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35. 마흔 일기 / 일희일비

너의 기쁨에 호들갑 떨어주는 사람

2024.03.08 | 조회 717 |
2
|
아주 사적인 마흔의 프로필 이미지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아마도 한 해 중 가장 바빴을 3월 무사하신가요?

저는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첫째는 고학년 대열에 합류했어요. 어제 첫째가 풀 4학년 수학 문제집을 새로 사면서 어렵다는 것을 골라봤는데 첫 단원 2장을 풀면서 한숨을 백 번 쉬던 녀석을 보며 아, 내가 헛꿈을 꾸었구나 아차 싶었답니다. 🤣

구독자님은 잘 웃고 잘 우는 편이실까요? 저는 그게 좀 어려워서 앞으로의 시간은 일희일비하는 사람으로 살아볼 생각이에요.

오늘은 새로 생긴 요즘 제 목표에 대해 썼습니다. 

 


 

35. 마흔 일기 / 일희일비

너의 기쁨에 호들갑 떨어주는 사람

 

 

 

시어머니가 귤 한 상자를 주시면 나는 ‘잘 먹을게요.’가 끝이었다. 너무 건조한가 싶어 한마디만 더 억지로 붙이면 ‘하나가 좋아하겠어요. 귤 먹고 싶다고 했는데.’ 정도. 같은 날 똑같이 귤 한 상자를 받은 시누이는 며칠 뒤 만난 시가에서 계속 귤 얘기를 했다. 어쩜 그렇게 달고 맛있냐며 집에 놀러 온 엄마들도 너무 맛있어서 어디 귤인지 궁금해하더라며. 며칠 만에 뚝딱 다 먹었다고 했다. 그렇지, 그거 맛있지. 달뜬 목소리의 어머니와 주방에서 한참 이야기가 오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주방의 화기애애에 합류해 애써 몇 마디를 더 짜내야 하나 고민하다 끼어들기 어색해서 그만 두었다. 하다못해 귤을 받을 때 목소리 톤이라도 조금 더 높였어야 했나. 혹시 무뚝뚝한 며느리 반응에 서운해하지 않으실지 썩 마음이 쓰였지만 태연한 척하면서. 

아마 나는 친정엄마가 귤을 보내주셨어도 똑같았을 것이다. ‘뭐 하러 보냈어요. 잘 먹을게.’ 한 마디가 전부였을 거다.

 

나는 선물을 줄 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이 어색해 주로 택배로 보낸다. 잘 도착했느냐 받았느냐 연락도 하지 않는다. 혹여나 생색내는 것 같을까 봐. 우리나라 택배 시스템이야 세계 최고 수준인데 당연히 잘 도착했겠지. 믿고 보낸 것 자체를 잊는다.

잘 받았다. 고맙다. 이상의 메시지라도 받게 되면 괜한 부담을 준 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가 생일을 챙겨줬어도 그 사람은 내 생일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지내줬으면 좋겠다. 그냥 받고 잊었으면 한다. 누가 말하길 너 좀 정상 아니라더라. (동감)

 

내가 받았던 선물 중 가장 큰 것은 친구가 준 노트북이었다. 그 친구도 공짜로 생겼다지만 공짜로 생긴 것을 공짜로 주는 게 어디 쉬울까. 난 그 큰 선물이 얼떨떨하고 과분하게 느껴졌다. 내 친구 성공했네 자랑스럽고 기쁘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 모든 감정을 빠르게 정리하고 내가 친구에게 건넨 말은 ‘고마워’ 뿐이었다는 게 문제다.

덜렁 노트북만 던져주면 컴맹인 친구가 제대로 활용 못 할까 프로그램까지 직접 깔아주던 그 다정한 녀석은 아직도 유선 마우스 쓰는 날 위해 자신의 무선 마우스까지 얹어 주고 갔다. 학교가 끝나면 수포자였던 날 앉혀 놓고 수학의 정석을 펼쳐 개인 과외를 해주던 고등학교 때의 그 다정함 그대로였다. 그런데 나는 무덤덤하게 던진 그깟 '고마워'한 마디로 괜찮았으려나. 당연히 아니겠지.

 

최근 들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는 입장으로 계속 지내도 되는지 의문스러워졌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내 주변 사람을 서운하게 만든 건 아닐까 새삼 나를 되돌아보는 중이다. ‘원래 이런 사람’이라니. 무조건 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건가. 때로는 이기적이고 어떨 때는 폭력적이지 않았을까 뒤늦게 반성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요즘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다. 새로 알게 된, 잘 웃고 잘 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한없이 너그러워졌다. 언니든 동생이든 나이와 상관없이 귀여웠다. 

딸기 케이크를 앞에 두고 그저 속으로 맛있다 생각하며 먹고 있던 나와 달리 눈이 2배쯤 커져서 정말 맛있지 않냐며 깜짝 놀라던 사람이 사랑스러웠다. 저이는 세상에 맛있는 것들을 입속에 넣을 때마다 지금처럼 행복해하겠구나. 그녀와 함께 케이크를 먹는 것만으로 내 마음의 온도가 덩달아 올라갔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두 시간 동안 다섯 번이나 눈물을 글썽거리는 사람도 좋았다. 잘 울지도 화내지도 못하는 나는 그녀를 신기한 듯 구경했다. 참 울 일도 많지, 웃기도 어쩜 이렇게 잘 웃는지. 어깨를 토닥이고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물론 내 아이 한정 살가운 사람이라 마음속으로만 했을 뿐이라 그녀는 모를 것이다.

 

나의 다정은 주로 글을 통해 전해지고 현실에서는 자주 자취를 감춘다. 부러 꾹 눌러사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눈물을 참거나 화를 삼키는 게 익숙하다. 오로지 글을 쓸 때만 솔직해지는 것 같다. ‘나 글 좋아하냐.’ 한때 유행했던 드라마 대사를 따라 질문처럼 내 마음을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래서려나. 내가 글을 좋아하는 이유가. 구겨진 속 안에 것들을 잘 펴서 널어놓을 수 있어서? 현실에서는 점잔 빼고 있다가 글 속에 들어와서는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굴어도 괜찮아서?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도 이 아이들 앞에서는 개다리 춤도 추고 눈밭에서 뒹굴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내 웃기고 우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게다가 아이들은 그런 내 모습을 무척 좋아했다. 아이들 앞에서는 네 발로 엎드려 고양이 울음소리를 냈다가, 7살이 되어 유치원 친구가 되었다가, 푸른 눈의 백룡이나 봉인된 엑조디아 같은 유치한 말들을 꽤 진지하게 내뱉으며 유희왕 주인공 흉내를 냈다. 아무렇지도 않게.

 

몇 주 전에 책방 행사에 갔다 꽃을 선물 받았다. 가져가기 편하게 손잡이 달린 와인 백 속에 물이 담긴 화병에는 그림 같은 보라색 카네이션이 꽂혀있었다. 근사했던 꽃을 받아 들고 내가 했던 말은 허무할 정도로 터무니없었다.

"와. 너무 예뻐요. 이걸 복제하고 싶네요."

꽃을 선물한 현주 님이 왜 이걸 복제를 하냐고 의아해하셨는데 그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순간을 그대로 담아 저장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박제라고 했어도 이상했을 그 표현을 복제라고 했으니, 꽃을 받아 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이상한 헛소리였을 것이다. (다시 떠올려도 끔찍하다)

나는 조금 더 일희일비하는 사람이고 싶은데 좀처럼 연습이 안 되어 있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솔직해서 놀랐다는 말을 종종 하던데 그런 용기는 글을 쓸 때만 나왔다. 진짜 좋은 순간에 고마운 마음을 말로 전하려고 하면 덜컹 고장 나 버리고 만다. 꽃을 가지고 온 정성을, 이 자리를 만든 사람을 실망시킨 건 아닐까 후회하며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시간이 지나 이런 변명 같은 글이나 쓰는 것뿐이다.

책방에 행사는 대가가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뜻밖에 봉투를 받았다. 독서 모임 참가자분들이 회비를 모아 작가님 기름값으로 드리자고 이야기가 되었단다. 소중한 마음이 담긴 봉투를 받아 들고도 나는 실없는 소리만 하다 왔다.

이 고마운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왜 항상 어색해 어쩔 줄 몰라 웃음으로 때우려 할까. 시간이 지난 후에야 상황에 걸맞은 대답이 생각나 후회하는 게 일상이다.

 

조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내 책을 읽은 사람이 마침내 마주하는 작가의 모습이 상상했던 것과 조금이라도 비슷해 보이길 바랐는데. 나는 좀 멍청하고 실없고 그다지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돌아와 글로써 다시 나를 증명해 본다. 언제부턴가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40에는 조금 더 가볍게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 귀여운 할머니,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 등등 에세이 판에는 다양한 할머니들이 있지만 아직 어떻게 늙고 싶은지 까지는 잘 모르겠고, 일단은 호들갑 떨 줄 아는 중년부터 시작하련다.

슬플 때는 큰 소리로 울기도 하고, 아플 때는 악 소리 내고 뒹굴기도 하고, 좋을 때는 두 발을 땅에서 떼고 방방 뛰어도 보고 싶다. 주변 사람의 기쁜 일에 어울리지 않게 야단법석 떨고 싶다. 이 여자 왜 저러지,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했나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다. 오지랖 부리지 말자고 스스로 자제하지 말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싶다. 기쁠 땐 기뻐하고. 좋을 땐 좋아하자. 오늘부터 내 목표는 일희일비다.

 

첨부 이미지

 


 

요즘 상상헌에서 하는 '물과 채소 한 접시'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요. 아주 예전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3월 말 수술을 앞두고 다시 제 몸을 돌보려고요. 다음에는 '채소'에 대해 써봐야겠네요. '채식'은 아니지만요.

구독자님 부디 몸과 마음을 잘 돌보는 하루 보내세요.  

또 편지하겠습니다.

24.3.8.

희정 드림

 


 

💌 문화다방 소식
봄 학기 수업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갑상선 유두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많이 들은 말이 너무 애쓰고 있다는 것 이었어요. 그래 보이지 않고 싶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겠지요.

그래서 어느 날 하루는 작정하고 아무것도 안 해 봤는데요. 그런데 너무 너무 불행했어요! 😭 하루는 그렇게 쉬어도 일주일만 더 쉬었다간 우울해지고 말 것 같았어요. (전생에 노비였나)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봄 학기 수업도 쉬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움직여야 힘을 얻는 사람도 있겠지요.

 

첨부 이미지

글쓰기 수업은 메일로 글을 주고받으며 책쓰기 수업은 오프라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총 세 번 만나요.

글쓰기 수업은 글쓰기를 취미 삼고 싶은 분들, 꾸준히 써보고 싶은 분들을 위한 수업으로 글을 쓸 수 있도록 시간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부터 현실적인 글쓰기 실습까지 전반적인 글쓰기의 모든 것을 알려드립니다.

📖

책쓰기 수업은 원고가 되는 글은 어떻게 다른지, 책이 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것들을 배우고 기획부터 인쇄까지 3달 동안 내 책을 만들어 보는 시간입니다. (무엇보다 달에 한 번은 수업은 핑계고 상상헌으로 홀가분히 시간을 보내다 올 수 있다는 거🤭)

 

👇 수업 신청은 여기로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아주 사적인 마흔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까만별의 프로필 이미지

    까만별

    0
    almost 2 year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2025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