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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요리

#11. 반추(反芻), 일별(一瞥)

2025.03.17 | 조회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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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반추(反芻)하다

: 『동물』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 내어 씹다.

: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하다.

: rememorarse

 

  • 단어를 찾은 곳  

이곳에 와서 그녀는 들었다. 노르웨이 최북단에 사람들이 사는 섬이 있는데, 여름에는 하루 스물네 시간 해가 떠 있으 며 겨울에는 스물네 시간이 모두 밤이라고. 그런 극단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가 통과하는 시간은 그렇게 흰 밤일까, 혹 은 검은 낮일까?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 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 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Solo los recuerdos del futuro no pueden rememorarse.

 

한강, 흰, 94쪽

  • 나의 단어라면
요리에 팔할은 시간이다. 어설퍼 보이던 물과 여러 가루들과 장들도 한참 시간이 지나면 금세 한 색깔 한 맛이 된다. 가당치도 않을 것 같던 붉은색 핏덩이가 식당에서 마주 하던 음식들과 비슷해지는 모양새를 보면 새삼 신기하다. 차갑게 얼어 있는, 열리지도 않는 딱딱한 조개가 어느새 따뜻하게 입을 벌리고 접시 안에 빨간소스와 함께 묻어 있을 때, 기이하게도 생명감을 느끼는 듯 하다. 음식에 가장 마지막 단계인 씹어 삼키는 것만 하던 내가 그보다 조금 앞선 단계인 불을 켜고 양념을 바르고 재료를 준비 하며 나는 한구석에 오싹함을 느낀다.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다른 것들의 행복을 앗아 가는 것에 죄책감이 있다고 느꼈지만서도 문득 수많은 생명들의 부분 부분을 떼어 나의 행복을 채워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거북하기도, 동시에 조금은 위로가 되게도 느껴졌다. 더 이상 반추할 수 없는 그 존재들을 대신해 칼을 도마에 내릴때마다 그들에 대해 반추한다. 죄책감과 위로감들은 수면을 기준으로 위 아래 반사 되어 보이는 하나의 피상체 같다. 무언가를 죽인다는 죄책감, 결국 모두가 그런다는 위로감.

일별(一瞥)하다

: 한 번 흘낏 보다.

: echar un vistazo

 

  • 단어를 찾은 곳

밤사이 내린 눈에 덮인 갈대숲으로 그녀가 들어선다. 하나 하나의 희고 야윈, 눈의 무게를 견디며 비스듬히 휘어진 갈대 들을 일별한다. 갈대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늪에 야생오리 한 쌍이 살고 있다. 살얼음의 표면과 아직 얼지 않은 회청색 수면 이 만나는 늪 가운데서 나란히 목을 수그려 물을 마시고 있다.그것들에게서 돌아서기 전에 그녀는 묻는다.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Le echa un vistazo a cada uno de los juncos blancos y delgados que se inclinan soportando el peso de la nieve.

한강, 흰, 104쪽

  • 나의 단어라면
비가 오는 날은 우울하고 불쾌한 날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지만 그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보다 예민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예민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그마한 스침에도 붉어지고 아파하듯이, 그의 마음은 그 근처를 빗나가는 말들에도 너무 쉽게 베이곤 했습니다. 그는 그럴 때마다 다그치듯, 눈치주듯 자신을 일별하는 듯한 모든 사물들의 눈을 감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잔뜩 비가내려서, 비에 맞아 모든 눈이 제대로 뜨이지 못하길 바랐습니다. 나를 흘겨보지 못하도록. 하늘이 우중충하고 마음은 그보다 가라앉을 때, 그때 그는 차라리 비가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젖어도 되는 공평한 하늘 아래에서,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는 것 더욱 쉽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추신

오늘 아주 벅찬 일정으로 여행을 갔는데요, 해변은 자갈로 덮여 있고, 숙소의 이불에서는 애기 분유냄새가 났습니다. 사온 맥주는 미지근하고 그보다 밤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차갑습니다. 모든 게 일상에서 조금씩 틀어진 것이 꼭 여행같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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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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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month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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