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끝이 났다. 요즘의 하루는 온전히 딱 하루만큼 무겁지 않다. 조금은 더 무거운 하루랄까. 미래의 나, 한 중장년 정도 된 나의 하루를 몇 시간정도 더 짊어진 느낌. 스물여섯, 새파랗게 젊다면서도 먹고 살 길은 찾아야 한다니, 뭐든 해도 좋은 나이라면서 뭘 하든 시비 걸리는 듯한 나이. 아무 흉도 지기 싫어 아무 길로도 가지 못하는 새하얀 연두부같은 아이의 모습을 반복. 머뭇거림은 불안함을 빚는다.
글을 적을 땐, 어떤 부분은 실제보다 예쁘고 두리뭉실하게 버무려 적고, 어떤 부분은 더 명료하고 선명하게 적는다. 요지를 알 수 없는 비유는 때론 밉게도 붙어 있는 뱃살같으니까. 쓰고 싶은 부분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말들을 분명히 정리해 전달하는 과정들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지만.
오늘과 어제는, 무엇을 적어내야 할까. 구름같은 꿈일까 한번 행궈 낸 진한 햇살같은 현실일까. 어떻게 적어내야 할까. 위치는 또 어디에. 백지 아래일까 반듯한 자기소개서 속 질문 아래일까. 하고 싶은 말일까, 해야 하는 말일까. 갈팡질팡하는 펜촉은 진동을 만든다. 새하얀 연두부 같던 아이는 어느새 단단한 무언가가 되려 한다. 덜덜 떨면서.
조급함이라는 명찰을 단 여유를 부리던 중, 바라는 것 없이 내려대던 휴대폰 스크롤, 귀여운 것을 발견한다. 신박한 아이템을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오늘은 초음파 칼을 소개한다.
시애틀 울트라 소닉스의 초음파 칼 C-200을 소개합니다. 초당 4만회 이상의 진동으로,
힘 들이지 않고 깔끔하게 단면을 잘라 냅니다. 요리도 과학, 진동이 만들어낸
절삭력으로 쉽고 빠르게 요리하세요.
나는 무엇을 잘라내기 위해 이리 흔들리는 걸까.
무같이 생긴, 그러나 잘라보기 전엔 정체를 알려줄 수 없다는 듯이 검게 꽁꽁 싸여있는 무언가. 다 잘린 것 같다가도, 하나도 잘리지 않은 것 같은, 두부같이 무르다가도 바위같이 단단한. 그런 것들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피곤한 날 꾸는 꿈같은 시간들.
이유없이 든든하다가도, 이유가 있어도 불안하기도 하다. 이쪽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가도 잠깐 눈감았다 뜨면 다시 저쪽이다. 왔다갔다, 이리저리, 내 삶의 진자는 초당 몇 회 진동할는지.
다만 가끔은 웃기지만 무작정 저 광고를 떠올리기로 한다. '나는 불안할 때면 시애틀 울트라 소닉스의 초음파 칼 C-200을 생각해'라고 한다면 우스꽝스럽겠지만 정말 그런걸.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한다고. 살아가는 이상 무언가를 잘라내야 한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 강력한 절삭력을 위한 초동조치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C-200에 비하면 한참은 모자라겠지만.
고요하게 피는 꽃도, 깨는 알도 없을테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고 배워왔던 것처럼, 그렇게 28시간쯤 되어 보이는 하루를 또 보낸다. 날카롭게 흔들리면서.
추신
26년 두번째 이야기를 씁니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적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매번 바뀌니, 굳어 있는 글로 남기는 것이 괜히 일종의 박제 같기도 하고요.. 그치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혹은 이 시기에 '대체로 그런 제 모습'을 녹여 적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C-200을 떠올려보세요. 화이팅.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