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

가장 가깝고 다정한 단어, '가족'. 우리는 흔히 가족을 무조건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안식처로 여깁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삶에서 가장 깊은 상처와 피로감을 남기는 존재 역시 가족일 때가 많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의 짐이 무거워지거나, 집안의 도리에 부응하지 못해 묘한 죄책감에 시달려본 경험이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남들처럼 화목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이토록 갈등이 반복되는 걸까요?
어쩌면 그 피로감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정답이라 믿어온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이 실은 누군가에게 숨 막히는 역할극의 대본이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헌신을 강요하는 구조, 며느리와 사위 등 역할에 따라 다른 무게의 짐을 지우는 관습들 속에서 우리는 한 번도 의심 없이 사회가 정해준 배역을 연기해왔던 것은 아닐까요.
이번 <월간 마음건강>의 주제 '가족'을 맞아 김지혜 작가의 『가족각본』을 소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책은 개인의 탓으로 치부했던 가족 내의 갈등을 사회가 짜놓은 '각본'이라는 관점으로 서늘하게 해부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를 직시하고, 누군가의 기대에 맞춘 배역이 아닌 온전한 내 모습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마주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은 명쾌한 해방의 실마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명절이나 매달 찾아오는 정기적인 가족모임이 즐겁기보다 왠지 모를 피로감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당신의 성격이나 예민함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가족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안식처'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때로는 그 안식처가 가장 견고한 구속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그 답답함의 실체는,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암묵적으로 부여된 '역할'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듬직한 아들', '살가운 딸', '도리를 다하는 며느리와 사위'처럼 우리는 가족 안에서 끊임없이 정해진 모습을 연기하도록 요구받습니다. 내 마음의 소리보다 사회가 정해둔 기준을 따르다 보니, 가장 편안해야 할 관계가 가장 버거운 숙제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족 관계 이면에 누군가 치밀하게 짜놓은 질서가 숨어 있다면 어떨까요?
김지혜 교수는 저서 『가족각본』을 통해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어온 가족의 형태가 사실은 국가와 사회가 정교하게 설계한 하나의 ‘각본’임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가족이 견고한 각본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각본에 따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딸 또는 아들로서의 역할을 기대받고, 성인이 되면서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 며느리와 사위 등의 역할을 맡는다.
김지혜, 『가족각본』, 창비, 2023, 9쪽
이 각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특정한 배역을 할당하고, 그 배역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개인을 ‘부적응자’ 혹은 ‘불효자’로 낙인찍으며 죄책감을 심어주곤 합니다. 오늘은 이 보이지 않는 각본이 우리의 삶, 특히 가장 사적인 영역인 '연애와 결혼'에 어떻게 침투해 있는지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내 삶에 침투한 각본 : 아버지가 건넨 배우자의 세 가지 조건
이 '가족각본'은 결코 거창한 법전이나 제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모님의 입을 빌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아주 구체적인 ‘삶의 가이드라인’으로 스며듭니다. 저 역시 그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군대를 갓 전역했을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는 인생의 선배로서, 그리고 집안의 어른으로서 앞으로 제가 만나야 할 배우자의 조건 세 가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당부하셨습니다. 당시의 저에게 그 말씀은 아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아버지의 깊은 연륜이자 사랑의 표현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가족각본』의 렌즈를 통해 다시 복기해 본 그날의 대화는, 우리 사회가 유지해온 가부장적 질서의 핵심을 관통하는 ‘완벽한 각본’ 그 자체였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엄숙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종교가 같아야 한다. 우리는 주말에 다 가족행사 하는데 교회 다닌다고 빠지고 하면 힘들다. 둘째, 오빠나 남동생이나 집안에 남자가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네가 두 집 살림하며 아들 노릇 다 해야 한다. 셋째, 몸이 너무 약하면 안 된다. 애기 잘 낳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통적 가치관'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첫 번째 조건인 ‘종교의 일치’는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보다 가문의 통합과 원활한 질서 유지를 우선시하는 집단주의적 통제를 의미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다름은 지워지고, 오직 ‘관리하기 편한 구성원’만이 환영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인 ‘처가의 남자 형제 유무’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이는 남성을 오직 집안을 책임지는 ‘관리자’ 혹은 ‘기둥’으로만 규정하는 성 역할의 고착화를 보여줍니다. 여성의 집안은 남성이 ‘구원’하거나 ‘책임’져야 할 불완전한 대상으로 타자화되며, 남성에게는 ‘아들 노릇’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 그를 집안의 도구로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신체적 건강’에 대한 강조는 여성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는, 가계를 잇기 위한 재생산 도구로서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도구적 여성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평소에 잘 인식되지 않지만 가족의 명칭이나 호칭은 온통 성별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 성별이 바뀌면 딸이 아들이 되고, 엄마가 아빠가 되고, 누나가 형이 된다. 호칭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기대도 달라진다. 가족 안에서 역할이 바뀐다는 말이다. 당연한 듯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같은데 성별 하나로 가족 사이에서 바뀌는 게 정말 많다.
김지혜, 『가족각본』, 창비, 2023, 10쪽
이처럼 우리는 각본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닌 철저히 성별에 기반한 역할로 치환되며 평가받습니다.

사랑마저 검열하게 만드는 각본의 무서운 힘
이 에피소드가 단순히 '옛날 어른의 지나가는 잔소리'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 각본이 실제 제 삶의 선택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건대, 저 역시 실제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 배우자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연애 상대를 고르고 필터링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순수한 호감을 느낄 때조차 제 마음속에서는 본능적으로 ‘이 사람은 우리 집안의 질서에 잘 융합될 수 있을까?’, ‘나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지는 않을 처가인가?’, ‘우리 부모님이 좋아하실 만한 조건을 갖췄는가?’를 묻는 자기검열이 먼저 작동하곤 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자율적이고 뜨거워야 할 감정마저도, 이미 짜인 각본의 검열대 위에서 난도질당했던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김지혜 교수가 경고하는 ‘각본의 내면화’입니다. 외부의 강압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 각본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수용하여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효도’라는 아름다운 명목 아래, 혹은 ‘갈등 없는 편안한 삶’이라는 유혹 아래 타인이 써 내려간 각본의 충실한 배우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진실한 욕망’과 ‘상대를 편견 없이 바라볼 권리’입니다.
이러한 '내면화된 족쇄'는 비단 남성들의 자기검열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각본은 가부장제 안에서 가장 많은 헌신을 요구받는 여성들에게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교묘하게 작동합니다. 김지혜 교수는 책 속에서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통찰을 빌려 이 억압의 본질을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69년에 발간된 『여성의 종속』에서 “실질적으로 결혼제도야말로 우리 법체계 안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노예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직설한다. 그런데 여성에게 강요된 “족쇄는 그 성질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여성이 “강요에 의한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노예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혼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타인의 삶에 종속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김지혜, 『가족각본』, 창비, 2023, 35쪽
나와 타인의 삶을 옥죄는 이 견고한 틀이 결코 자연스러운 섭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쓰인 '대본'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낡은 연극을 멈추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국가가 은폐한 책임, 가족에게 떠넘긴 돌봄
그렇다면 왜 국가는 이토록 견고하게 '정상 가족'이라는 각본을 수호하려 할까요? 그 기저에는 냉혹한 경제적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공공부문 지출 비중이 매우 낮은 축에 속합니다. 국가는 마땅히 져야 할 사회보장의 책임을 지는 대신, '가족부양 우선의 원칙'을 내세워 돌봄의 책임을 오롯이 사적인 영역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장경섭은 ‘가족도덕‘의 회복을 강조하는 정치적 기조의 이면에, 국가가 사회보장 책임을 축소하면서 이를 합리화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중략) 한국은 사회보장에 필요한 비용을 아끼고 가족에게 돌봄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렇게 기업 역시 오랜 시간 돌봄의 책임을 피하며 이익을 누렸다.
김지혜, 『가족각본』, 창비, 2023, 199쪽
이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가족은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공동체가 아니라, 각자의 생존을 위해 서로를 무한 책임져야 하는 '의무의 굴레'가 됩니다. 가족이 없는 이들은 '낙오자'가 되어 시설로 보내지고, 가족이 있는 이들은 서로의 족쇄가 되어 빈곤과 돌봄의 늪에서 허덕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효도'와 '희생'이라는 고결한 미덕 뒤에 감추어온 가족 제도의 뼈아픈 민낯입니다.
각본을 덮고, 우리만의 언어를 찾아서
이제 우리는 이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낡은 각본을 덮을 용기를 내야 합니다. 누군가를 조건의 목록으로 체크하며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온전한 단독자로서 마주하고 존중할 수 있는 시야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가부장제의 관성을 깨고 각본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단순히 부모님께 반항하거나 가족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를 사랑할지,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살아갈지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삶의 주권’을 회복하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이 써준 대본 속의 조연으로 남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각자의 진실한 언어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우리만의 새로운 관계 지도를 그려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 시작은 바로 내 마음속에 뿌리 깊게 박힌 ‘조건의 목록’을 과감히 지워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가족각본을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요?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추천 큐레이션 ① 김희경『이상한 정상가족』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아동과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배제하고 억압하는지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사랑의 매'라 불리며 훈육을 빙자해 온 가족 내 체벌부터 돌봄의 무거운 짐을 오롯이 개별 가족에게 떠넘긴 국가의 무책임까지, 한국형 가족주의의 서늘한 민낯을 낱낱이 고발합니다. 『가족각본』이 조명한 젠더 권력을 넘어 아동 인권과 사회적 연대로 시야를 넓히고, 가족의 짐을 사회와 함께 나누는 새로운 형태의 따뜻한 공동체를 상상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적극 권합니다.
추천 큐레이션 ② 최지은『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책은 출산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기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18명 여성들의 솔직하고 다채로운 목소리를 담아냅니다. 100%의 굳건한 확신보다, 때때로 흔들리고 고민하면서도 자신만의 단단한 일상을 구축해 나가는 이들의 인터뷰는, 무례한 오지랖에 맞설 든든한 용기를 전해줍니다. 꼭 부모가 되지 않더라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 확인하고 싶은 분들께 이 다정한 연대의 기록을 적극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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