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5 반복하리 !

매일의 반복된 조각들을 덧대어 일상을 꿰매자

2026.07.21 | 조회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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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i.

동티모르 사람들의 입 모양을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이 단어가 참 다정하게 쓰인다는 걸 알게 됩니다. 떼뚠어로 ‘다시’, 혹은 ‘한 번 더’를 뜻하는 말. 무언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나 멈추었던 행동을 이어갈 때 사람들은 툭, 이 단어를 문장에 넣어 건네곤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제 뉴스레터의 이름인 ‘하리(Hari)’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세우다, 건축하다’라는 그 단어의 묵직함에 마음이 부풀었던 것도 잠시, 낯선 딜리라는 땅 위에서 나라는 사람의 일상을 꼿꼿하게 세워가는 일은 결코 한 번의 커다란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정한 하루의 시간이 주어지듯, 매일의 정직한 ‘Fali(반복)’가 필요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몸을 일으키고, 같은 길을 따라 출근을 하고, 낯선 언어를 입 안에서 수없이 굴려보고, 묵직해진 고민들을 다시 품어 안는 일. 허둥지둥 대던 서투름을 지나 매일의 쳇바퀴를 묵묵히 굴려 나갈 때, 비로소 제 삶의 뼈대도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반복’을 통과하며 나만의 속도로 일상을 세워간 한 주였는데요. 

저와 함께, 묵묵히 반복되며 단단해진 이번 주의 조각들을 천천히 꺼내보실래요?


🛞 무너지지 않을 루틴, 권태를 부수는 사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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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에서의 제 하루는 꽤나 단정하고 견고한 반복적 원을 그리며 돌아갑니다.

아침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산행 걸음으로 하루를 열고, 출근 후에는 동화책들이찾아갈 도서관으로의 여정을 위해 위해 쉼 없이 테툼어 라벨을 만들고 또 부착해요. 매주 화요일 아침이면 여지없이 저를 기분 좋게 긴장시키는 떼뚠어 과외가 기다리고 있고, 하루의 끝에는 선선해진 밤공기를 가르며 땀을 흠뻑 흘리는 배드민턴을 치죠.

어찌 보면 매일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단조로운 ‘Fali(반복)’의 연속이에요. 타국에서의 삶이라고 하면 매일이 스펙터클할 것 같지만, 사실 이렇게 똑같이 굴러가는 쳇바퀴를 보고 있자면 이내 권태로움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낯선 땅 한가운데서, 이 반복되는 루틴은 오히려 저를 무너지지 않게 꽉 붙잡아주는 가장 강력한 중력이자 닻인 것 같기도 해요. 타향살이의 예기치 못한 피로감이나 헛헛함이 불쑥 밀려오려 할 때도, 내일 아침엔 다시 산에 오르고 출근해서 라벨을 붙여야 한다는 그 당연하고 성실한 규칙들이 저를 단단하게 세워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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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단단한 쳇바퀴가 결코 권태로워질 수 없는 진짜 이유가 있어요. 일상이 흔들림 없이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기에, 오히려 그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미세한 변주들이 유독 선명하고 눈부시게 다가오기 때문인데요. 원 사이로 마주친 검정 고양이와의 다정한 눈맞춤, 우연히 마주쳐 잠시 숨을 멎게 했던 사슴의 깜찍함, 길가에 툭 떨어진 이름 모를 낯선 열매가 안겨준 아주 무해한 호기심들. 그리고 결국 젤라또 없는 이 나라에서 직접 만들어 먹은 쫀득하고 고소한 쌀 젤라또 한 입까지.

만약 제 삶이 매일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고 불안했다면, 이런 사소하고 귀여운 순간들을 기민하게 알아챌 여유조차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정직한 반복의 힘. 그리고 그 반복의 틈새를 채우며 일상이 권태로워질 틈을 주지 않는 사소한 것들의 위대한 힘.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돌아가며, 딜리에서의 제 일상은 오늘도 아주 단단하고 고유한 모양으로 빚어지고 있습니다.


🏃‍♂️  다시 돌고돌아 내게로 달려온 묵직한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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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틴이라는 단단한 쳇바퀴를 굴리며 일상의 안정을 찾아가던 중, 마음 깊은 곳에서 또 다른 묵직한 반복을 마주한 날이 있었는데요. 유월까지 늘 사무실에서 씩씩하게 함께 일하던 현지 동료 산드라의 갓 태어난 아기를 보러 다녀온 날이 그랬습니다.

 사무실의 동료가 아닌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아기와 함께 있는 산드라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무척 뭉클했어요. 그 기쁘고 따스한 마음도 잠시. 새근새근 숨을 쉬는 그 작고 부드러운 생명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며 기쁘게 축하를 건넸지만, 제 머릿 속 한켠에는 축복의 마음만큼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묵직한 감정들이 조용히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토록 경이로운 생명의 탄생 앞에서, 저는 개발도상국이자 최빈민국으로 분류되는 동티모르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병원과 산후조리원에서 케어를 받을 수 있는 익숙한 한국의 모습과 달리, 산드라는 재왕절개의 상처가 아직 아물기도 전에 좁은 방 한켠으로 돌아와 아이와 함께 있었어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한 생명을 온전히 키워낸다는 것, 엄마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경력이 단절될 위기에 처한 여성의 삶이 감당해야 할 무게, 그리고 이 작은 아이와 산드라가 함께 성장하며 마주해야 할 세상의 거친 단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괜시리 복잡해졌습니다.

 사실 인권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의 삶에 대한 고민은 제가 국제개발협력이라는 길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늘 생각해왔던 것들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꿈을 적는 칸에 "인도 여성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국제인권변호사"라고 썼을만큼이요.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던 그 활자 속의 거대하고 추상적인 담론들이, 제 눈앞에서 숨을 쉬는 작은 생명의 온기로 닿는 순간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현실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이건 더 이상 국제개발이느니 인권이느니 하는 이론적인 고민이 아니라, 산드라라는 나의 소중한 친구가 견뎌야 할 삶이자, 이 머리에 숨구멍조자 아직 닫히지 않은 작은 아이가 살아가야 할 생생한 내일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혹은 현실의 업무에 치여 한편으로 미뤄두었던 그 가장 본질적이고 날카로운 질문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가슴을 쿵쿵 두드렸습니다. 당장 제가 세상을 바꿀 명쾌한 해답이나 거창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을거라는 현실을 압니다. 하지만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 무거운 질문들을 외면하지 않고 아프게 공감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 반복의 시간이야말로, 제가 앞으로 이 분야에서 어떤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가장 단단하게 해주는 나침반이 되지 않을까요?


🌊 반복되는 파도의 리듬, 내일을 마주할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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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질문들을 안고 맞이한 주말, 저는 다시 바다로 향했습니다.

지난번 바다에서는 파도의 움직임을 느낄새도 없이 잔뜩 겁을 먹고 귀가 아파 수면 위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던 제가, 이번 토요일에는 마침내 고요한 바닷속 세상에 무사히 안착했습니다. 비염약을 먹고 가서 그런지 이퀄라이징이 훨씬 잘되어 귀를 먹먹하게 채우는 수압, 바깥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채 오직 ‘스으읍- 하아-’ 하는 저의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려오는 물속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요. 그 깊고 푸른 고요함 한가운데에 가만히 머무르며, 저는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질문들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내일의 파도를 마주할 조용한 용기를 얻었습니다. 거대한 바다는 저에게 조급해하지 말고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그렇게 천천히 나아가면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어쩌면 몸이 휩쓸려갈 것 같은 파도에 몸을 맡기고 누워 핀을 발에 끼우고, 버디가 끌어주는 힘에 나를 가만히 맡기는 것, 다같이 BCD의 공기를 빼고 수면에서 수중으로 내려갈 때의 잔잔하게 몸을 아래로 내리는 법. 손을 움직이지 않고 두 손을 잡은 채 가만히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법. 시끄러운 소리가 아닌, 손으로 수화처럼 말하는 다이버들의 신호를 느리게 바라보는 것. 그렇게 꿈같은 다이빙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이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제 안에는 바다의 일정한 리듬, 파도의 고유한 흐름이 계속해서 맴돌았습니다. 밀려오고 또 밀려가는 파도의 끝없는 반복이 주는 묘하고도 거대한 안정감. 가만히 눈을 감고 아직도 파도 속에 누워있는듯한 착각에 그 리듬을 느끼다 보니, 문득 이번주에 안아보았던 산드라의 아기가 떠올랐습니다. 무서워했던 제 품에 안겨 일정한 심장 박동과 토닥이는 리듬 속에서 새근새근 평안하게 잠들어 있던 그 작은 생명.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합니다. 거대한 바다도, 갓 태어난 작은 아이도, 그리고 낯선 타국 땅에 서 있는 저라는 사람도 결국 무언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정한 리듬 속에서 가장 잠잠해지고 평온을 찾는 존재라는 사실이요. 파도처럼 기꺼이 반복되는 그 리듬이, 결국 불안한 우리를 가장 든든하게 안아주는 힘이었던 거라는 사실 말이에요. 


동티모르라는 낯선 땅에서 저라는 사람의 일상을 단단하게 세워주는 것은 단 한 번의 커다란 성취나 극적인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듯하지만 그 안에서 다정한 변주를 피워내는 땀방울 섞인 루틴들, 마음을 어지럽히면서도 끊임없이 내게로 돌아와 나침반이 되어주는 묵직한 질문들, 그리고 불안을 잠재우고 다시 내일을 마주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숨소리의 일정한 반복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은 어떠셨나요? 혹시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하루, 매일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팍팍한 일상에 문득 권태를 느끼거나 지쳐 있지는 않으신가요?

만약 그렇다면, 오늘 하루도 무너지지 않고 그 무거운 쳇바퀴를 성실하게 굴려낸 스스로를 아주 다정하게 토닥여주는 것은 어떨까요. 때로는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그 정직한 반복들이야말로, 사실은 여러분의 흔들림 없는 삶을 묵묵히 세워가고 있는 가장 위대하고 단단한 뼈대일 테니까요. 그리고 그 튼튼한 뼈대 위에서, 퇴근길의 고양이나 달콤한 젤라또 한 입처럼, 우리를 미소 짓게 할 찰나의 눈부신 조각들을 듬뿍 발견하게 될거에요.

기꺼이 성실하게 반복될 여러분의 다정한 내일을 온 마음으로 응원하며.

반복되는 파도의 고요한 리듬 속에서 깊은 평온을 배운 딜리에서, 하영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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