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마흔 일기 / 동네
동네 여행자의 골목 탐험
가을입니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길을 잃어야 해요. (불안을 섬기는 세계에서는 확인까지가 사랑이라, 박지이) 지이 님의 글에 기대어 올 한 해를 보냈는데 요즘은 아침 현관에서 운동화에 발을 넣을 때마다 이 문장을 조용히 떠올린다.
날씨가 지나치게 좋아서 집에 있기 미안하다. 원래도 집 밖으로 나가길 좋아하지만 이런 날씨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나가 길을 잃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
‘이런 날씨는 나가야 해. 일 년에 이렇게 완벽한 날씨는 몇 번 없어.’
아이에게 봄에는 꽃가루가 심해 봄 소풍도 못 나가지 않느냐고, 가을이야말로 소풍하기 좋은 날이니 나가자 재촉한다. 그러기 위해 아이들 학교도 며칠 보내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자꾸 밖으로 나가는 덕분에 집 정리는 자꾸만 순위가 밀리지만 우리에게는 학교나 집보다 우선 동네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잘 지내기 위해서. 일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안전하기 위해서도.
버스 타고 몇 정거장 지나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예쁜 동네도 걷고, 가까운 공원과 산을 산책했다. 아이들과 자전거 타기 좋은 곳은 여기, 돗자리 펴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은 여기. 밤 산책은 이쪽으로 나오면 좋겠다. 도서관은 이쪽에 있고, 시장은 가깝구나. 한살림과 마트 위치도 확인한다. 일하기 좋은 카페와 집 가까이 있는 분식집도 중요하지. 매일이 여행이고 탐험이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일을 나는 겨우 일주일 만에 파악하려니 한가로운 여행자는 못되었다. 무엇보다 아직 아이가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게 여전히 마음의 짐이다. 둘째가 갑자기 또 두드러기라도 난다면 어디로 달려가야 하나. 한 달에 한 번 근시 약을 타던 첫째는 약이 떨어진지 열흘이 넘었다. 과잉진료 없으면서 무섭다 못하겠다 우는 아이를 달래줄 치과는 또 어디일까. 내 아이의 눈과 이를 맡길 병원을 알게 되기 전까지 나는 계속 잔잔한 불안을 안고 생활할 것이다. 게다가 고학년이 되는 아이의 학원은 어디로 보낼지, 운동은 어디서 시켜야 하는지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남편은 아직 이사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냐고 천천히 하라 태평한 소리를 하지만 나는 동네를 속속들이 알아야 비로소 안심하는 사람. 마치 내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파리 여행자처럼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파리 골목을 구경하듯 종종거리며 수원을 걷는다.
여기 오니 서촌으로 이사했을 때가 종종 생각난다. 보는 사람마다 좋은 동네라 이곳을 소개하던 이웃과, 매일 동네를 걷던 경험이 애틋했던 그 시절을 끌어올린다. 여기도 그곳만큼 사랑하게 되려나.
나에게는 지금 약간의 운과 무조건적인 애정이 간절하다. 내 마음이 이 동네에 착 붙어 떨어질 줄 모르길. 내 아이에게 평생 갈 친구가 생겨 매일 놀러나가겠다 졸라대길. 그 아이의 엄마도 나와 결이 맞아 가끔 맥주 한잔할 수 있는 사이가 되길. 그러려면 겹겹의 연이 닿아야 하는데 애써 만들 그 인연들을 청주에 놓고 와 또 새로운 행운을 바라다니 면목이 없다. 그래도 평생 로또 한 번 안 해주면서 이 정도는 좀 해주었으면. 로또는 평생 안 되더라도 내가 이번 생에 바라는 것들이 대부분 이런 사소한 것들이니 꼭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수시로 수정되는 마음>에 이런 글이 나온다. ‘내가 지금 돈을 생각하는 중이라면 여전히 가족을 생각하는 중일 것이다. 가족을 생각하는 중이라면 돈 생각이 따라올 것이다. 결국 둘 다 맨날 생각한다는 뜻이다.’ 전수영 작가는 돈을 생각할 때 가족을 생각한다고 했는데 나는 동네를 생각할 때가 그렇다.
서촌이 좋았던 것은 그때 우리 부부의 삶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가야 하는 아내와 서울이 번잡했던 남편은 함께하는 산책이 유일한 취미였으니 서촌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병원이 가까워야 했다.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어야 했고, 수유실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혼자 걸어 다닐 수 있는 학교 가까운 집과 놀이터가 최고였다. 지금 우리 가족의 삶에는 남편의 회사와 멀지 않은 집과 킥보드와 자전거로 달릴 수 있는 공원, 꽤 괜찮은 학원이 필요해졌다.
나에게는 필요한 동네는 언제나 도서관, 카페, 공원뿐이다. 그것들이 아주 멀리 있는 동네에 살아보지 않았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동네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이 없는 일상을 살았던 경험을 통해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은 아무리 굳센 긍정으로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출퇴근 거리가 길었기 때문에 언젠가 새로운 동네를 찾아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이 나에게는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힘겨운 일이기 때문에 눈 감고 모른척 했다. 그렇게 고민만 몇 년째, 겨우 결심하고 지도를 열었다. 남편 회사를 중심으로 왼쪽 오른쪽 수시로 새로 마음 둘 곳을 찾았다.
세련되지 않는 거리와, 날카롭지 않은 사람들. 번쩍이지 않는 가게들이 있는 곳. 나는 편안히 먹고 입으며 붕어빵을 들고 한가로이 걸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장은 마트가 아닌 시장에서 보고 싶다. 학군지는 따라갈 깜냥이 안 되나 아이에게 유해한 환경은 아니었으면 바랐다. 공원과 도서관은 걸어갈 거리에 꼭. 물가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어디로든 이어지길 바랐다. 하염없이 걷고 싶다 마음먹으면 몇 시간이고 걸어서 다른 동네에 다다른다면 바랄 게 없겠다.
집은 위로 올라갈수록 우울해지는 사람이라 땅과 가까웠으면 했다. 마당이 있다면 좋겠지만 멀리 다른 사람이 심은 나무라도 내 집에서 보였으면. 그럴 때마다 남편에게 우스갯소리로 내가 살고 싶은 곳이 서초가 아니라 서촌이라 얼마나 다행이냐 물었다. 서촌으로도 갈 수 없다는 게 진짜 우습지만 말이다.
그렇게 결정한 곳이 이곳이다. 다행인 것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매일 다정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네도 사람도 둥글다.
우리의 다섯 번째 집은 30년 넘은 오래된 아파트가 되었다. 바스러진 타일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베란다와 제대로 닫히지 않는 오래된 나무 방문, 군데군데 기워놓은 방충망은 아마도 이 아파트가 처음 만들 때부터 있었던 갈색 철제 창틀에 간신히 붙어있다.
이사 전 청소를 하러 빈집에 왔을 때 아이들에게 걸레 하나씩을 쥐여주고 남편은 화장실 청소를 맡았다. 아이들이 걸레를 가지고 노는지, 닦는지 아무튼 저들끼리만 있어준다면 남편과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나는 가장 먼저 창문으로 향했다. 방마다 에어캡이 붙어있어 창밖의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계절이 보이는 근사한 창밖 풍경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날씨를 볼 수 없는 집에서는 살 수 없었다.
언제부터 붙어있었는지 알 수 없는 에어캡이 단박에 떨어지지 않고 흔적을 남겼다. 물을 뿌리고 유리에 붙어있는 것을 손톱으로 박박 밀어내자 물고기 비늘처럼 후두두 바닥에 쌓였다. 방마다 하나씩 있는 창 틀 하나를 닦는데 30분은 족히 걸렸다. 이 집에 쌓인 시간을 단번에 씻어내진 못할 것 같았다.
비늘 같은 잔해를 치우고 또 치우며 잠시 울적했다. 마흔이 되었는데도 나는 내가 원하는 집에 살 수 없다는 현실과 형편이 뚜렷이 보였다. 15평 누하동 신혼집에 핀 곰팡이를 닦을 때는 괜찮았다. 처음이었으니까. 12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이럴 줄은 몰랐지. 적어도 마흔이 되면 새 집은 아니더라도 내가 바라는 모양으로 고쳐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주방에는 환기가 잘 되는 창과, 갖고 있는 책들을 한눈에 보이게 진열할 수 있는 빈 벽 정도는 욕심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 생 아직 멀었다.
원래는 학교 바로 옆 아파트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 집보다 작은 23평이었지만, 이 집보다 2천만 원이 더 있어야 했지만, 학교가 끝나는 아이들이 우르르 그 근처에서 오가며 놀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남편과 큰 아이가 더 이상 작은 집에 살고 싶지 않아 했고 무엇보다 2천만 원이 없었기 때문에 더 고민할 것 없이 싱겁게 결정됐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집에 살게 되었다. 33평의 겨우 두 동밖에 없는 작은 아파트 단지. 학교에 가려면 신호등이 없는 작은 횡단보도를 한 개 더 지나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방치된 놀이터에는 아무도 나와 놀지 않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
이삿짐을 나르던 분이 여기는 사택이냐 묻던 질문의 의도와 도배 사장님이 왜 여기 들어와 사냐며 돈이 죄라던 말이 찜찜한 뒤끝을 남겼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집의 따스함이 그래도 나쁘지 않을거라 토닥여 줬다.
이사 첫날 엄마 아빠는 철 수세미와 고무장갑을 들고 주방을 박박 닦았고, 시부모님은 시루떡 한 상자와 막걸리를 사 오셔서 무사히 잘 지내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내셨다. 너무나 다른 제 방식대로의 사랑. 나는 떡을 돌리기 위해 초인종을 누르는 집집마다 우리 부모님보다 더 연로하신 분들이 나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우리는 2천만 원을 더 빚지지 않고 10평을 더 넓게 살기 위해 또래 아이가 없는 곳에 왔으니까. 그럼에도 이곳에도 즐거움이 존재하길 바란다. 인사 잘 하는 내 아이들 귀여움 받으며 잘 지내길 바란다. 그게 내가 이번 동네에 바라는 유일한 행운이다.
종일 집을 쓸고 닦고 조이던 부모님을 그만하시라 억지로 택시에 태워 돌려보냈다. 집에 도착한 엄마는 마침 택시 기사님이 이 동네 토박이였는데 좋은 동네로 잘 왔다며 이 동네 살기 좋다 하셨단다. 신혼집 전세 계약 날과 똑같이, 엄마는 택시에서, 식당에서, 동네 이웃에게 낯선 동네에 뚝 떨어진 나를 부탁한다.
구독자님 잘 지내셨나요? 저는 이사를 왔습니다. 동네를 바꾸는 게 무서워서 미루고 미루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고, 사주까지 봤는데 아무튼 드디어 왔어요. 이제는 잘 적응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 동네가 우리 가족을 잘 받아주길 바라고 있어요. 한동안 동네 탐험이 끝나면 지하철 타고 다시 사랑하던 서울의 품으로 뛰어들어 볼랍니다.
그럼 구독자님 다음 편지까지 건강하세요!
24.11.14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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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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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소소 님 안녕하세요.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로 편지를 보낼까 고민하다 댓글을 보았어요. 조용한 이곳에서 답장을 받다니 기쁘네요. 저도 말로는 항사 어려운데 이렇게 글로 표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저는 또 편지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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