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시(목)

10월 3주 차 고양이

이번 주 표어 : 행복을 잃어버린 장소에서 행복을 찾지 마세요

2024.10.17 | 조회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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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고양이들의 시선

매주 금요일 고양이들의 시선이 담깁니다.🐈‍⬛

<대장 고양이의 편지>

 

To. 구독자

 

좋은 아침! 좋은 점심! 좋은 저녁!
다들 행복하니?

 

from. 대장 Q가

 


<소설 쓰는 고양이 하녹의 이야기>

 

헬라의 묠니르

제 2부, 만악의 근원 판도라, 제 1장 균열

‘나’는 공허속에서 태어난 자.

차가운 물방울이 뺨에 떨어져-
깜빡, 눈을 뜨니,

‘나’는 칠흑 같은 어둠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홀로 있었다.

거대한 천체가 둥둥 회전하는 소리에,
가슴이 쿵쿵 뛰고 두 귀가 먹먹해졌다.

온몸의 감각이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이 괴로웠다.

두 귀를 틀어막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끝없이 펼쳐진 이 공간이 나를 한순간 집어삼킬 것만 같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그런데, ‘나’는 누구지?

내 이름이 뭐였지.
내가 이름이 있었나?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알고 있지?

그러나 그 목소리는
분명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실낱같이 피어나는
그 말소리에 온기가 서려 있는 듯 따뜻해서,
몸의 떨림이 멎고 굉음도 차츰 멀게 들렸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소리를 따라 별들이 수 놓인 길을 자박자박 걸어갔다.

바람에 나부끼는 웃음소리,
달빛에 노랗게 일렁이는 노랫소리,

말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빛을 향해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말소리도 빛도 선명하게 커졌다.

그 끝에 다다르니,

오로지 어둠뿐인 광활한 공허의 한가운데를, 
날카로운 빛줄기가 가로질러 만든 ‘균열’이 보였다.

그 균열 사이로 삐죽빼죽한 빛이 앞다투어 비춰왔다.

‘문이다!’

나는 이곳을 벗어나,

그 틈 너머의 세상이 보고 싶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아,’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하늘,
이따금 불어오는 미풍,

간밤에 비가 내려 나무 잎사귀에 내려앉은 빗물이 송골송골 반짝였다.

균열 너머의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나는 신이나 푸르른 초원을 조심스레 걷다가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게 파고드는 여린 풀의 사랑스러움도, 
땅에 발을 딛을 때마다 물씬 올라오는 흙 내음도 향기로웠다.

<공허>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소리를 따라갔다.

언덕 아래에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수풀들 사이로 황급히 작은 몸을 숨겼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나부끼는 부드러운 옷자락이,

언젠가 보았던 푸르른 파도 물결 같아.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동동 나부끼었다.

여인들은 입술을 열어,
‘의지’를 자신들이 속한 세계에 기꺼이 뱉어냈다.

“우리의 00를 들어주소서-”

오랜 세월을 견뎌낸, 아주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에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그들은 나무 그늘이 푸르게 우거진 곳에서,
신명 나게 땅을 딛고 차오르며, 하늘을향해 손사위를 뻗어 춤추고 노래했다.

“위대한 신, 우리의 근원, 만물의 뿌리-.”

욱신.

갑자기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이 느껴지고 시야가 희뿌얘졌다.

“비록 우리의 터전은 불타버렸으나-

“우리는 다시 여기 모여 함께 우리의 의지를 천명하고 또 바라오니-”

불에 덴듯 온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 

결국 , 

정을 머리에 대고 쾅쾅 쪼개는 듯한 고통에,
‘나’는 그만 아득히 정신을 잃었다.

 


 

한 편, 제우스의 방에 한밤의 손님이 찾아온다.

제우스는 늦은 시간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지금까지의 일을 곱씹고 또 곱씹고 있었다.

생각에 골몰히 잠겨, 지척에 다가온 자의 기척도 못 느낀 채.

그는 신들이 머무는 장소에도 출입이 자유로운 유일한 자.

“타르타로스가 다시 열렸습니다.”

  우지끈.

쾅.

 우당탕.

턱을 괴고 심드렁히 의자에 앉아 있던 제우스는,
돌연 듣게 된, 때아닌 소식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통증도 잊을 정도로,
온몸이 피가 빠르게 식는 것 같은 공포에 압도되어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리 환대해 주시다니요. 직접 소식을 전하러 온 보람이 있네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그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반면, 겁에 질린 제우스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헤르메스.”

제우스의 속이 타들어 가든 말든,
커튼 뒤 기둥에 기댄 헤르메스의 장난기 어린 눈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어둠 속에서 더 선명히 빛났다.

“-자초지종을…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히죽히죽 웃지만 말고 설명해 보거라!”

헤르메스의 표정이 묘하다.
그는 자유로운 방랑자,
소식을 전하는 자,
바람과도 같은 존재.

무엇이 되었든,
그의 발목을 붙잡는 분란은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혼돈만은 사랑하지.’

“말 그대로입니다. 타르타로스가 다시 열렸었어요.

‘당신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가두고 봉인한 -’

“도대체 그게 왜 지금…. 어떻게….” 

사색이 된 제우스의 얼굴을 보는 일은 좀처럼 흔한 일은 아니라,
헤르메스는 이 광경을 가능한 한 느긋이 음미하기로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열렸었다니까요?”

“뭐…. 무엇이 어째?”

‘그래, 그리고 그 덕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지.’

“무엇을 숨기는 것이냐, 헤르메스.”

제우스는 이죽거리는 그의 얼굴이 얄미워, 

주먹이라도 메다꽂고 싶어 으르렁거렸다.

얼굴에 주먹이 닿기도 전에 그가 바람처럼 사라질 게 뻔하여,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

“숨기다니요. 섭섭한 말씀을.”

확실히 그는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

숨긴다는 사실조차 숨기지 않았다.

“네 태도는 늘 건방지구나. 헤르메스. 신들의 왕 앞에서 갖추어 할 예의를 잊은 것이냐?”

“… 프로메테우스가 돌보던 마을을 모두 헤집어 놓으셨더군요.”

늘 장난기 어린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서늘해졌다.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몰살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을, 쯧!”

“바람이 머물기 좋아하는 곳은 흔치 않지요. 그 장소가 망가지는 일은 더더욱 흔치 않고요.”

말에 벼리고 벼린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제우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헤르메스가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타르타로스에서 ‘무언가’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나오자마자, 
타르타로스는 다시 굳게 닫혔답니다.

제우스의 말문이 막혔다.

오래전 봉인한 지하감옥 타르타로스가 열린 것도 모자라서,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온 존재가 있다니! 

게다가 한 번 열린 감옥이 언제 또 열릴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면서 부딪힌 왼쪽 뒤통수가 더욱 욱신거렸다.

제우스를 바라보는 헤르메스의 눈빛이 묘했다.

“명령을 내리시지요.”

‘귀신같은 놈.’

제우스는 속으로 씨근덕거렸다,

“그것을 내 앞에 데려와라! 당장!.”

-

“…. 여…. 이제 눈을….”

“허, 헉.”

말라붙은 숨을 가득 들이켜자, 콜록콜록 나오는 기침이 목을 거칠게 긁어댔다.

‘의식을 잃었었구나.’

캄캄한 밤.

밤하늘을 사탕 바구니의 사탕처럼 가득 채운 별들과, 쇠 맛이 날 것 같은 은은한 은색의 달.

이슬비에 젖은 몸이 차가웠다.

아까만큼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남아있는 여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휘영청 까만 밤 한가운데에도, 밝은 달빛에 의지해 무언가를 읽고, 함께 생각을 나누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들이 알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한 발짝, 또 한 발짝.

여인들과 내가 조금씩 가까워지던 그 찰나,

내 앞을, 허공을 가르며 나타난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가로막았다.

“안녕.” 

“….”

“ 방금은 미안. 네가 저들에게 가는 걸 말려야만 했거든. ”

“어째서?”

“미안,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그럼, 언젠가는 말해 줄 거야?”

“…. 그래. 꼭 그럴게. 자, 아이야, 나와 함께 가자.”

“어디로 ?”

“신들의 왕께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아주 찰나였기에,

오로지 ‘나’만 그의 상념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신들의 왕께서 너를 찾으신다.”

 


 

“너를 그들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어 주겠노라.”

 다짜고짜 ‘나’를 끌고 와,
신들의 왕에게 예를 갖추라며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리고는,
저는 높은 의자에 앉아서 하는 말이 저 꼴이다.

“어째서지?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좋아.”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타르타로스에서 기어 나왔다더니,
성질머리가 참으로 고약하구나! 재미있어 참으로 재미있어!”

제우스의 형제이자, 바다를 다스리는 남신 포세이돈이 우악스럽게 웃어댔다.

자기 오른팔이라는 자가 저 모양이니, 제우스의 미간에 주름 잡히지 않을 날이 없었다.

“무슨 일로 우리를 소집하나 했더니,
이 어린아이 하나 어찌 못하고 바쁜 12신을 다 모은 건가.”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가 목소리가 서늘하게 허공을 갈랐다.

포세이돈의 웃음소리가 뚝 멈췄다.

“헤라는 어디에 있지?”

아폴론 특유의 능글거림이 오늘따라 예민한 제우스의 신경을 살살 긁어댔다.

“남의 집사람 일은 신경 쓰지 말게.”

예언과 수호의 신, 헤라 님은 오늘 참석을 안 하십니까?”
데메테르가 다시금 물었다.

장내가 돌연 조용해졌다.

 헤르메스만이 바구니에 담긴 사과를 던졌다 잡았다 반복하며, 
이 모든것에 관심 없다는 듯한 얼굴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

“별것 아닌 거로 예민하게 좀 굴지 말게. 이래서 여자들이란!”

하데스가 피곤하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남의 집 귀한 여식을 납치, 감금한 자가 수치를 모르고 담을 말은 아니지요.”

데메테르는 단 한시도 그 딸의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다들 그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남신 제우스의 예민함이 하늘을 찔렀다.

데메테르의 매서운 시선은 여전히 하데스에게 머물러있었다.
그는 지하세계의 왕, 제 반쪽과도 다름없는 딸을 납치해간 파렴치한 자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 수많은 말들이 오가는 이곳은,
올림포스 12신이 모여 사는 신전의 중앙 회의장.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광경이 한 편의 연극처럼 느껴진다.

“음…그러니까 하데스, 저자가 데메테르 님의 딸을 납치하고선, 
딸을 무사히 돌려보내 주지도 않고, 잘못도 인정 안 하고, 
마냥 뻗대고 있는 거구나?”

옆 나라 헬라의 묠니르라도 맞은 듯,
모두가 청천벽력 같은 ‘나’의 발언에
제우스와 하데스의 눈치를 살피며 
눈동자를 바삐 움직인다.

소란하다.

모두가 침묵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소란하다.

데메테르의 딸은, 엄연한 피해자.
데메테르 또한 피해자인데,

가해자인 하데스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이곳에 피해자와 함께 있다.

무엇이 이들을 침묵하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말하게 하는가?

“우하하하-”

하늘에 닿을 듯 높고 청량한 웃음 소리에 신들의 모든 시선이 헤르메스에게 쏠렸다.

“아, 모처럼 진짜 재미있다니까-”

헤르메스가 나를 바라보며 함박 미소 짓고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냉소 섞인 얼굴로 제우스에게 고했다.

“지체 높으신 신들의 왕이시여-”

제우스의 미간에 진 주름이 미세하게 더 깊어졌다.

‘건방진 애새끼.’ 

헤르메스는 착실하게 제우스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이 아이를 이곳에 불러온 것은 당신이니,
이토록 오래 무릎을 꿇려 놓는 것은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아아, 마침, 다리에 피가 안 통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이야, 이리 오렴?”

데메테르가 따스하게 ‘나’를 불렀다.

데메테르에게선 봄날 볕뉘같은
다정한 향기가 풍겼다.

그는 나를 자신의 무릎에 살포시 앉히곤,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마치 제 딸 페르세포네를 안아주듯이, 
없어질까 봐 조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안은 그의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개를 숙여 보이지 않았지만, 
천 번은 삼켰을 눈물을 지금도 삼키고 있을 터였다.
어찌 된 일인지, 나는 그를 오늘 처음 만났지만, 그의 모든 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이토록 사무치게 한 이를 용서할 수가 없어졌다.

“허허, 저놈 저거 보게? 나를 노려보잖아?

하데스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뱉었다.

“이봐,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이 흉측하게 생겨서는, 성격마저 그렇게 드세면 남자들이 싫어한다?”

-훅-

하데스의 발치에 날카로운 은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활시위를 당긴 이는, 달과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였다.

“그 더러운 입을 다무시오.
아이에게 할 말이 아니오.

아르테미스의 눈이 밤하늘의 달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자에게 할 말도 아니지.”

사랑과 욕망의 신 아프로디테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오,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여,
그대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소.

다른 여자들과 그대는 다르지 않소?
흉하지도, 드세지도 않지.

가히 올림포스의 자랑이오!”

예쁜 외모와 텅빈 머리의 기막힌 조화로 유명한, 전쟁의 남신 아레스가 망언에 망언을 뱉어냈다.
제 딴에는 칭찬이랍시고 뱉어내는 말이었다.

“다르지 않습니다.”

아프로디테가 답했다.

“…?” 

아레스의 순백의 백지같은 표정을 보아하니, 
아프로디테의 진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게 분명했다.

“…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아프로디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싸늘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자자, 모처럼 모였는데, 다들 기분 좋게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즐기자고요. 싸우지들 말고. ”

헤파이스토스는 짐짓 사람좋은 척, 분위기를 풀어보려 술잔을 들고 중앙으로 나섰다.

“여기 어디에 ‘싸움’이 있었지?
내가 보기엔, 어느 한 쪽의 입장이
압도적으로 불리한데 말이야.
그것을 싸움이라고 할 수 있나?” 

아테나가 청중에게 물었다.
분명히 질문이 아니었지만.

다시금 수습할 수 없이 싸늘해지는 장내의 분위기에, 
대장장이 남신 헤파이스토스는 안절부절못했고, 
그 모습을 아프로디테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뒤 곧바로 시선을 ‘나’에게 두었다.

“아이야.”

“응.”

“-풋.” 

“조용히 하거라, 헤르메스.”

“아이야.”

“응.”

“네 모습은 흉하지 않다.”

“응, 그렇지만 포세이돈과 하데스와 아레스가…”

“하하하, 벌써 그들의 이름을 외웠느냐? 누가 네게 그런 망언을 뱉었는지도?”

아프로디테가 재미있다는 듯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세 남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볼만하게 타올랐다.

아이를 상대로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이라니.

“응, 나는 한 번 본 것은 다 기억해.”

“정말 영특하구나.”

아프로디테는 ‘나’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아이야, 너는 특별한 모습을 가졌구나.
피부는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같이 빛나고,
까만 호수와 같이 깊고 총명한 눈은,
바라보면 그 속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구나.
네 말대로 있는 그대로도 너는…

“그 녀석을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바꿔, 아프로디테.”

제우스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헤르메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그가 손에서 가지고 놀던 사과가 바스러졌다.

아프로디테의 얼굴에 무거운 그늘이 드리웠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아프로디테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모멸감.

수치심.

무력감.

분노.

울분.

비참함.

.

.

.

무엇을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나는 아프로디테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 당신은 누구보다도 강한 신이야.”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목이 메었다. 

나는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사랑과 욕망의 신이시여, -

우리의 000 000 00 000.

그걸 꼭 기억해줘

당신만이 할 수 있어”

놀란 아프로디테의 황금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다시 빛을 담은 채 반짝였다. 

“그럴게. 약속할게.”

해가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시간이 되었다.
이만 ‘나’는 나의 할 일을 해야 했다.

아마 나는 여기 올림포스 신들의 왕,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야 할 것이다.

“네 이름을 지어주마. 네 이름은-”

“내 이름은 판도라(Pandora) 야.
그게 내가 정한 나의 이름이야.”

 모든(pan) 선물(dora)을 다 받은 자.

제우스의 얼굴이 매섭게 굳어졌다.

데메테르가 그를 뒤로하고 내게 다가왔다.

“그대에게, 풍요와 평안함과… 봄의 축복을.”

그는 내 뺨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봄은 꼭 다시 올거야.”

나도 데메테르의 볼에 입맞추며 속삭였다.

아르테미스는, 섬세한 은빛 세공이
달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활과 활시위를 말없이 내게 건넸다.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돼?”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많을 수록 좋다. 
인간은 약하고…특히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자들이 어디에나 있으니, 네가 어디를 가든 그 활은 꼭 몸에 지니도록 해라.”

“...고마워.”

“별 것도 아닌 것을.” 

아테나도 앞으로 나섰다.

“나는 네게 어떤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는 가호와 지혜를…”

“그만!!!” 

또다시 천둥처럼 요동치는 목소리가 장내를 왕왕 울렸다.

정말이지 산통 깨는 데는 선수이다.

“<그것> 에게 그런것들은 필요없다. 

과해! 아르테미스, 네가 준 활도 다시 받아오거라. 
몇번을 말하는가? 너는 이미 충분한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잊은건가!

여자와 무기는 어울리지 않아. 
여기 우리 남자들이 든든히 지켜주지 않는가? 
너희들 중, 무기는 오로지 내가 무기를 소지해도 좋다고 허락한 일부만 지닐 수 있다.

아테나가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아이를 야생으로 던지는 꼴 아닙니까. 마을은 당신이 벌인 소동으로 인해 이미 폐허입니다.”

데메테르도 거들었다.

“…당신이 보낸 아이라는 소문이 나면, 이 애가 거기서 생활하는 게 더 고달파질거에요.”

“소문이라,”

제우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 때, 아르테미스가 구순술* 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입술을 읽어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는 기술이란 뜻으로, 학술용어로는 독화법(讀話法, oral method)이라고 한다.

‘형상은 허상일 뿐. 달빛을 마주하고, 그 달빛으로 빚어낸 활을  쏜다고 생각해. 그거면 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마주한 시선에 온기가 오갔다.

“저것의 안위는 내 알바가 아니다. 그저 내가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면…”

“판도라.”

“뭐?”

“내 이름, ‘저것’이 아니라 판도라야.

제우스는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희한하게 생긴 요물이, 말 한마디 지는 법 없이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모습을 보니- 
불길 속에서도 시선을 끝까지 마주하던 프로메테우스의 눈빛과 비슷하여 매우 불쾌했다. 

“허, 그래, 판도라. 너는 어디에서 온 자 인가? 네가 누구인지 아는가?”

“…나는 끝없는 공허에서 왔어. 어둡고 춥고, 아무도 없어 외로운 곳.
 
왜 거기있었는지, 내가 누구인지는 아직 몰라.”

‘타르타로스다!’

판도라의 이야기를 들은 신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마치 우주의 일부를 똑 떼온 것처럼, 
빛나는 밤하늘을 온몸에 두른 정체모를 아이.

도대체 이 작은 아이가 어떻게 고대의 주문으로 봉인된 그 감옥의 문을 열고 나온걸까?

제우스가 판도라의 어깨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며 매섭게 추궁했다,

“어떻게 그 문을 열었지? 무슨 술수를 쓴것이냐?”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제우스와 판도라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웃음기 없는 헤르메스의 표정은 서리꽃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덩치가 태산만한 신들의 왕께서, 
자기 몸의 3분의 1크기도 안되는 여자아이를 겁박하시는 모습이, 
영… 보기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제우스도 이를 아득 아득 갈았다.

“평소처럼 회의 중간에 여우마냥 살금살금 빠져나갈 것이지, 왜 오늘은 사사건건 방해인가 헤르메스 …!!!”

“오늘처럼 회의가 재미있는 날은 흔치 않으니까요.”

이글거리는 눈을 한 제우스를 뒤로하고, 
헤르메스가 몸을 숙여 ‘나’와 눈을 맞춘채 나지막히 이야기했다.

“판도라,”

“응.”

“난 네가 처음부터 지녔던 마음을 지킬 힘을 줄게. 그게 내 선물이야.”

“처음부터 지닌 마음…?

그는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 답을 주지는 않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될거야.”

“드디어 내 차례군.”

아프로디테가 단상에서 내려와 내게 사박, 사박 다가왔다.

“판도라, 그대에게…”

말을 맺지 못한 채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작은 팔을 뻗어 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어른인데도, 아이의 몸을 가진 나보다 그의 존재가 작게 느껴졌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나에게 당신의 선물을 주세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프로디테의 빛나는 눈이 슬프게 웃었다.

“나, 아프로디테는 판도라 그대에게… 
아름다움의 축복을 내립니다.”

아프로디테가 말을 마치자, 
은빛의 빛무리가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와
‘나’를 감쌌다. 

빛의 소용돌이 가운데, 
나는 나의 모습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내가 타고난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그러나 이 모습은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아아, 나는 이 모습을, 
그 날 나무 아래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시를 낭독하던 여인들에게서, 
내 눈앞의 아프로디테에게서, 데메테르에게서, 아르테미스에게서, 아테나에게서, 
그리고 아주 오랜 기억 속의 00로부터… 본 적이 있었다!’

내가 너무도 잘 아는 형상,

인간 여자. 

아름다운 여자. 

동시에 

인간이 아닌,

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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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 2부 <만악의 근원, 판도라> 에서 판도라가 등장하기 전의 서사를 조금 더 단단히 쌓고 싶어서 이번 에피소드 <균열>를 쓰게 되었어. 재미있게 읽었니?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오고시를 찾아와줘서 고마워💕 감상평은 창작을 지속하는 데 정말 큰 힘이되니까, 남겨준다면 소중히 간직할게!🐈 ㅡ  하녹의 기록

 

소설 쓰는 하녹의 인스타 @hanokdrawdreams

 

。.。:+* ゜ ゜゜ *+:。.。.。:+* ゜ ゜゜

 

<오드캣의 증명>

Q. 프로젝트 ' 헬라의 묠니르 ' 란? 북유럽 신화 속 무기, *묠니르( Mjǫllnir ) 는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망치로, '박살 내는 것' 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틀을 부수는 새로운 여성 서사의 제목으로, '헬라의 묠니르' 를 선택했습니다. ' 헬라의 묠니르 '는 남성 중심의 서사의 틀을 깨고 새로운 여성 영웅의 서사를 다룹니다. 헬라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죽음의 신으로, 본 이야기에서는 아스가르드의 공주이자 토르의 형제입니다. 그는 천둥과 번개를 다루는 망치, 묠니르를 되찾기 위해 싸우며, 아스가르드의 왕권을 탈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헬라의 묠니르'는 고대와 현대의 모든 여성들이 금기를 깨고 억압적인 체제와 맞서 싸우는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헬라뿐만 아니라, 이야기 안팎의 모든 여성들이 ‘헬라’가 되어 남성 중심의 권력을 박살내고,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이야기를 새롭게 써내려 가고자 합니다. 그 여정을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텀블벅으로 가려면 나를 눌러줘!

멋진 프로젝트를 올려주신 하녹님 팔로우 하러 가요!
하녹의 인스타 @hanokdrawdreams


 

<고양이의 한 마디>

  • 하녹의 한 마디 : 곧 추워질 것 같아서 조금 이르게 겨울 이불을 꺼냈어. 
  • 하녹의 이번 주에 할 일 : 주2회 이상 운동, 물 많이 마시기, 책상 정리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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