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21. 마흔 일기 / 서울

다시 서울에 가면 행복할까

2023.06.16 | 조회 6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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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저는 매주 주말마다 여행을 다녀왔어요. 저번 주는 부산, 그 전은 양평, 그 전은 영덕이었지요. 새삼 내가 얼마나 여행을 좋아하는지 깨달았답니다감기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는데도 부산에 가겠다고 짐을 싸고 있는 절 보면서 나는 아파도 여행지에서 아프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요.

그동안은 여행을 좋아한다면 멕시코나 아이슬란드쯤은 가야 명함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아 조용히 하고 있었나 봐요. 이제야 자신있게 외쳐봅니다. 주말을 이용해서 떠나는 국내여행일 뿐이지만 저는 여행을 좋아해요! 🚗

 

 


 

21. 마흔 일기 / 서울

다시 서울에 가면 행복할까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 학교에서 꼭 가르쳐야 할 게 있다.

결혼하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주거지를 바꿔야 할 수 있음.’

배우자의 고향이나 직장에 따라 주거지가 여러 번 바뀔 수도 있으며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닐 수도, 내가 원하지 않아도 때로는 따라야 할 때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러니 내 옆에 친구들과 매일 얼굴을 봤던 날들이 앞으로도 쭉 이어지리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걸, 지금은 지겹도록 얼굴을 마주하는 가족들과도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거리만큼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해결책으로 내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면, 이 동네가 고향이자 이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직장을 잡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것까지 알려주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른 배우자와도 사는 곳이 바뀔 가능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예외 조항까지.

 

학교에서 이 중요한 걸 왜 가르쳐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긴, 출산이나 수유 같은 것도 배우지 않았지. 성교육에 그런 것도 포함되었다면 우리 남편도 새벽 수유를 도왔을지 모를 일이다.

 

나도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다. 7년 동안 연애한 사람과 결혼을 고민했던 시기에 충북 음성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타 지역 사람과 결혼하면 이곳을 떠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없었다. 이미 결혼한 인생 선배들을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사랑니를 빼지 않으면 치열이 뒤틀릴 수 있다는 걸 몰라서 평생 비뚤거리는 앞니를 갖게 된 것처럼.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결혼해도 달라질 건 없다는 말은 달콤한 속임수다. 순전히 뻥이다. 그런 이야기로 결혼이라는 선택을 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 결혼하면 모든 게 달라진다. 그저 낮에 따로 각장의 생활을 하다가 한 집에서 잠드는 단순한 연애의 연장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쁘게 평일을 살다 알콩달콩 주말을 함께하는 그런 동거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만약 결혼을 했는데도 삶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건 상대방이 맞추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맞춰 변화시키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건 또 그거대로 훗날 커다란 부작용을 가지고 올 테니 좋아하기만 할 일은 아니다.

 

결혼하고 처음 2년은 순조로웠다. 우리 신혼집은 15평 다세대 가구 1층집이었다. 집은 작았지만 원하던 동네에 터를 잡았다. 나에게는 동네가 커다란 앞마당 같아서 작은 집도 괜찮았다.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면 이 동네 살기 좋다 잘 왔다는 말을 인사처럼 건네던 이웃이 있었다. 아직 뜨겁지 않았던 경복궁 옆 서촌은 그렇게 우리 부부를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낯선 곳에서 어른으로 첫 발을 내딛는 두 사람에게 딱 맞는 시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서촌을 떠나 충북 음성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잠시 필름이 끊겼다. 그때는 몰랐다. 갑자기 내가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가게 될 거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서울 사람들에게 지방 발령을 내면 대부분 퇴사나 이직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을 빌어 서울 사람들은 서울 밖을 벗어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지방에 본가가 있는 경우나 그 지역 출신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라 순순히 내려가는 편이라고 했다. 그 후자가 우리 케이스였다.

 

내가 서울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남편의 고향 때문일 거라는 건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만났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서울에서 취직해서 서울에 집을 구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지방이라니? 주말부부가 되어서 한동안 떨어져 사느냐 함께 내려가느냐 선택해야 했다.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신혼부부가 주말부부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불행히도 내 일은 사는 곳과 상관없었다. 버티고 있을 마땅한 핑계가 없었다.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덴데 뭐 어떠랴. 집값이 저렴할 테니 이참에 내 작업실도 하나 마련해야겠다.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이 더해져서 푸른 들판과 뒷산을 산책하는 밝은 미래를 그리며 나를 달랬다. 2,3년이면 다시 올라올 거라고 했으니까. 내 삶에서 몇 년 시가 근처에서 아기 낳으며 시골살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했다.

 

막상 내려와서는 모든 게 내 예상과 반대였다. 전셋집이 구해지지 않아 원하지도 않은 아파트를 사야 했고, 작업실을 마련하긴커녕 아파트를 매매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했다. 집 근처는 빵집이나 도서관도 없었던 작은 동네였고. 고속도로 근처라 종종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를 목격했다. 그제야 내가 그리던 시골살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꿈이었는지 알았다. 잘 가꿔진 공원이나 산책길 있는 뒷산도 도시여야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인도가 없는 동네에서 하루 한 시간씩 산책을 하는 임산부였다가, 자동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불안하게 유모차를 끄는 엄마가 되었다. 로드킬 당한 고양이 대신 바로 옆에 핀 들꽃을 보며 이곳에 존재하는지 모를 행복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쓰며 매일을 살았다.

 

2년이 지나고 한 번의 이사했지만 여전히 충북에 살고 있다. 심지어 남편은 경기도로 다시 발령을 받았는데도 나와 아이들은 여전히 충북에 있다. 서울을 떠나는 건 쉬웠지만 다시 올라가는 건 쉽지 않았다. 우리는 둘에서 셋이 되었고 또 넷이 되었다. 이제 이사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와도 얽혀 있다. 우리는 다시 누하동 15평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학교 근처 아이들에게 방을 줄 수 있는 크기의 집이 필요하다. 한동안 습관처럼 네이버 부동산에서 종로구 주택 매매를 검색했던 때가 있다. 하도 자주 들어가서 새로운 매물이 들어보면 바로 눈에 띄었다. 종로구가 안 되면 서대문구까지 영역을 넓혀서 봤다. 아무리 지역을 넓히고 평수를 줄여도 이제와 우리 넷이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둘이서 거기 살 때는 몰랐는데. 밖으로 나와 올려다보니 서울의 야경이란 참 비싼 불빛이었구나.

 

탈 서울을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탈서울한 사람들과 로컬에서 가능성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삶이 혹시 내 현실과 비슷할까 새로운 해답을 찾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들의 선택으로 서울을 벗어났다는 게 날 가로막았다. 어디에 살든 멱살 잡이로 끌려온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아이들이 없는 젊은 부부나 청년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나는 광명에서 태어나 쭉 광명에서 살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안양천을 끼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1분이면 다리 건너 서울이었다. 신기하게도 우리 동네는 주소지는 경기도 광명이면서 전화번호는 02였다. 덕분에 나는 어릴 적부터 내가 서울에 산다고 착각했다. 버스나 지하철로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안양이나 평촌보다 홍대나 이대를 더 자주 다녔다. 내 모든 생활권이 서울이어서 딱히 경기도 주민이라는 생각을 잘 못했다. 그러면서도 누가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면 서울에서 왔다고 얘기할 때 약간의 죄의식이 들었다. 어차피 어디서 왔는지 동서남북 정도만 알면 되는 인사인데 괜히 자세히 말할 필요 있을까 싶다가도 그래도 광명과 서울은 다르지 않나 고민하다 구로나 개봉 옆이라고 부연 설명을 붙여야 했던 광명보다는 서울이라는 간편한 답변을 선택했다.

 

학상 시절에 내 주변에서는 모두 인 서울을 목표로 입시를 준비했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라면 응당 인 서울은 해야 한다고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의 단골 레퍼토리는 집이 코앞인데 똑같은 등록금 내고 멀리 다닐 거냐.’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맞는 말처럼 들렸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열심히 한 학생이라면 서울대는 아니어도 서울에 있는 대학 정도는 가야 하는 거지. 공부를 하지 않는 애들에게는 그래서 대학 안 가고 공장에 취직할 거냐는 얘기를 쉽게 했던 시대였다. 마치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되는 건 인생을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뉘앙스였다. 아이들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신에게 선생님이 공순이라는 별명을 붙이는 걸 부끄러워했다.

 

성인이 되어서야 그런 줄 세우기가 그 아이의 지난 시간을 결론짓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여기와 살아보니 공장에 근무하는 사람들 천지다. (충청도는 서울과 가까워 제조 공장이 무척 많다. 과자나 음료수 패키지에 제조된 곳 주소를 확인해 보길.) 공장으로 출근하는 친해진 동네 엄마 아빠들은 아이 셋 낳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내가 알던 세계가 다가 아니었다. 꼭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꼭 서울에서 취업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서울 밖에 있었다.

 

남편의 사촌 동생은 충북지역 가장 좋은 대학교를 나왔다. 취업도 이곳에서 했다. 여기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서울에 좋은 대학보다 이 지역 대학을 나왔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선배가 곧 상사가 되어 이끌어 주는 식이었다.

 

우리 동네 학원에 붙은 현수막의 제일 첫째 줄이 사촌이 나왔다는 대학교였던 게 생각났다. sky가 아닌 대학에 가도 현수막에 제일 맨 위에 이름을 붙는 동네에 살고 있구나. 서울에서 살았다면, 저 아이는 현수막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한 편으로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 아이들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게 아닐까 현타가 왔다. 서울 남자와(이런 단어를 쓴다는 게 너무 웃긴다)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는 시누이는 종종 거기서 계속 애들 키울 거냐고 묻는다. 친정 근처로 올라오면 목동이라 애들 교육하기 좋을 거라고. 되도록 올라오라고 했다.

 

나는 점점 더 모르겠다. 마치 내가 가져다 놓은 그릇 모양대로 아이가 자랄 것만 같다. 동그란 잔에는 동그란 물로. 네모난 그릇에는 네모난 물로. 나는 아이들이 어떤 물이 되길 바랄까. 나는 어떤 그릇이 되고 싶은가. 어른이 된 아이에게 먼저 앞서가 물어보고 싶다.

 

우주야 엄마는 서울이 좋아. 문화생활도 많이 할 수 있고, 네가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경험들이 손만 뻗으면 되는 곳에 있거든. 뭐든 빠르고 쉬울 거야. 대신 바쁘고 빠듯하겠지. 너도 나도 그럴 거야. 지금 사는 곳 말고 또 다른 선택지도 있어. 더 도시로 갈 수도, 더 시골로 갈 수도 있지. 너는 어디에서 자라고 싶니. 니 유년시절의 행복을 뭘로 채워줘야 할까. 엄마가 좋아하는 곳에서 살기 위해 너희들을 데리고 가는 게 욕심일까?’

 

지금도 남편은 용인에서, 우리는 여전히 충북에서 살고 있다. 셋이 이곳에서 보내는 생활도 나쁘지 않다. 마음 맞는 동네 엄마들도 사귀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로 또 함께 보내고 있다. 아이들도 이만하면 행복하다 싶게 잘 자라고 있다. 문제는 가끔씩 치밀어 오르는 울컥하는 감정들이었다. 불안하고 기분 나쁜 감정은 너무 모호해서 딱히 이름 붙일 수도 없었다. 어디서 언제 오는지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그 감정이 문두드릴 때면 일단 멈춤이 된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모든 게 고장 난다.

 

놀이터에서 엄마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여기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남편 따라 타 지역에서 온 여자들이다. 부천 서울 마산 대전 고향도 다양하다. 이 시대에 여전히 남편의 직장 따라 모든 것을 놓고 새로운 환경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위로가 되기는커녕 답답하고 속상했다. 나 역시 그들 중에 한 명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를 선택한 쪽이 나라는 게. 내 삶의 선택권을 언제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는 게 사무친다.

 

서울을 떠난 것에서 내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내가 감기에 걸린 것도, 일하기 싫은 것도, 자신감을 잃고 쭈구리가 되고 있는 것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 것, 오늘 밥 하기 싫은 것도, 모두 내게서 서울을 빼앗아간 탓이다. 그 어떤 불만으로 시작된 싸움도 거슬러 올라가면 서울을 떠나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 동네를 걷던 만삭의 내가 있다.

 

도대체 내가 서울에 놓고 온 것이 뭐길래. 나는 서울을 벗어난 것이 여태 괴로울까. 내가 선택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힘들까. 때마다 지역을 옮겨 다녀야 하는 직업 군인 가족들도 잘 만 새로운 곳에 적응해서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던데, 나는 왜 계속 제자리걸음일까. 나는 아니, 우리는 어디에 살아야 행복할까. 마흔이 되어서도 뿌리내릴 곳 하나 찾지 못해서 물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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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생리 때마다 극심한 우울로 힘들어하는 편인데 때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따지고 올라가면 서울을 떠났다는 결론에 도달해요. 그 어떤 출발지에서도 같은 결론에 이르지요. 그러면 당장 제가 바꿀 수 있는 게 없어서 또 한 번 좌절합니다.

이번 생리 때도 한바탕 서울병이 휘몰아치고 가서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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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살아야 행복할까요?

 

23. 6. 14. 

희정.

 


 

💌문화다방 소식

🚶‍♀️산책하는 말들

'산책하는 말들'이라는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걷기와 쓰기를 함께하는 워크샵이에요. 이번에는 6월 24일(토)<너에겐 정말 커다란 의자야> 차은정 작가님의 작업실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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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고 싶으신 분들 환영! 댓글 혹은 차은정 작가님께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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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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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2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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