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서 안녕하세요, 문화예술 전류 공급장치 파워 서플라이입니다. 저희는 뉴스레터의 첫 주제로 희곡 <보도지침>을 선정하게 되었어요! 희곡 <보도지침>이라는 한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파-서의 팀원들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각자만의 가벼운 리뷰를 써보았습니다.
파-서 연극 <보도지침>은 1986년에 일어난 언론 장악, ‘보도지침’에 대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의 판결 과정을 재구성한 극인데요, 시각적으로 통하는 연극이 아닌 희곡으로서 관찰된 <보도지침>은 다방면으로 해석의 여지가 많아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1장부터 3장, 앙트레부터 메인 그리고 디저트까지 구성되어 있는 저희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실까요?
- 1장 < 보도지침: 다들 어디로 갈 것인가요? > _각광脚光
각광 보도지침. 듣기만 해도 경직되게 만드는 작품 제목입니다. 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지 어느 정도 상상이 가는 제목이죠. 아마 여러분이 상상하신 것이 맞을 겁니다. <보도지침>은 언론계 흑역사로 기억되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1986년, 제5공화국 시절인 전두환 정권 당시의 일이죠. 시대 배경만 들어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실 겁니다.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는 거의 매일, 각 언론사에 기사보도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시달했습니다. 명분은 협조지만, 사실상 지침인 것이죠. 이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은 흘러가며 대중들에게 언론이 지켜야 할 역할을 다시금 상기시켜 줍니다.
각광 어떤 작품을 보든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조금씩 다릅니다. 각자의 기준이 있기에 완벽히 같을 수는 없겠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의 기준은 ‘흐름이 좋은’ 작품입니다. “굳이?”,“갑자기?”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작품, 쉽게 말해 엉뚱한 대사, 인물 등이 없는 작품을 말합니다. 저는 그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작품에 큰 매력을 느낍니다. 당연한 이야기 같아도 “굳이?”와 “갑자기?”가 나오지 않는 매력적인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각광 이러한 저의 기준에 따르면 <보도지침>은 심히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시간과 장소, 인물이 빠르게 변함에도 장면과 장면 사이가 매끄러우며 “보도지침”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적재적소에 블랙코미디를 넣어 극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죠. 이 특징 탓에 자칫하면 주제를 희화화 한 극이 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본질을 흐리지 않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며 선을 지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작품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품 안으로 독자를 불러내어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를 방청객으로 만들어 부패한 언론을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죠. 작품 속 이러한 설정은 우리에게 한 나라의 국민임을 상기시켜줍니다.
각광 오늘날, 바쁘고 치열한 현대 사회 탓에 우리는 나 자신을 챙기기도 힘들죠.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역할을 할 겨를도 없는, 바쁘고 막연한 사회입니다. 이는 선거 때마다 낮은 투표율에 언론이 들썩거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부에 대한 불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대, 성별 갈등이 심화된 상황을 보고도 정부는 갈등 해소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저는 이 설정이 한 나라의 국민임을 상기시켜 국민의 역할을 마주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우리에게 쇠퇴하는 시대정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작품인 것이죠.
각광 그렇습니다. 시대정신. <보도지침>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습니다. 연극은 시대정신의 희망이라고 말하죠. 언론도 똑같습니다. 시대가 흘러가면, 시대정신도 같이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흑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시대정신은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도지침>과 같이 지극히 사실적인 작품은 우리에게 온 힘을 다해 소리칩니다. 과거를 반복하지 말라고. 시대정신이 쇠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죠.
각광 작품 속에 빠져들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와 현재의 언론 모습을 비교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머릿속 끝없는 비교 끝에 내린 결론은 현재의 언론은 과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작품의 내용이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개선되지 않은, 권력의 언론 통제를 말입니다. 시대가 흐를수록 언론의 중요성은 더 높아지고 있는데 말이죠. <보도지침>에도 나오듯, 진실의 힘은 강합니다. 그렇기에 항상 진실을 다루는 언론이 대중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하죠. 무서운 사실은 아직도 진실만이 가득해야 할 언론이 오류가 나거나 거짓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가짜 뉴스죠. 현재의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쉽게 언론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쉽게 가짜 뉴스를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시대정신은 중요합니다. 국민으로서 역할을 잘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죠. 그렇기에 국민이 진실된 앎을 가질 수 있게, 시대정신의 희망인 언론도 본질을 잃지 않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알리는 것이 이 작품의 목적이라고 봅니다.
각광 전 작품을 읽는 내내 돈결이라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돈결은 언론의 부패를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부패한 언론의 인격화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돈결과 언론 모두 본질을 잃었으니까요. 작품을 처음부터 톺아보면 대학 시절 돈결은 처음부터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불타올랐죠. 언론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지름길로 만들어졌습니다. 처음부터 꽉 막힌 길은 아니었던 거죠. 결국, 본질을 잃은 돈결은 검사로서 부패한 언론을 변호하고, 권력에게 위협을 가하는 세력에 돌을 던집니다.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말에 돈결은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합니다.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부패한 언론처럼 말이죠. 결국, 돈결이 말하는 모든 말은 결국 본인을 변호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각광 이 작품에는 “독백”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작품 <보도지침>은 무거운 독백입니다. 과거가 가장 하고 싶은 진실의 말을 담아 침묵의 세상을 향해 소리칩니다. 이 무거운 독백이 잔잔한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고 그 여운으로 흐름까지 바꿀지는 우리만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에서는 결국 원고와 피고. 그 누구도 만족할 수 없었던 중간을 택했죠. 작품 속 대학 스승이었던 원달처럼 묻겠습니다. 다들 어디로 갈 것인가요?
- 2장 < 보도지침 : 검사 최돈결과 대학생 최돈결 > _사벽
사벽 무엇이라 말할 수 있나. 책을 덮고 난 후, 딱 그 말이 떠올랐다.
“이 극은, 최대 5년 후에나 다시 상연할 수 있겠다.”
사벽 보도지침, 극작가 겸 연출가인 오세혁의 희곡집이다. 제 5공화국이었던 1986년에 있었던 ‘보도지침’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희곡집 ‘보도지침’의 전반이 그렇듯이 한국 현대사의 사건을 재구성함으로써, 2022년 독자와 관객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고 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최돈결이라는 인간의 변화와 분열 현상이다.
사벽 보도지침은 피고인 김주혁과 김정배, 피고인의 변호사 황승욱, 검사 최돈결, 판사 송원달의 법정 이야기를 적나라히 보여주고, 3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 민주주의의 민주는 무엇인가?
- 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이라 정하고 있는 국민의 <알 권리>는 어느 계층까지 적용되는가?
-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제한되어야 하는가?”
사벽 무어라 답할 수 있는가. 국민이 주인인 국가이기에 <알 권리>는 당연하고, 자유 역시 단어 그 자체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명확한 답이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대변하는 검사 최돈결은 이를 부정한다.
보도지침
“평범한 국민이 국가의 거대한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언론의 지침은 보란 듯이 따르면서 국가의 지침은 보란 듯이 거부하는군요.”
사벽 물음표가 아닌 온점으로 끝난 이 대사는, 당시 전두환 정권의 가당치도 못했던 권력욕과 선민의식을 보여준다. 검사 최돈결은 대학생 최돈결과 갈등한다. 신문없는 정부와 정부없는 신문 중, 정부없는 신문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학생 최돈결은 검사 최돈결에 내재하여 끊임없는 머뭇거림을 제공한다. 피고인 김주혁과 김정배는 대학생 최돈결을 기억한다. 법정 내에 있는 관중 간의 갈등과 자아의 충돌은 검사 최돈결에게 강한 비판과 분열을 야기한다.
보도지침
“대체 왜그래…. 왜 그렇게 뜨거워보이는 척 안달을 하고 있어…. 예전에 다 해본 것들이잖아. 마지막으로 물을께. 정말 할거야?”(필자는 검사 최돈결로 해당 대사를 해석했다.)
사벽 우리는 대학생 최돈결과 피고 김주혁, 김정배가 금서로 지정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로 연극을 올리고 고문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있다. 고문을 받았음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김주혁과 김정배, 그리고 당시의 현실을 깨달은 최돈결 중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아주 너그러히 바라보아, 검사 최돈결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잣집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한 생활을 영위해오고, 최상위층의 권력 나눔 현상, 그리고 그들의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최돈결에게 고문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어린 생각 따위를 갖도록 만들었다. 현실에 져버린 그는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어쩔 수 없이 되어버린 악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벽 희곡 ‘보도지침’은 단순히 해당 사건을 그리고 있지 않다. 탄압받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인간의 비굴함과 인간의 의지력을 대척점에 둠으로써 현재의 우리 사회와 정부에 대해 평가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우리 사회에서 국민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정부가 등장하고 있는지, 또 다른 제5공화국을 사회구성원이 무의식적으로 용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사벽 검사 최돈결은 사회를 방관하고 폭력을 행사한 이들을 축약적으로 보여준다.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다’라는 발언으로 일관하며 민주주의가 무너져내려가는 것을 방관한 자. 숱하게 이런 서사의 캐릭터를 봐왔음에도 검사 최돈결은 어딘가 더 악하다.
사벽 언론은 끊임없이 ‘검사 최돈결’과 싸워왔다. “그깟 보도지침이 대수야? 앞뒤 재지말고 들이박아!” 영화 <1987>에서 윤상삼 기자(배우 이희준 역.)가 근무하는 일간지의 사회부장역의 배우 고창석은 이 대사를 통해 기존의 코믹했던 이미지와 달리 관객에게 사이다를 날려주었다. 진실을 알리지 못하는 이들과 진실을 은폐하는 이들의 싸움은 사실상 승리자가 정해져있다. 공포를 물리친 이와 공포에 집어삼켜진 이의 결말은 다르다. 물리친 이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사회를 계몽시키고, 이롭게 만들지만, 집어삼켜진 이는 끊임없이 퇴보하고, 사회를 방관하고, 무지하도록 만든다. 국민이 어디까지 알아야하는 지 판단하는 것은 판사 송원달이 속해있던 삼권분립의 구성원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다. 그들이 아무리 거짓말을 뱉고, 당신들이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냐는 말로 비웃는다 한들, 그것은 ‘검사 최돈결’의 착각이고 오만일 뿐이다.
#11. 최후의 시간 김주혁
“1960년 4월 19일, 그 날의 신문은 아름다웠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그 날의 신문은 불태워졌습니다. 보이는 것들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보도지침 파일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언제나 꽂혀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을 꺼내보려 하지 않았을까요.”
사벽 #11. 최후의 시간에 나오는 피고인 김주혁의 대사다. 우리는 방관자의 ‘범위’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누구부터 누구까지 방관자인가. 보도지침을 내린 정부, 보도지침을 받고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검열된 뉴스와 신문을 접한 국민. 사실 언론이 말도 안되는 보도지침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에도 불구하고, 방관하는 언론사에서 이건 말도 안된다 외치는 몇 명이 존경스럽다, 감사하다라고 느끼는 이 사실이 입안을 거칠케 만든다. 물론 모두가 NO라고 외치는 사회에서 YES라고 외치는 일이 어렵기는 하나, 그들은 그 ‘NO’가 말도 안되는 권력 탐닉에서 비롯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사벽 권력을 끊없이 탐닉하는 이들의 결말을 우리는 숱하게 보았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뉴스 기사에서, 그리고 대통령 탄핵까지 국민의 손으로 이루었다. (이 대목에서 ... 누군가는 반드시 찔려야 한다.) 국민은 무지하지 않다. 언론은 정부의 개가 아니다. 보도지침의 재판기록은 본보기로 남았다. 과연 무지한 것은 누구인가.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해가며, 국민은 날이 갈수록 똑똑해진다. 눈만 감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이것으로, 재판을, 토론을, 연극을 마칩니다.
막 -
- 3장 < 보도지침: 칼보다 강한 글의 힘 > _메타포
메타포 안녕하세요! 메타포입니다:) 여러분들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언에 공감하시나요? 저는 이 말에 매우 동의를 하는 편인데요, 인터넷에서 여러 사람을 감동시키는 썰들이나 혹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악플들이 물리적인 폭력이나 위로보다 더 강하다 느끼기 때문이에요. 가끔은 저도 흉기보다 더 강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남을 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글을 쓰고싶어서이죠...
메타포 이번에 저희가 리뷰하게 된 희곡 ‘보도지침‘이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연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꺼내본 스몰토크입니다. 실제 우리나라 제5공화국 시대에 벌어졌던 언론 탄압 즉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기자의 재판을 연극으로 재구성한 희곡 ’보도지침‘. 뉴스레터를 느긋하게 준비하면서 참 재밌게 읽었는데요, 공연을 좋아하는 한 팬으로써 인상 깊었던 부분이 어디였는지 이야기하고 리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제4의 벽을 뛰어넘는 1막
#1 재판 직전
남자 오늘도 꽉 찼군요.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이 재판, 이 재판이 전 국민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 자리를 못 구해서 안달이라네요. 말도 안 돼요. 이게 무슨 연극도 아니고, 재판인데, 사람을 심판하는 자리인데, 왜 우리는 이 자리에 모인 걸까요. (중략)
메타포 연극에는 3개의 요소가 존재합니다. 바로 무대와 배우 그리고 관객이지요. 관객과 함께하는 호흡이 중요하게 작용되는 것이 공연이라고 생각하는지라, 저는 관객과 무대 사이의 간극을 부수는 대사나 연출을 좋아합니다. 제4의 벽이죠! 이 희곡의 도입부가 바로 이 제4의 벽을 넘나드는 역할을 돈독히 한 것 같아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인용 부분 중 “이게 무슨 연극도 아니고, 재판인데” 라는 대본이 특히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달까요? 이게 제4의 벽을 넘나들기 위한 장치로써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해도 희곡의 주제를 도입부에서 강조하는 것 같아 보였어요. 전체 분량 내내 한국대학교의 연극 동아리라는 시공간, ‘독백’이라는 단어,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을 인용하는 등 재판에 연극이라는 주제를 담아 끊임없이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메타포 이 외에도 공연 시작 1분 전에 멀티 배역인 ‘여자’가 일어나 실제 공연장 안내원들의 멘트와는 다르게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하는 부분도 흥미로웠어요. 무대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희곡에 녹여냈다는 점이 재밌었어요.
#2 시공간을 뛰어넘는 전개
#5 잔디밭
남자 이게 바로 독백이야. 마음의 말이지. 일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지. 마음속에 흐르는 생각을 혼자만의 시공간에서 말하는 것이 독백이다. 연극의 위대한 이유는 독백이 있기 때문이야. (중략)
#6 법정
정배 이렇듯, 진실을 담은 말은 힘이 있습니다. 가장 진실한 말을 우리는 독백이라 부릅니다 (중략)
메타포 ‘보도지침’을 텍스트로만 접해본 사람으로써, 처음으로 읽고나서 느낀 점은 중소극장에서 올려진 극이라고 하기엔 시점과 배경의 변화가 영화 시나리오 같다는 점이었어요. 희곡 보도지침은 재판장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만 스토리 전개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설명적인 대사들의 향연이 이어져 지루하게 진행될 수 있었지만,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비유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영화같기도 하면서 극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부분이 되었다고 느꼈어요. 실제 재판이었다면 정배가 육성으로 했을 말을 과거에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 있는 동아리 선배가 하는 것이죠. 과거의 경험은 현재까지 이어져 영향을 주는 법이니까요.
메타포 한편으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과거 대학생 시절의 추억이 재판장에 있는 모든 인물들의 특징이나 변화를 극대화시켜 보여주는 장치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극 중 검사로 등장하는 돈결의 상반되는 학생 시절과 현재, 보도지침을 폭로한 기자 주혁의 점차 빌드업 되는 섬세한 감정변화, 정배의 뚝심 있는 마음 모두 과거 회상 장면에서 묘사되었어요. 특히 돈결의 경우에는 현재와는 너무나 다른 형태로 대학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입체적이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3 멀티 배역의 중요성
메타포 멀티 배역인 여자와 남자는 단순 시공간을 넘나들며 배역 채우기를 위해 여러 인물을 연기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이들은 언론 탄압에 동조하는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기도 하고, 뒷일이 무서워 솔직한 증인을 하지 못하는 한 시민이기도 하고, 인물들의 내적 감정에 조언하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3 연극반
주혁 돈다, 빙빙 돈다, 어지럽다, 세상이 어지럽다, 세상이 어지러워서 난 자빠진다. 난 부끄럽다.여자 생각하면서 살지 마라. 살면서 생각해라. 시대는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뀐다.그때마다 시대의 부끄러움도 달라진다. 그때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라. (중략)
메타포 저는 이 장면에 해석의 여지가 꽤 많다고 느꼈는데, 우선 주혁이 술을 마시고선 ‘세상이 어지러워서 자빠진다‘ 라는 말은 보도지침에 의해 원하는 기사를 신문이 실지 못한 과거 자신의 부끄러움을 묘사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선배의 역할을 연기 중인 남자와 여자가 ’술을 더 마셔라’ 혹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둥 신입생 주혁에게 조언을 던집니다. 이는 과거의 주혁과 미래의 주혁의 대비 혹은 대치를 극적으로 표현해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4 리뷰를 마치며...
메타포 저는 이번에 희곡의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보다는 흥미로웠던 지점들을 3가지 포인트로 나눠 글로 정리해보았는데요, 예상보다 생각을 텍스트로 정리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 신호를 받는 여러분들도 저처럼 꼭 보도지침을 읽어보고 지인들과 의견을 나눠봤으면 하네요! 모두 즐거운 수요일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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