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사람

[월간 사생활] 01. 나의 사적인 공간, 집

2021.03.15 | 조회 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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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생활

지극히 사적인 공간 속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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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 한 마리와 혼자 살고 있다. 혼자 사는 이 집에서 집이 곧 ‘나’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달팽이의 집에 달팽이의 생명을 유지하는 주요 장기가 들어있듯이 나의 집에도 내 삶이 들어있다. 일과 생활, 안락함과 고양이 그리고 나 자신까지 이 작은 집 속에 다 들어있다. 나와 교류하고 있는, 그러니까 이곳에 다녀간 모든 사람들의 흔적도 이 집 어딘가에 조금씩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 ‘뇌 구조 그리기’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만약 지금 나의 뇌 속을 그려본다면 우리 집의 내부와 다를 게 없을 것 같다. 이 집에서 침대와 책상이, 고양이와 안락의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내 뇌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지분과 일치하지 않을까.

가끔 사람들에게 공간을 잘 가꾼다는 말을 듣는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사용하는 공간에 일관된 느낌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고양이는 그때그때 가장 아늑하고 안전한 장소와 시간을 발견하는 재주가 있다고 하는데 아마 나에게도 그런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재능이 그렇듯 나의 재능도 필요로 인해 생긴 것이다. 불안이 많고 긴장을 잘하는 탓에 아늑한 자리를 알아보는 감각이 발달한 것 같다. 자기 자리에서는 느긋한 고양이도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면 겁이 많아지는데 나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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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공간이나 자리에 유별난 애착이 있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주방 한켠에 있던 식탁 밑에 내 공간을 따로 만든 적이 있다. 그 당시 우리 집 식탁에는 길게 늘어진 체크무늬 식탁보가 둘려있었는데 나는 그 밑으로 들어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형제가 없어 꽤 어린 나이 때부터 방을 혼자 썼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것인지, 종이상자 같은 것을 구해서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 가 책상이라며 팔을 괴고 앉아 있곤 했다. (그때부터 책상을 좋아했다, 책상을 사용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한동안 그곳을 진짜 내 방이라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을 한참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다시 생각이 나서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에 내가 식탁 밑에 내 공간을 만든 걸 알고 있었냐고. 엄마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엄마의 기억이 흐릿해진 것인지 내가 고양이처럼 잘도 숨어있던 것인지(나는 항상 조용히 사고를 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는 모르겠지만 식탁 밑에 있었던 내 방의 존재는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인상적인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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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간에 대한 유별난 애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간을 혼자 쓰는 내 집이 생긴 건 최근의 일이다. 화장실을 비롯한 모든 공간을 오로지 나의 편의에 맞추는 일은 삶에 안정을 가져왔다. 내가 비로소 1인분의 삶을 살고 있는 어른이라는 실감도 그제야 들었다. 어딘가에 나를 위한 은신처가 있다는 사실은 바깥의 많은 일들을 견딜만하게 해 줬다. 어린 시절 주방의 식탁 밑에서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도 아마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자신을 실내형 인간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혼자 살 게 된 후로 더욱더 집에서 모든 것을 하고 있다. 혼자 잘도 지내고 있다. 고양이 한 마리와 몇몇 식물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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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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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트루의 프로필 이미지

    김트루

    0
    over 4 years 전

    1인가구가 늘어난다는 뉴스를 보면서 저와는 정말 먼 이야기라고 느꼈던 적이 있어요. 저는 평생을 단 한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인지 이번 글은 집들이에 초대되어 구경하는 듯한 느낌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특히나 고양이와 함께라면 정말 행복할 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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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의 프로필 이미지

    서영📓

    0
    about 4 years 전

    글 읽으면서 잠깐이지만 혼자 자취했을 때가 떠오르더라고요. 저는 결혼을 해서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되어버렸지만 분명 그 짧은 기간에 얻은 영감과 에너지가 지금도 남아있어요. 작가님께도 지금 그런 시간이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가님 그림 너무 귀여워요. 인스타로 맨날 염탐한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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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서영

    0
    about 4 years 전

    실내형 인간이라는 워딩이 좋네요..ㅋㅋ 코로나 이후로 내 공간이 부쩍 중요해지는 거 같아요. 사실 고양이와 안락한 내 공간만 있으면 여남은 것들은 딱히 필요없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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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래

    0
    about 4 years 전

    저도 고양이 두마리와 살고있어요....🤭 고양이 한마리와 몇몇 식물과함께라니, 정말 ..이미 완벽한 작가님의 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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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R

    0
    about 4 years 전

    1인분의 삶을 살고있다는 느낌 참 재밌고 요상하지요. 저도 고양이를 키우는데 병원에 데려갈 때마다 제가 어른이 되어 다른 생명을 책임지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집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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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ANA

    0
    about 4 years 전

    달팽이 집에 관한 표현과, 고양이가 안락한 곳을 찾듯이 나 또 한 그렇다는 말이 너무 많이 와닿았어요. 저도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고, 안락한 공간을 꾸리는 것을 계속해서 원하고 있거든요. 저는 독립을 못해서 어떻게든 제 한정된 공간에서 안락함을 찾고 있는데 혼자만의, 아니 고양이와 몇몇 식물들과 함께하는 은신처가 너무나 부럽고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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