다는 표현이 탐험하지 못한 그 세계를 상상하게 해주신 것 같아요. 숙소를 중요시 여겼던 편인데 다른 차원의 여행을 이 글을 통해 선사해주신 것 같아요. 매번 해보고싶다고만 생각했던 스쿠버다이빙. 지난번 트루님이 묘사하신 바다와 또 다른 면모를 지닌 바다. 그런데 묘하게 닮은 점이 많은 글이네요. 인간은 바다를 동경하지 않을 수 없나봐요!
JR
스쿠버다이빙을 경험하고 다시 하지 않는 분들도 계신데, 저는 수영을 못하지만 바다를 좋아해서인지 그 속에 들어가서 생각지 못한 예쁜 풍경들을 보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 저처럼..수영 못해도 할 수 있답니다 서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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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풍덩 빠지신걸 축하드려요 ㅎㅎㅎ저도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고싶었지만 비용때문에 보류중인데.., 멋있어요! 스쿠버다이빙은 한번 하고나면 빠져나오기힘든것 같아요. 당장 바닷속으로 몸과 마음을 담구고싶어지는 글이였네요, 앞으로도 바다 곳곳 자유로이 유영하시기를 바라요🌸
JR
비용을 무시할 수 없지요 저도 큰맘 먹고 갔었는데 이렇게 되었네요..필명으로는 저보다 훨씬 더 스쿠버가 잘어울리시는(?) 고래님도 언젠가 수중세계를 만나보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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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바닷속 사진은 직접 찍으신 건가요?? 물을 무서워하는 저에게는 스쿠버 다이빙은 궁금하지만 쉽지 않은 도전이네요...ㅜㅜ 그런 저는 좋아하는 스타일로 꾸며진 숙소를 찾아 떠날 준비를 한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JR
사진은 다른 분이 찍어주셨어요! 저랑 잘 맞을 뿐 꼭 스쿠버다이빙이 가장 좋은 건 아니니까요! 조이님은 조이님만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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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트루
저는 바다를 오직 밖에서 관망(?)하며 위안과 행복을 얻는데 반해 바다 안으로 들어가셔서 색다른 경험을 즐기신다니 정말 놀랍네요:) 멋지십니다..!
JR
저도 주로 그랬는걸요! 바다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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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영
숙소에 대한 이야기가 와닿네요. 저도 항상 도미토리를 애용해요. 고를 땐 신중히 고르지만, 어딜 골라도 나름의 즐거움과 맞닥뜨리죠. 불편하고 찜찜했던 기억도 결국 아름답게 채색되고요. 정적인 여행을 향유하다 바다라는 미지의 공간으로 훅 뛰어들게 된 이야기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인생의 지도에서 깜깜할 줄만 알았던 곳에 불이 탁탁 들어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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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방
저도 혼자 갈 때는 도미토리가 좋더라고요. 우연을 만들수도 있고요. 몇몇 문장에서 여행취향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스쿠버 다이빙 너무 멋지네요. 해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해봤거든요. 뒤집혔다는 표현에서 꼭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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