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33. 마흔 일기 / 암(1)

놀랍도록 아무렇지 않은

2024.02.07 | 조회 1.0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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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벌써 2월이 되었네요. 저의 새해는 갑상선의 안부를 신경쓰느라 정신없이 흘러간 것 같습니다.

전 평소 아픈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제 책장의 어느 부분은 이 사람 혹시 우울증인가 혹시 치매인가 암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 환자 혹은 의사의 입장에서 쓴 책들이 많아요. 하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에 비해 병에 무관심한 편입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질병 두세 개쯤은 있고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1월에 갑상선 유두암 진단을 받았고 그때부터 일기처럼 쓴 글을 보냅니다. 어제 수술 날짜를 잡고 온 것까지 썼어요. 총 2편으로 보내게 될 것 같은데 그 이후 이야기는 수술이 끝난 4월쯤 다시 보내겠습니다.

그럼 이만. 구독자님 건강하세요!

 


 

33. 마흔 일기 / 암(1)

놀랍도록 아무렇지 않은

 

📑 24. 1. 21

며칠 전 목 안에 있던 작은 결절 조직 검사를 끝내고, 나는 바로 다음날 마실 술 생각부터 했다.

만에 하나 암이라면 당분간 술을 못 마실 테니 당장 맥주 한 캔을 따야겠구나. 암과 술을 함께 연상하는 것이 대책 없는 주정뱅이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당연한 수순이었다.

임신 중일 때 참았던 진한 커피 한 잔과, 모유 수유 중일 때 먹지 못한 빨간 떡볶이 한 접시처럼 몸의 변화로 무언가 금지당한 기억부터 떠오르는 것이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암과 짝지어 생각하니 매일 매끼가 소중해진다. 습관적으로 먹던 것들을 되돌아보는 고 후회하는 대신, 몸에 좋은 것과 해로운 것 모두 먹을 수 있을 때 기쁘게 누릴 작정이다.

어제는 오이를 얇게 썰어 넣은 잔에 헨드릭스 진을 마셨다. 남편이 레시피를 보고 열심히 재워두었으나 구울 때는 홀랑 태워먹은 돼지 목살과 함께 아주 소중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이틀 뒤면 검사 결과가 나온다.

 

 

📑 24. 1. 24 

“내가 미리 언질을 줬었죠.” 

암이라는 뜻이다. 모양이 좋지 않다 정도의 복선이 암일 거라는 뜻인지는 몰랐지만. 

갑상선 유두암이라고 가장 예후가 좋은 암이라고 했다. 유두는 목 아래 있는데 왜 목안에 있는 암 조직의 이름이 유두일까. 잠깐이지만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수술을 해서 갑상선 절반을 떼어내는 것과 고주파 치료가 있는데 선택은 내 몫이라고 했다. 의사는 설명을 이어갔다. 암에 대한 설명은 아니었다. 주로 실비와 보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주파 치료가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실비 보험 서류는 떼어줄 수 없다고 했다. 속으로 대체 얼마길래…라는 생각을 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수술이든 치료든 어차피 여기서 하지는 않을 테니까. 

“저 정도의 크기와 모양이면 보통 어떤 방법을 택하나요?” 

“얘기했잖아요. 선택은 본인의 몫이라고.” 

딱 하나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봤으나 얻은 건 없었다. 돌아가는 길 갑상선 암 카페에 가입해야겠다. 다시 정보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할 때다. 블로그를 찾아보니 어느 파워 J의 포스팅이 눈에 띄었다. 포스팅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당황할 시간 없어요. 한국인은 8282’ 

아- 정말이지 유쾌한 민족이야. 

우선은 공동 운명체인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하나카드 결제일 지났는데 아직 못 빠져나갔다는 걸 알리고 보험 연체를 알리는 메시지도 복사해서 보냈다. 내 검사 결과는 우리 부부가 처리해야 할 여러 공지사항과 함께 전달 됐다. 마치 세탁세제가 떨어졌다는 이야기처럼 일상적이었다.

 

📑 24. 1. 24

저녁으로 찜닭을 했다. 이럴수록 건강하고 맛있는 걸 먹어야지. 감자랑 당근, 양배추를 넣고 수프를 끓이듯 푹 고았다. 국물을 넉넉하게 해서 밥 위에 부어 먹을 생각이다. 

퇴근한 남편이 기다란 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회사 사람에게 소곡주를 받아왔다고 한 잔 하잔다. 그것도 원래는 회식에서 먹을 것을 회식이 미뤄져 자기가 가져왔다는데 그래서 잘 되었다는 건지 자랑을 하는 건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안 됐다. 

저녁으로 찜닭 해놨으니 먹자고 했더니 얼씨구 뭐 시켜 먹잔다. 

“아니, 뭐 축하할 일 있어? 뭐 파티할 일 있냐고.” 

순간적으로 암의 원인이 스트레스라면 그 스트레스의 9할은 당신이라고 소리치려는 걸 참았다. 이 사람이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와이프가 암 진단을 받은 저녁에 이럴 수는 없다. 함께 산 지 올해로 12년이 되어가는데도 아직 저 사람을 다 알기엔 짧은 시간이었나 보다. 

하늘은 잘 울지 않는 나에게 울보 딸을 주셨고, 걱정이 많은 나에게 대수롭지 않아 하는 남편을 주셨다. 그런 이유가 있겠지. 이것도 합이라면 잘 맞는 거겠지. 사는 동안은 최대한 잘 지내보다가 나중에 하늘에 올라가 꼭 물을 작정이다.

남동생은 주변에 물어 괜찮다는 병원과 경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톡으로 보내온다. 오늘 검사 결과 나오는 걸 아는 지인은 걱정 말라는 내 말에 어떻게 암인데 걱정을 안 하냐고 운다. 

내가 바란 공감과 위안을 어째서인지 집 밖에서 얻는다. 그러한 까닭에 담담했던 내 진단명이 갑자기 서글퍼졌다. 나는 진짜 괜찮은데 당신은 좀 휘청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려다 목구멍에 억지로 치킨과 소곡주를 밀어 넣고 먼저 일어났다.

 

📑 24. 1. 25

원래 계획되었던 오늘 일정은 양해를 구하고 취소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 내 상태가 촉각을 다툴 정도로 급한 상황은 아니지만 아직 엄마한테 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걸 알리지 못하는 게 가장 마음에 걸린다. 거짓말에 재능이 없어서 수능 앞두고 마시는 100일 주도 차라리 허락을 해달라 대놓고 얘기했는데 이런 건 처음 빨간 비디오를 보고 끙끙거리던 그날이랑 비슷하달까. 아무튼 찝찝했다.

그러니 오늘은 공식 ‘검색의 날’이다. 빨리 대학병원에서 의견을 듣고 치료 과정에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힐 때 말씀드릴 생각이다.

오늘의 목표는 병원과 교수님을 선택해 초진 예약을 잡는 것.

서울에 있는 건너들은 유명한 병원 리스트를 정리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안 그래도 잘 걸렸다 요놈. 지방 사는 사람들은 아프지도 못해! 지하철 타고 가면 되는 병원을 여기서 가려니 아주 그냥 여행이야! 외래를 다녀야 하니 가까운 데로 가라는데 대체 여기 가까운 데가 어디 있냐 주절주절 신세한탄을 가장한 원망을 퍼부었다.

남편 따라 지방에 내려오기 전 우리 신혼집은 택시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대학병원이 세 곳이나 있었다. 후회한 들 뭐 하나 이제는 내려와 산 시간이 더 긴 걸.

암 병원 선택을 이렇게 해도 되나 싶었지만 나는 갑상선으로 유명하다는 병원의 위치부터 봤다. 강북삼성은 종로에 있으니 진료받고 반나절 그 근처 산책만 다녀도 좋겠네 합격. 강남 세브란스는 시외버스 타고 올라가기는 편한데 역에 내려서 또 셔틀 타야 하네 멀미 파티겠구나 불합격.

중학교 때도 문제집도 표지 디자인 보고 골랐는데 내 독특한 기준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했다. 갑상선 수술만큼이나 긴 여정의 순간순간도 중요하니까. 가능하다면 오가는 날들이 괴롭기보다 조금은 설레었으면 했다. 이런 것으로 병원을 선택하는 것이 이상한 걸까.

 

📑 24. 2. 1

내일은 용인 세브란스 초진 예약 날이라 오늘은 조직검사를 했던 병원에서 슬라이드와 서류를 받으러 갔다. 내일 내가 근처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 반차를 낸 남편이 데리러 올 계획이었다. 아이 하원 시간 전까지 올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정 안 되면 40분 거리에 사는 아버님이 와주신다고 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아버지는 낼 일 생기셨다고. 그래서 진아는 어쨌든 우리가 픽업하는 걸로. 혹시 우리 늦을 수 있으니 5시 데리러 가는 걸로 하고 그것도 안되면 누구한테라도 부탁해야 할 거 같아요.

남편에게 이 카톡을 받고 나서야 내가 버스표를 사두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서둘러 들어가 봤지만 당연히 모두 매진. 세상에 이런 멍청이가 있나. 병원 예약 날짜 정해지자마자 표부터 샀어야지. 무슨 정신으로 살고 있는 걸까.

마치 내 인생 같았다. 온갖 거 다 챙기다가 정작 자기는 못 챙기는. 온갖 거 다 신경 쓰다가 자기는 스트레스로 암에 걸려버리는 병신 같은 인생. 저번에 시가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을 때는 도울 게 있으면 언제든 오겠다 하셨으면서 그 사이 무슨 약속이 생겼을까. 며느리 병원에 가는 동안 손주들 봐주는 것보다 중요한 약속이 뭘까. 대체 왜 남편은 버스표는 샀냐 그거 한 번을 물어보지 않는 걸까. 여행 가면 나는 남편의 런닝과 팬티까지 챙기는데 왜 내 일을 함께 해주고 챙겨주는 사람은 없는 걸까.

다 내가 보살핌 받지 못해 이렇게 된 거다. 이게 바로 암 환자의 우울이다 이것들아. 나를 뺀 모두를 멱살 잡고 원망하고 싶었다. 진단 후 처음으로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았다. (하지만 울지 않지) 사실 안 다. 이건 다 핑계라는 걸. 내 실수고 내 탓이다. 그래도 짜증 나는 이 감정을 탓해야 한다면 암을 원망해야지 어쩌겠나.

 

📑 24. 2. 2

내가 찾아가는 과는 갑상선 암 병동. 2층 가장 안쪽에 있었다. 가는 길에 보이는 진료과 중 어디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어 보였다. 어디 하나 안타깝지 않은 이름이 없다. 퇴행성뇌질환센터, 혈액종양내과, 소아심장과 이 병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병의 경중과 상관없이 삶의 한 구간에 비슷한 주름 같은 것이 생겼을 것이다. 

일찍 서둘렀더니 서류 제출을 끝내고도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잠시 앉아있을 곳을 찾아 내려갔더니 1층에 스타벅스는 이미 만석. 지하에서 내려가보니 프레즐이랑 크루아상 가게가 있었다. 검사를 위해 지금은 금식이라 그림에 떡이지만 만약 여기서 수술을 하게 된다면 매일 프레즐이랑 크루아상 번갈아 사 먹을 수 있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 매장을 둘러보면서 나도 참 꽤나 진지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 틈틈이 웃기는 생각을 할 때마다 확연히 깨닫는다.

선생님의 설명은 무척 상세하고 친절했다. 작은 사이즈라 지금 당장 수술이 급하지는 않다. 하지만 갑상선은 임파선 전이가 쉬운 편이다. 하지만 작은 사이즈의 암을 제거하기 위해 갑상선의 절반을 떼어내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수술 후에 평생 약을 복용하는 사람도, 3개월 만에 끊는 사람도 있다. 

“수술을 하든 안 하고 조금 더 지켜보든 개인의 선택인데 절 믿고 기다리거나 절 믿고 수술 하세요 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뒷 문장은 여지없이 앞 문장의 반대되는 이율배반적 이야기를 약 10분 정도 듣다 나왔다. 어느 쪽이라도 살짝 마음이 기울 법도 한데 반반이었던 마음은 50.5%와 49.5%의 비율로도 흔들리지 않았다. 선택의 바늘은 어디로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정확히 가운데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렵게 예약을 잡고, 온갖 서류와 슬라이드를 준비하고, 아이의 점심을 배달시키고, 남편이 반차를 내서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을 만났는데도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허무했다. 

 

 📑 24. 2. 6

두 번째 병원은 친정 집 근처로 골랐다. 혼자 와도 된다는 데 굳이 서둘러 일을 끝내고 온 엄마가 끝내 암 병동 앞 벤치에 있는 날 찾아냈다. 암이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동네 병원 결과를 어떻게 믿냐고. 여기서 다시 검사를 해보자는 엄마에게 슬라이드 조직을 여기에도 보냈으니 확인은 하겠지만 암이 아닐 확률은 없을 거라 설명했다. 사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았지만 내 말이 끝날 때마다 한층 더 어두워지는 엄마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서 혼자 오고 싶었던 거다.

엄마는 진료실에 들어가 의사에게도 재차 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엄마를 말리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자주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엄마를 위한다. 의사 선생님은 암 진단은 의심되는 단계를 1부터 6단계까지 나뉘며 지금 나는 6단계라고 했다. 확률로 치면 98%라고. 초음파 모니터를 엄마가 볼 수 있도록 돌려서 결절의 모양도 전형적인 암의 모양이라고 조금 남아있을 가능성도 친절히 삭제시켰다.

“갑상선이 유전이랬나? 아니라고 했던 거 같은데.”

“너희 친할머니가 갑상선 암이었어. 어디 물려줄 게 없어서. 으휴.”

집으로 돌아와 딸아이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며 엄마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물려줄 게 없어 암 따위를 물려주게 된 것은 친할머니뿐만이 아니다. 우리 딸은 건강검진 때마다 가족력을 묻는 질문에 엄마가 갑상선 암 수술을 했다는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우리 딸은 암 보장이 잘 되는 것으로 해마다 보험비를 내겠구나. 구태여 험한 진단명을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싶어 그저 혹이라고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지금은 사과를 할 수도 없다.

 

 

첨부 이미지

 


 

항암치료가 무척 괴롭다고 들었는데 제 경우에는 그런 치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수술 후에는 일상 복귀가 가능하다고 해서 저는 무척 담담하게 지내고 있어요. 

다가오는 명절 최대한 스트레스 받지 않고 무사히 넘기고 또 편지하겠습니다.

그래도 구독자님 건강검진은 꼬박꼬박 받기로 해요! 😉

 

24. 2. 7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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