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허리 수술을 한 송숙 씨는 그 후 병원 진료를 한번도 보지 않았다. 수술 직후 코로나 사태가 일어났고, 점점 심해져 서울에 가는 게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아프던 허리가 수술 후엔 많이 좋아져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송숙 씨를 보며 그녀의 남편은 화를 냈다. 왜 그렇게 미련하냐며 병원에 가서 괜찮은지 확인을 해야지 저렇게 가만히 있다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송숙 씨는 사실 허리가 아픈 것 보다 바깥 양반의 잔소리가 더 무서웠다. 마침 해외에 사는 막내 딸이 내려왔다가 서울에 가는 길에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그녀의 막내 딸은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 보더니, 기차표보다 더 싼 비행기 표가 있다며 바로 예약을 했다. 어떻게 저렇게 핸드폰 하나로 모든 걸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점점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정신이 혼미하고,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못 내 속상하지만, 이런 시대에 한번 살아보고 죽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송숙 씨가 사는 고흥엔 비행기도 기차도 없지만,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가면 순천 기차역이나 여수 공항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꼭 바깥 양반이 차로 데려다 줘야 갈 수 있다. 송숙 씨는 막내 딸이 광주의 종합병원에 다닐 때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라고 보내 준 50만 원으로 50이 넘은 나이에 2종 보통 운전 면허증을 땄다. 그리고 막내딸이 해외로 가면서 넘기고 간 소형차 덕분에 고흥 군 내에서는 쉽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10년 동안 운전을 하면서 여러 번 작은 사고가 있긴 했지만, 크게 다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잘 아는 동네에서만 가능하다. 고흥을 벗어나면 어디로 겁이 덜컥 났다.
송숙씨에게는 딸 넷과 아들 하나가 있다. 넷째 딸은 해외에서 살고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서울에서 살고 있다.
"엄마, 누구네 집에 가고 싶어?"
막내 딸이 묻는 말에 송숙 씨는 셋째 딸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큰 딸 집에는 다 큰 손주 세 명이 있어서 잘 만한 방이 없고, 둘째 딸 집은 너무 작아서 지낼 만한 곳이 없다. 아들 네 집은 며느리가 일을 하고 있으니 불편하다. 셋째 딸 집은 집이 크기도 하고, 마침 넷째 딸이 그 집에 머물고 있으니 딱이다 싶었다. 그런데 사위에게 너무 미안해서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딸 집에 가는데 뭐가 미안해?"
넷째 딸의 철없는 말에 아무 대답도 못하는 송숙씨였다.
원래는 월요일에 병원 진료가 있었는데 CT를 찍을 수 있는 날이 수요일 뿐이라며 날짜를 바꿔버렸다. 그런데 하필 그날은 송숙 씨의 다섯 자녀들이 모두 바쁜 날이라고 했다. 큰딸과 둘째 딸은 사단법인 "해 돋는 마을"에서 독거 노인을 위한 밥퍼 사역을 하고 있는데 매주 수요일이 바로 도시락을 배달하는 날이라서 가장 바쁜 날이라고 했다. 119 응급 대원 아들은 그날 출근이라고 했다. 셋째 딸은 갑자기 그날 일이 생겼다고 했다. 넷째 딸은 하필 그날 오후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 송숙 씨의 다섯 자녀들은 모여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오후에 약속이 있는 넷째가 송숙 씨와 함께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검사와 진료를 보고, 대흥동에 있는 큰딸과 작은 딸의 사무실로 그녀를 모셔다 주면 일이 끝난 셋째 딸이 그녀를 모시고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자식들이 자신을 위해 회의를 하는 동안 송숙 씨는 소파에 앉아 가만히 책을 읽었다. 이제 겨우 칠십 사인데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영 불편했다.
월요일에 병원 진료를 보고 바로 내려갈 생각이었던 송숙 씨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위에게도 미안하고, 딸에게도 미안하고, 혼자 밥 해 먹고 있을 바깥 양반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딸들은 이왕에 푹 쉬고 가라고 하지만, 쉬는 게 쉬는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도 송숙 씨 병원 진료를 위한 공공칠 작전은 필요 없게 되었다. 셋째 딸이 약속을 바꿨고, 셋째 사위도 그날 쉬는 날이라며 함께 동행해 준 것이었다.
"어머니, 지금 보니까 70퍼센트 정도가 다시 나빠지셨어요. 계속 말 안 듣고 일 하시면 큰일 나요. 다음에 또 아파서 오시면 그땐 다시 수술 하셔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농사일 하시면 안된다고요."
의사의 단호한 말을 들은 송숙 씨는 자식들에게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시골에서 어찌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그건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그런 송숙 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남편은 아침마다 전화를 했다. 대부분 "그거 어디 있어?"로 시작하는 전화였다. 며칠 전에는 빨리 내려오지 않고 뭐하냐고 말하는 그 양반이 얄미워서 딸들에게 실컷 흉을 봐주었다. 그래도 영 마음에 걸렸던 송숙 씨는 조용히 넷째 딸에게 말했다.
"비행기 날짜 좀 바꿔 주면 안되겠니? 엄마 수요일 진료 보고 바로 내려갈게."
왜 그러냐고, 아빠가 너무 하다고 아우성이었지만, 결국 비행기 시간을 바꿔주었다.
딸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좋지만, 역시 내 집이 최고라고. 고흥으로 내려가는 비행기 안에서 송숙 씨는 생각했다.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비록 바깥 양반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말이다.
내 엄마는 작가이다. 가끔 일 하며 밤을 샌다.
엄마는 아기를 잘 돌본다.
항상 컴퓨터에 많이 앉아 있다. 글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
엄마는 책도 많이 썼다.
by Soeun
엄마는 착하다. 그리고 글을 잘 쓴다. 똑똑하고 근성 있고 선량하다.
by Jian
내 엄마는
별자리 : 사수자리, 직업 : 간호사, 성격 : 친절함
by Sulla
나는 작가이다. 아이들이 잠들면 조용히 아무도 없는 거실로 나가 컴퓨터를 켠다. 하지만 집중력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핸드폰을 들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인친님들의 피드를 구경하다 댓글을 남긴다. 브런치에도 들어가 글을 읽는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집중을 해 보지만, 역시나 잘 안 된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두 모금만 마시면 술술 글이 써질 것 같다. 그런데 여전히 안 써진다. 낮에 언니가 사다 주고 간 고구마 깡을 깠다. 맥주 두 모금에 고구마 깡 10개, 또 맥주 두 모금에 고구마 한 주먹.
고요한 밤공기 속에 꿀꺽 꿀꺽,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오늘도 틀린 것 같다. 그냥 자야겠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엄마와 진짜 엄마의 모습은 좀 많이 다르다.
by soeun's mom
내 할머니 금자 씨는 일곱 명의 자식을 두었다. 21명의 손주를 두었다. 23명의 증손주를 두었다. 내 할머니 금자 씨는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금자 씨의 흔적은 여기 저기 남아 있다.
금자 씨는 아주 조용히 돌아가셨다. 밭에서 김을 매던 중이었다. 옆에서 함께 김을 매던 며느리 송숙 씨에게 금자 씨가 말했다.
"아야, 내가 좀 어지럽다...."
송숙 씨는 뭔가 쐬~한 느낌을 받았다.
"어무이, 얼른 일어나보이시요. 병원 가야긋네요."
송숙 씨는 금자 씨를 차에 태워 고흥 읍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자마자 CT를 찍었다. 뇌졸중 초기라고 했다. 바로 입원을 해 주사를 링거를 맞았다. 그때까지도 금자 씨의 의식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후 금자 씨의 의식이 점점 사라졌다. 송숙씨는 금자 씨가 고요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금자 씨와 송숙 씨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였지만, 그 사이를 뛰어 넘은 사이였다. 지랄 같은 남편들 때문이었다. 금자 씨의 남편은 잘생긴 한량이었다. 돈을 쓸 줄만 알지 벌 줄은 몰라서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금자 씨는 굳은 일을 해야만 했다. 송숙씨의 남편은 성격이 불 같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버럭 화를 냈고, 잔소리가 심했다. 둘 다 아내를 위하는 마음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금자 씨와 송숙씨는 만나기만 하면 자신들의 남편 흉을 보았다. 시아버지와 아들의 흉을 보기도 했다. 함께 뒷담화를 까는 사이는 그 누구보다도 끈끈한 법이다.
다시 깨어날 줄 알았던 금자 씨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급하게 광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뇌혈관이 꽉 막혀 있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깨어날 가망이 없다고 선고했다. 금자 씨의 자식들은 그녀의 고향인 고흥으로 그녀를 모셨다.
금자 씨의 장례식장엔 사람이 많았다. 7명의 자식들과 며느리와 사위, 21명의 손주들과 손주 사위와 손주 며느리들이 모였다. 자식들과 손주들은 금자 씨의 사진 앞에서 많이 울었다. 특히 송숙 씨는 더 구슬프게 울었다. 조금 더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갔다면, 좀 더 큰 병원에 모시고 갔다면.... 후회가 되었다. 이젠 누구와 남편 뒷 담화를 깔까, 이제 누구랑 밭 일을 함께 할까.
송숙 씨는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렸다.
송숙 씨 옆에서 금자 씨의 손주들도 목 놓아 울었다. 특히 송숙 씨의 다섯 자식들이 더 많이 울었다. 그들은 금자 씨와 함께 오래 살았다.
금자 씨는 하늘나라에 갔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있다.
그녀의 자식들이, 그녀의 손주들이, 그녀의 증손주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작은 키를, 그녀의 주름진 얼굴과 쌍꺼풀 없는 눈과 오른쪽 볼에 오백 원 짜리 동전 만한 점과, 거친 손과 평평하던 평발과, 뒤뚱 거리며 걷던 그녀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쭘마인밀란을 구독해주시고 읽어주시는 모든 구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까지 딱 열 여섯 번의 매거진을 발행했습니다.
원래는 이탈리아와 밀라노에 대한 에세이를 가득 채우려고 시작했는데, 어쩌다보니 한국에서의 생활이 길어져서 이렇게 쭘마인서울 이야기를 쓰게 되었네요.
고민하다가 당분간 매거진을 휴제 하려고 합니다.
사실은 그동안 원고를 준비해서 투고를 했는데 좋은 출판사를 만나게 되었거든요. 다른 두 명의 작가님과 함께 쓰는 공동 저서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책 쓰기는 글쓰기와는 많이 다르다 보니, 좀 더 책 쓰기에 집중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절대 중단은 아닙니다. 밀라노에 다시 돌아가게 되는 날, 짠~ 하고 소식 전해드릴게요. 그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제 출간 과정과 소식 역시 나중에 매거진에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조금 쉬고 다시 돌아올게요~
감사합니다.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marasong
와, 출간 축하드려요~ 👏👏👏👍👍 엄마는 착하다, 선량하다... 귀엽네요!!! 🙂🙃
zzumma in Milan (118)
감사해요 마라님 😍😍 조금 쉬었다가 다시 올게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