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애써 덮어두었다고 생각해도, 문득 비슷한 장면 앞에서 다시 고개를 듭니다. 우리는 흔히 과거를 지나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과거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은 채 함께 걸어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 정리되지 않은 장면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들이 그렇게 현재의 틈으로 스며듭니다.
이번 달에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지만, 같은 지점에 닿아 있는 두 권의 책을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하나는 아이를 잃은 뒤, 기억과 기술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보호받던 관계가 돌보는 관계로 바뀌는 순간을 통과하는 딸의 기록입니다. 두 책은 공통으로 묻습니다. 우리는 사라진 것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기억이 지금의 삶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를요.

오성은의 소설 《블랙 인페르노》와 이강선의 에세이 《엄마와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각기 다른 장르와 서사를 지니고 있지만, 읽다 보면 묘하게 같은 감정의 결에 닿아 있습니다. 잃은 뒤에도 계속 이어지는 관계, 지나간 시간과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 그리고 쉽게 정리되지 않는 기억들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번 달 이 두 권의 책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기억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형성하는 한 부분임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나씩 따라가 보려 합니다.
돌아온 아이, 남겨진 기억
첫 번째 큐레이션 : 오성은《블랙 인페르노》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애써 덮어두었다고 생각해도, 문득 비슷한 장면 앞에서 다시 고개를 듭니다. 추억은 늘 그런 식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과거로 밀려나지도, 온전히 현재가 되지도 못한 채로요. 오성은 작가의 소설 《블랙 인페르노》는 바로 그 애매한 자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기억이 과연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에 대해서요.
이 소설의 시작에는 오래된 사고가 있습니다. 13년 전, 캠핑을 떠나던 아이들이 탄 버스가 ‘블랙 인페르노’라 불리는 절벽 근처에서 실종됩니다. 그 사고로 주인공 메건은 아들 제이든을 잃습니다. 아이를 잃은 뒤의 삶은 회복이라는 단어로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상실 이후의 시간은 무언가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기보다, 하루를 버텨내는 연속에 가깝습니다. 숨 쉬고, 밥을 먹고, 밤을 넘기는 일만이 남습니다.
“저희는 양자 컴퓨팅 시스템이 분석한 큐비트를 바탕으로 child-13의 아이들이 사건 직전의 나이만큼 성장하는 전 과정을 배속으로 시뮬레이션했습니다. 본능적인 습관부터 사소한 말투와 태도는 물론이고 사고 실험에 따른 도덕적 인식 범위와 교양 수준까지 실제와 동일한 상태로 재현했습니다.”
오성은, 『블랙 인페르노』,와우포인트 퍼블리싱, 2025, 26쪽
그런 메건에게 child-13이라는 프로그램이 제안됩니다.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AI로, 사고 이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아이의 말투와 표정, 반응까지 재현한 존재입니다. 메건은 그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제이든’을 만나게 됩니다. 열 살의 모습 그대로인 아이와요. AI 제이든과의 시간은 분명 이상하지만, 동시에 다정합니다. 메건은 아이에게 말을 걸고, 하루의 안부를 묻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시간을 보냅니다. 그 순간만큼은 상실의 통증이 잠시 옅어집니다. 추억은 그렇게 기술의 얼굴을 빌려 다시 살아 움직입니다.
이 장면을 읽으며 추억이 꼭 과거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 떠난 사람과 대화를 이어갑니다. 사진을 꺼내 보고, 지나간 문장을 다시 떠올리고, 말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에서 반복합니다.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우리 나름의 child-13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추억의 자리에 오래 머물게 두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놀랍게도 실제 제이든이 돌아옵니다.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열 살이던 아이는 스물세 살의 청년이 되어 나타납니다. 이 지점부터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갖기 시작합니다. 메건 앞에는 두 명의 제이든이 존재합니다. 상실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열 살에 영원히 멈춰 있는 AI 제이든과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낯선 모습으로 현실에 돌아온 스물세 살의 제이든.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한쪽은 슬픔을 견디게 해준 존재이고, 다른 한쪽은 시간을 통째로 잃고 돌아온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혼란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에요. 갑작스레 바꾸려 들면 뭐든 부작용이 따릅니다. 저에게 중요한 건 AI 제이든이나, 진짜 제이든이 아니에요. 메건, 다시 요리를 시작해보는 건 어때요? 그날 이후로 주방을 모두 정리했잖아요. 그 생각도 존중하지만,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이ᄋᅠᆻ어요. 제이든이 돌아왔으니 하나둘 원래대로 돌려놓는거예요. 제자리로.”
오성은, 『블랙 인페르노』, 와우포인트 퍼블리싱, 2025, 83쪽
이 소설이 인상적인 이유는 이 상황을 도덕적인 문제로 단순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보여줍니다. 사람이 왜 추억을 놓지 못하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현실 앞에서 얼마나 흔들릴 수밖에 없는지를요. 이 대목에서 저는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을 떠올렸습니다. 아내를 잃고 홀로 남겨진 남편 루디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지만, 난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당신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삶의 전부였던 사람에게 이별은 극복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 바뀌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블랙 인페르노》 속 메건 역시 그렇습니다. 그녀에게 제이든은 잃은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삶의 중심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잊어야 한다’는 말 대신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긴장감 있는 방향으로 변합니다. 돌아온 제이든을 둘러싸고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기억과 현실 사이에는 균열이 생깁니다. 이야기는 어느 순간 조용한 슬픔을 넘어 스릴러이자 추리의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과연 잊혀진 시간 동안 제이든에게는 어떤 일들이 발생했던 걸까, 그리고 메건이 붙잡고 있는 기억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이 지점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추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건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가는 경험. 그것이 《블랙 인페르노》가 가진 가장 큰 장르적 매력입니다. 이 소설이 건네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추억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추억은 당신을 붙잡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살아가게 하고 있는가.
《블랙 인페르노》는 추억을 미화하지도, 기억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말합니다. 사람은 잃은 것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 방식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고요. 그 선택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요. 이번 달 ‘추억’이라는 키워드 아래에서 이 책은 오래 남습니다. 읽고 나면 당장 무언가를 정리하게 하지는 않지만, 마음 한쪽에 조용한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질문은 각자의 속도로 오래 곱씹게 될 겁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기억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고 있나요?
헤어짐을 연습합니다
두 번째 큐레이션 : 이강선《엄마와 헤어지는 중입니다》
엄마와의 기억은 늘 뒤늦게 말을 겁니다. 함께 있을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정들이, 거리를 두고 나서야 또렷해집니다. 우리는 이별을 종종 커다란 사건으로 상상하지만, 실제의 이별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가, 어느 날 문득 마지막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엄마와의 시간은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문장이 됩니다.
이강선 작가의 『엄마와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그런 시간의 감각에서 시작됩니다. 이 책 속의 엄마는 늘 보호하고 챙겨주는 존재로 기억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그 변화는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병원 진료를 함께 가는 일, 반복되는 설명, 점점 잦아지는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다가옵니다. 관계는 소리 없이 방향을 바꾸고, 우리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엄마의 인생은 아직 다 쓰이진 않았더라도, 이미 위기와 절정을 몇 번씩 반복한 소설책일 것이다. 이제 내가 저 노트에 이어질 엄마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게 엔딩노트든 시작 노트든,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이강선,『엄마와 헤어지는 중입니다』, 부크럼, 2025, 18쪽
엄마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 딸의 위치도 함께 바뀝니다. 보호받던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 이제는 곁을 지키는 쪽으로 이동합니다. 예전에는 엄마의 등을 보며 따라가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의 걸음을 살피며 속도를 맞춥니다. 그 변화는 성숙이라기보다 책임에 가깝습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맡게 되는 역할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같은 방향을 본다는 것은, 더 이상 앞서 이끌어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돌봄은 이때부터 새로운 얼굴을 가집니다. 무언가를 해결해주는 힘이 아니라, 곁에 남아 있는 태도. 대신 결정해주기보다, 함께 고민해주는 시간입니다. 엄마를 ‘대상’으로 돌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존중하며 곁에 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돌봄을 맡은 사람은 쉽게 아플 수 없고, 쉽게 무너질 수도 없습니다. 엄마의 하루를 지탱하기 위해 자신의 하루를 먼저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책은 이 부담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무게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아플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삶을 부탁받은 자로서 엄마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으려면 내 삶을 먼저 돌보아야 했다.
이강선,『엄마와 헤어지는 중입니다』, 부크럼, 2025, 120쪽
저는 이 문장을 읽으며 돌봄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 삶의 균형을 다시 배우는 과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오래 버티기 위해 스스로를 돌보는 선택. 관계의 역전은 여기에서 또 한 번 방향을 바꿉니다. 돌보는 사람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돌보는 사람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는 인식으로.
엄마와의 관계는 그렇게 단선적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보호와 의존, 책임과 미안함, 고마움과 후회가 한꺼번에 얽혀 있습니다. 특히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감정들은 더 선명해집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기다림의 시간, 말없이 지나간 하루들이 마음에 남습니다.
엄마를 떠나온 뒤에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주 찾아가지 못했다. 한없이 기다리게 했고 외롭게 내버려 두었다. 내가 부모가 되어 보기 전에는 엄마의 기다림이 얼마나 사소한지, 그래서 더 애틋할 수밖에 없는지 알지 못했다.
이강선,『엄마와 헤어지는 중입니다』, 부크럼, 2025, 170쪽
관계의 역전은 결국 시간의 문제입니다. 내가 보호받던 시간이 있었듯, 이제는 누군가의 하루를 기다리게 하는 시간이 생깁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대개 너무 늦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문장들은 설명보다 여운으로 남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면 괜히 엄마에게 전화 한 통을 걸게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엄마와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이별을 준비하는 책이 아니라, 관계가 변해가는 시간을 기록한 책에 가깝습니다. 보호하던 사람과 보호받던 사람의 자리가 바뀌는 순간,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감정들을 서두르지 않고 바라봅니다. 떠나보내기보다, 함께 있었던 시간을 어떻게 품고 살아갈 것인지 묻는 책입니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당장 무언가를 결심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음 한쪽에서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아무 말 없이 등을 내어주던 순간, 기다리던 뒷모습, 혹은 내가 대신 설명해주던 병원 대기실의 풍경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장면들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 이 책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한 셈입니다.
brand story
월간 마음건강 by 오프먼트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와 매거진은 늘 애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과 쉼의 밸런스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고 연구하는 마음건강 예방 브랜드 오프먼트 offment에서 만듭니다. 아래의 홈페이지 버튼을 눌러, 본 아티클 외에도 교육, 워크숍, 공공 프로젝트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오프먼트의 프로젝트를 만나보세요. 그리고 뉴스레터와는 또 다른 깊이가 있는 월간 마음건강 매거진 버전도 만나보세요. 조금 더 긴 호흡과 깊이 있는 인사이트가 담긴 매거진 전용 아티클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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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
서로 다른 두 권의 책을 병치하고, 나열을 넘어 서로에게 스며들게 만드는 글이 뭉클합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게 되네요. 책을 쓴 제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던 부분을 터치해 주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저도 각 잡고 제 책의 독자가 되어 독후감을 써 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늘 응원하겠습니다.
강동훈
내 글의 독자가 되어준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합니다. 사려깊은 시선으로 삶을 문장으로 풀어내주신 작가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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