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34. 마흔 일기 / 칭찬

어른스러웠던 아이는 커서

2024.02.29 | 조회 952 |
0
|
아주 사적인 마흔의 프로필 이미지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2월의 마지막 날 편지를 보냅니다. 드디어 방학이 끝나가요. 여러 의미로 기다리던 3월입니다. 

인스타그램에 제 갑상선 암의 존재를 고백하고 난 후 뉴스레터 구독자가 스무 명 정도 늘었습니다. 오늘 글과도 관련있는 이야기인데 저는 기쁨을 누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 벌써 그분들이 제 편지를 받고 실망해서 떠나는 상상을 했어요. 

지금까지 구독료 환불을 요청한 분이 딱 2명 있는데 저는 그 알림을 볼 때마다 매번 뉴스레터를 접고 싶은 충동을 느꼈거든요. 두렵고 두려운 마음을 모른척하고 이번 편지를 보냅니다.

구독자님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34. 마흔 일기 / 칭찬

어른스러웠던 아이는 커서

 

 

삼 일째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따뜻해진 날씨에 놀이터에 갔다. 아마도 비슷한 마음으로 물기 없이 뽀송한 모래를 기다리며 집안에서 방학을 보내고 있었을 아이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둘째 유치원 졸업 후 오랜만에 만난 동네 엄마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아이가 노는 곳 근처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 안건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이 한글 떼기였다. 한글에서 학습지, 공부방과 독서로 넘어간 주제는 어찌어찌 흘러 내가 쓴 책까지 다다랐다.

동네에 내가 뭘 하는지 아는 사람도 몇 없는데 번호도 공유하지 않은 한 아이의 엄마가 대뜸 책 잘 읽었다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언제나 그렇듯 손사래부터 쳤다. 자기 비하는 덤이었다. ‘작가인 줄 몰랐어요. 대단한 분이 우리 동네에 있었네요.’라고 비행기를 태우면 에이, 아니에요. 바쁘고 돈 안 되는 일이죠. .’낙하산도 없이 서둘러 뛰어내린다.

가뭄에 콩 나듯 외모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면 더 안절부절못한다. 그럴 때는 주로 내 노안이 도움이 되었다. 책에 너무 예쁘게 나왔다는 얘기에 사진작가님이 찍어주는 건 역시 다르더라 너스레를 떨었다. 살이 좀 빠졌냐 예뻐진 것 같다는 말이라도 들을라 치면 평생 노안으로 살다 보니 드디어 마흔에 제 나이를 찾았나 보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치 창과 방패처럼 그 어떤 칭찬을 해줘도 자기 비하로 받아칠 자신이 있었다.

"앞머리 잘랐어요? 어려 보여요. 잘 잘랐다."

"갑자기 오늘따라 너무 못생겨 보여서 화장실에서 제가 가위로 그냥 잘랐어요. 하하."

대부분은 다들 내 시답잖은 반응을 웃어넘겼지만, 간혹 그런 내 자기 비하를 당황스러워하던 사람도 있었다. 있는 사람의 자기 비하는 유머라던데 가볍게 던진 칭찬을 질색하고 거절하는 게 안쓰러워 보였을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람 앞에서 어찌나 창피하던지. 웃기고 싶었나 보다. 칭찬을 받을 바에야 웃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편했으니까.

 

나는 칭찬이 어색하다. 정확하게는 칭찬까지는 그럭저럭 듣는데 그걸 소화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좋게는 겸손이고 나쁘게는 기쁨의 순간을 제대로 누릴지 모른다. 예전에는 생일도 몸 둘 바를 몰라 괴로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뻐하고 선물까지 주다니. 너무 불편해서 불행하기까지 했다. 내 해결책은 생일을 나를 위한 날이 아닌 낳아주신 엄마에게 감사하는 날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꽃을 보내고 감사하는 날로 생각하니 그제야 편해졌다.

책이 출간된 후에도 진심으로 기뻐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 축하해 주는 것도 쑥스러워 도망쳐 다녔고, 알리고 팔아야 하는 다음 단계 업무에 치여 마감과 출간의 기쁨을 반나절도 만끽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듣고 자란 맏딸은 점잔 빼고 재미없는 어른으로 커버렸다. '희정이는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워.' '희정이한테는 어린데도 이상하게 별별 얘기를 다 하게 되네.' 동갑내기 사촌은 아이들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 나만큼은 어른들 식탁에 앉을 자격을 얻었다. 어리지만 어른스러웠으니까. 나대지 않고 침착했으니까. 믿음직스러웠고 잘 참았으니까. 하지만 잘한다 칭찬해 준 엄마와 주변 어른들 탓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육아가 어려운 것이다. 잘한다 해도 지랄 못 한다 해도 지랄. 키운 대로 자라기는커녕 어떻게 자랄지 종잡을 수 없다.

 

언리밋에서 알게 된 소중한 인연의 작가님 한 분이 계신다. 자기를 꼭 닮은 그림을 그리는 귀여운 은정 님. 언리밋에 참가하면 3일 내내 혼자 부스를 지켜야 해서 정신없이 바쁘지만, 인사도 할 겸 잠시 짬을 내서 작가님 부스로 갔다. 사람이 워낙 많았던 터라 머리와 머리 사이로 팔을 넣어 빠르게 그림 카드 몇 장을 골랐다. 긴 대화를 할 여유는 없었지만 공들여 준비한 게 보여서 애썼다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이걸 다 어떻게 준비했어요. 너무 고생하셨어요. 힘들었겠어요.”

". 저 진짜 열심히 했어요."

평범하고 짧은 그 대답이 계절이 지난 지금까지 잊히질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사람의 말을 담아두는 아주 커다란 수납장이 있는데 약장 크기의 작은 서랍이 끝도 보이지 않게 빼곡하다. 나는 매일 사람들의 말과 글을 채집해서 이 서랍을 채운다. 서랍에 한 번 들어간 말은 지금까지 밖으로 나온 적이 없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나를 키우고 위로하고 상처 내며 산다.

누군가 건넸던 고마운 말 한마디가 한 번 서랍 안에 담기면 나는 그 사람이 내 뒤에 칼을 꽂아도 여전히 그 말이 고맙다. 날 아프게 한 사람의 한마디는 여러 해가 지나고 잊히지 않고 잠 못 드는 밤이면 슬며시 서랍을 열고 밖으로 나와 소란스럽게 활개 친다. 그날 들었던 작가님의 대답도 작은 종이에 꼭꼭 눌러 적은 후 두 번 접은 종이에 담겨 서랍 한 칸을 차지했다.

'. 저 진짜 열심히 했어요.'

어른스럽고 솔직한 대답이었다. 수고를 인정해 본 적 없는 내 자기 비하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사실 그대로였다. ‘그래, 나 진짜 열심히 했지.’ 아마 나는 혼자 술을 마실 때, 그것도 속마음으로나 해봤으려나. 누군가의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이렇게 멋진 것이었구나. 나이를 물은 적 없지만 아마 나보다 어릴 게 뻔한 은정 님의 간결한 대답을 듣고서 잠시 나이 탓인가 고민했다. 젊은이들이랑 억지로 어울려 보려는 노인네처럼. 그거 어디 가면 배울 수 있으려나 옆에서 어슬렁거리다 그들의 솔직함에 물들고 싶다.

 

 


 

겸손하지 않은 그 담백한 대답은 어느새 제 작은 목표가 되었어요.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진심으로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어색할 것 같아서요. 지금 당장은 솔직함이 주는 멋짐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답니다.

'자기 비하는 제일 고급 유머에요.'라는 대사는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 나와요.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영상을 첨부합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자기비하는 할지언정 자기애와 자존감은 밑도 끝도 없이 높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네요. 흐흐흐.

또 편지 할게요.

24. 2. 29.

희정.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아주 사적인 마흔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