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
저에게는 얼마 전부터 ‘의식적 혼자 있기’라는 취미가 생겼어요. 말 그대로 의식적으로 내가 원해서, ‘혼자 있기’를 선택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인데요. 원래 있는 심리학 용어라던가 그런 건 아니고요, 지난 설 연휴 때 우연히 제 머릿속에서 ‘뿅’하고 떠오른 단어예요. 쉽게 다른 말로 하자면 ‘나 자신과의 데이트하기’라고나 할까요? 그날은 눈이 아주 많이 온 다음날이었어요. 아마 설 당일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날 여러분의 동네에도 폭설이 왔었나요? 우리 동네는 그야말로 삿포로처럼 눈이 내렸더라고요. 너무 많이 눈이 쌓인 데다 빙판도 생겨서, 가족들은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했어요. 대신 차례를 끝내고 낮잠을 자러 뿔뿔이 방으로 흩어졌지요. 하지만 저는 잘 수 없었어요. 왜냐고요? 수면 리듬을 바로잡는 중이었거든요. 20년 넘게 지병처럼 불면증을 겪던 타고난 불면 체질인 제가 몇 주 전부터 수면제 없이 잠을 푹 잘 수 있게 되어서(정말 좋은 소식이죠? 이 노하우는 다음번에 한 번 또 다른 오프레터로 전해드릴게요), 이렇게 잘 자게 되었을 때 수면 리듬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그러니까 낮잠 절대로 자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던 거에요. 그럼 뭘 하지?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설 당일 오전은 도무지 할 일이 없는 시간이더라고요.
제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기혼자라 친정이나 시댁에 가 있으니 만날 수도 없을뿐더러, 싱글인 친구라도 고향에 대부분 가 있으니까요. 친구 못 만나지, 가족들은 모두 잠들었지, 어지간한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지...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거예요. 혼자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자꾸 꾸벅꾸벅 졸려고 하길래, 롱패딩에 몸을 둘둘 감싸고 무작정 밖으로 나섰어요. 사람이 정말 정말 없더군요. 그야말로 거리가 휑~ 하달까요? 그래서인지 혼자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는 감각이 어느 때보다도 훅 가슴 속에 들어오더라고요. 괜스레 쓸쓸하고 헛헛하고 적적한 이때, 갑자기 친구 은경이가 떠올랐어요. 전화를 걸면 자주 안 받는 내 친구 은경. 한 번에 받는 일이 거의 없는 은경. 혼자서도 너무 잘 사는 은경. 그녀는 제 전화를 못 받고 나서 한참 뒤에 다시 걸어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죠.
은경 : “안녕~ 재열, 전화했었네?”
나 : “응, 일하고 있었냐?”
은경 : “아니, 데이트~”
나 : “너네 신랑이랑?”
은경 : “아니, 나 자신과의 데이트~”
나 : “뭐야, 그냥 혼자 있었네. 근데 왜 전화 안 받아.”
은경 : “야, 나와의 데이트도 데이트거든. 방해받고 싶지 않거든.”
이상하게 그날따라 이 대화가 머릿속에 맴맴 돌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문득 ‘지금처럼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날이 일 년 중에 몇 일이나 될까?’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으레 보내는 새해 인사 카톡도 오전 일찍 한차례 다 왔었고, 친구들도 대부분 가족이랑 있으니, 나한테 만나자고 연락할 일 없고, 업무 연락이 올 일 없고, 거리에 사람도 없고, 이렇게까지 ‘고요’한 시간이 자주 있나? 없더라고요. 휑한 게 아니라 고요한 거라고 느껴지니까 왠지 이 시간이 귀하고 희소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 귀한 시간을 은경이처럼 ‘나와의 데이트’에 써 봐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나와의 데이트가 처음이라 뭘 할지 모르겠기에 타인과 데이트 할 때를 떠올리며 하나씩 실천을 해 봤지요.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첫째, 핸드폰을 잠금상태로 만든 거였어요. 데이트할 때 최악인 건 역시 사람 앞에 앉혀두고 폰만 쳐다보기잖아요? 그래서 폰을 단호하게 잠금 앱으로 잠가버린 뒤 둘째, 데이트 상대인 나 자신에게 물어봤지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딜 가고 싶은지 말이에요. 그냥 하염없이 걷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사람 없을 때, 사람들이 눈 밟지 않아서 깨끗한 상태일 때 최대한 많이 눈동자에 담으며 걷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걸었어요. 아주 천천히, 느리게, 그렇지만 오래 오래, 내가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말이예요.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계속 나 자신에게 말을 걸었지요.
“야, 진짜 예쁘다. 나오니까 너무 좋다.”
“완전 삿포로 갔을 때랑 거의 똑같네?”
“저 사람들 플라스틱 박스에 눈 담에서 뭐 하는 거지?
"아~ 꾹꾹 눌러서 벽돌 만드네? 이글루 만드는 건가? 대박이네?”
물론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있는 또다른 나에게 계속 말을 거는 이 과정이 꽤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외롭지가 않고, 굉장히 충만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들이 여기까지 읽으시면 ‘그냥 혼자서 걸어 다니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했다는 거 아닌가?’라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게 맞아요. 그런데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첫째, 내가 ‘나’와 함께 있기를 ‘의식적으로 선택’했고 둘째, 그 시간을 충실히 보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 스마트폰, 티비 등등의 모든 외부적 환경으로부터 능동적으로 off를 선언했다는 것과 셋째,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하고, 귀를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 ‘혼자이지만 소통 중인’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는 거죠.
그날 이후로, 저는 때때로 캘린더에 나와의 데이트 약속을 잡아둡니다. 이 시간만큼은 의식적으로 혼자 있겠노라고 나 자신에게 시간을 선물하는 거지요. 10분이든, 1시간이든 하루 종일이든 말입니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저에게 그날 뭐하냐고 물을 때, 이제는 대답합니다. “어, 나 그날 선약 있는데”라고요. 나와의 약속이 사실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선약일지도 모르니까요.
이번주의 추천
:: 고요함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대체로 오프레터의 말미에 플레이리스트를 추천하곤 했어요. 하지만 오늘은 고요함 그 자체를 추천하고자 합니다. 나와의 데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나 자신에게 물어보고 들어보는' 자기와의 소통이었어요. 음악 조차 때로는 또다른 방해요소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가끔은 온전히 고요한 시간, 고요한 상태로 나를 데리고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소리가 사라진 여백에, 또다른 나의 목소리가 들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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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오 재열작가님~ 오늘의 레터는 많이 공감되어 반갑기도 한 내용이었어요! 저는 평소에 동네산책 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최대한 짐 없이 주머니에 핸드폰만 넣고 슬슬 걸어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핸드폰은 무음이고 노래는 듣지 않으며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온전히 들어요. 근데 정말 신기한게 평소에는 항상 목적성을 두고 어딘가로 향하기 위해 집을 나서지만, 이렇게 목적성 없이 산책을 시작하게 되면 이상하게도 집 밖으로 나오기만 했을 뿐인데도 뭔가 자유인이 된 것 같고 되게 기분좋은 벅차로움이 생겨요. 일상 속 스트레스에서도 벗어나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갖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게 저와의 데이트 시간이었다는 것을 오늘 깨닫게 되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에는 저와의 데이트를 많이 하지 못했는데 일주일에 1회는 정말 30분이라도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어줘야겠어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저도 오늘 문득, 요즘 너무 바쁜 일정에 치여사느라 나 자신과의 데이트를 하지 못했구나... 되돌아봤어요! 내일은 꼭 저 자신을 위한 데이트코스를 짜봐야겠어요. 주말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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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키마
나 자신과의 데이트... 어감이 참 좋네요. 혼자 있는 시간이 좀 더 소중해지는 느낌이에요. 나와의 데이트 약속을 잡는다는 것도 신선하고 재밌어요. 사실 혼자 있는 건 똑같을 텐데... 실제 캘린더에 약속도 한번 적어 보고, 의식적으로 시간을 보내면 조금 더 특별해질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을 때 나와의 선약을 고려한다는 건 진짜 한번도 생각 못 해봤어요. 물론 나의 컨디션이나 휴식시간을 고려해서 잡긴 하지만... 나와의 선약이라니! 좀 더 의식적인 혼자만의 시간이라, 좀 더 내가 나를 챙겨주는 느낌이라 좋네요. 이러다 혼자서만 너무 잘 지내면 어쩌죠?ㅋㅋ 그래도 혼자만의 시간이 많은 저에게는 딱이에요~ 야호!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정말 그렇죠?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뭔가 단어 하나에도 의미가 훨씬 더 깊어지는 이 느낌. 저도 이제는 선약을 꼭 만들어서 내가 나를 데리고 놀러나가는 시간을 늘려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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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
“야, 나와의 데이트도 데이트거든. 방해받고 싶지 않거든.” 이 말 너무 멋있어요! 읽고 며칠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나와의 약속'이라는 말은 꼭 자기개발에서만 쉽게 쓰이는 것 같더라고요. 어떤 목표를 위해서 성실하게 실천해야 할 때는 그렇게 나와의 약속..나와의 약속..하면서 왜 쉬고, 탐구하고, 즐기는 것들에서는 나와 약속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이번 레터는 특히나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께 귀감이 되어줄 것 같아요 :)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맞아요. 그러고보면 그친구랑 민정님이랑 결이 잘 맞을거 같기도 하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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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누나
최근에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퇴근 후 혼자 할게 없다! 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랬었어요 왜 할게 없지? 혼자?라서 할게 없다고? 그럼 무엇이든 누군가와 꼭 함께 해야 의미가 있나? 그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에 소극적이고 때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혼자로 단단해져야 누군가와 함께해도 더 행복할텐데 말이죠 따로 시간을 내서 나와의 데이트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저는 운전하면서 나와의 대화를 많이 해요 두명의 내가 대화를 나누는 상황극으로요 ㅎㅎㅎ 물론 평온할 때보단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거나 할 때 이런 상황극을 더 많이 하는데요. 그렇게 하다 보면 생각이 좀 정리되더라고요^^ 저도 "혼자는 천국도 안가!!"라고 말했던 사람으로써 지금도 좋은 건 혼자보단 함께하는게 좋지만 작가님이 말하는 '나와의 데이트'는 또다른 결의 행복을 충전해 줄듯하네요 산책하기 좋은 계절 봄! 저와의 데이트 날짜를 잡아봐야겠어요~! 오늘도 설레는 제안 감사합니다😊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혼자라는 단어가 가지는 어떤 부정적인 어감은 확실히 집단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특히 심한거 같아요. 저도 벚꽃구경을 여럿이서 한번, 나자신과 한번 해볼까해요! 곧 꽃피는 계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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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뭔가 채워야할 시간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멋진 생각이라니! 은경님과 재열님 덕분에 저도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바쁜 일상 속 할 일 없는 멍한 시간들을 나에게 다정해지는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여봐야겠어요:)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ㅎㅎㅎ 저도 내일 하루를 꼭 그렇게 보내보려고요 ㅎㅎ 저 자신과 약속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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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러버 리린
저도 주기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편인데, 그래서인지 이번 레터가 더 공감이 되었어요. 신기한게 핸드폰, 라디오, 음악 이 중 하나만 있어도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기는 어렵더라구요~ 그런 것들로 일상에서 참 많은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요. 평소에는 핸드폰으로 사진 찍는 것을 습관을 달고 살 정도로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는데, 오히려 아주 가끔씩 몸뚱아리 하나만 이끌고 밖으로 산책을 나섰을 때 더 해방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점점 디지털 기기와 뗄 수 없는 사회가 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역설적으로 기기와 연락, 소통과 완전히 떨어져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좋은 레터 감사합니다! :-D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디지털기기가 나를 오롯이 나로 지내게 하는데 때로는 방해가 되는 것 같아요. 무수히 많은 연결들을 어찌보면 반 강제로 계속 눈 앞에 가져다주니까요. 리린님의 이번 주말도 조금 더 안온하고 평온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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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의 하루
'혼자 있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건데요' 라는 제목이 인상 깊어요. 왠지 든든한 느낌이랄까요? 회사 앞 식당에서 혼밥을 할 때면 어김없이 왜 혼자 먹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라요. 그리고 그들과 종종 같이 앉아 먹게 되는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왠지 불편한데 말은 못할 때가 참 많았는데요. 이 글을 보니 확실히 알겠어요. 제 자신과의 데이트 시간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였다는 것을요! 다음에는 나와의 소중한 시간을 위해 식사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해봐야겠어요🙂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ㅎㅎㅎ 맞아요! 나는 나를 데리고 시간을 보내는 중이지, 혼자 외따로 떨어져있는게 아닌데 말이죠. 침해받고 싶지 않은 귀한 시간일 수도 있음을 우리 자신부터 느껴야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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