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만 원 지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줍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 원 지폐 자체의 물리적 속성은 녹색 종잇조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 원 지폐가 만 원의 가치로 기능하는 것은 지폐가 매우 귀한 자질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것에 만 원의 가치가 있다고 믿고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폐가 아니라 금을 예시로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금 자체가 대단한 광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금을 귀한 것으로 인정해 주고 그 가치를 믿어 주기 때문에 금은 보석으로 기능합니다. 화폐의 본질은 이런 믿음이기 때문에 요즘 우리는 심지어 현금을 잘 들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이 통장에서 저 통장으로 돈이 옮겨 갔다, 혹은 옮겨갈 것이다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거래가 일어납니다. 계좌 이체나 카드 결제를 하면서 물리적으로 돈이 옮겨 가는 것을 보신 적은 없으실 겁니다.
그리고 돈의 이런 속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태평양의 사이판과 괌의 남서쪽 어딘가에 있는 '얩Yap'이라는 섬에 있습니다. 이 섬의 사례는 윌리엄 헨리 퍼니스 3세라는 미국 인류학자에 의해 기록되었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화폐경제학'이라는 책에 소개 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이 섬에는 금과 같은 금속 물질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신 돌을 돈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아무 녹색 종잇조각을 돈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처럼 얩 사람들도 아무 돌이나 돈으로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크고 단단하고 두꺼운 바퀴 모양으로 잘 다듬은 돌을 '페이fei(혹은 라이Rai라고도 합니다)'라 부르며 돈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 페이는 다른 섬에서 채석되고 가공된 뒤카누에 실려 얩 섬으로 운반됐고, 땅에서는 가운데 구멍에 막대기를 넣어 운반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쉽게 운반할 수 있는 무게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얩 섬 사람들의 경제 활동에서는 아주 재밌는 일이 일어납니다.
얩 섬 주민 A가 B에게 물건을 팔면서 B의 집에 있는 커다란 페이를 받기로 했을 때, 실제로 B는 A의 집에 페이를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대로 B의 집에 둔 채로 '이제부터 이건 A 것이다'라는 인정이 생겨나는 것으로 거래는 끝납니다.
보다 흥미로운 경우로, 거대한 페이를 소유한 한 부잣집의 일화가 소개돼 있습니다. 이 집의 조상이 다른 섬에서 아주 크고 값진 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돌을 카누에 싣고 얩 섬으로 돌아오던 중 폭풍우를 만났는데, 살기 위해선 그 돌을 바다에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폭풍우에서 돌아온 사람들 모두가 그 사람이 어마어마한 페이를 카누에 싣고 왔으며 폭풍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버렸음을 증언해 줍니다. 이 덕분에 이 집은 그 페이가 바닷 속에 있음에도 마치 그 페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부자로 인정 받고 살아갑니다.
얩 섬의 일화는 '화폐경제학'의 가장 앞 챕터에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밀턴 프리드먼은 우리 사회의 화폐도 얩 섬의 페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즉 화폐의 가치는 화폐가 가진 물리적 속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치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페퍼노트는 구독자 님에게 제안합니다. 우리 서로 큰 가치가 있는 사람들임을 믿어 주자고.
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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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살자
이글을 보니,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킬수 있는 자기계발이 제일 큰 투자라 다시 한번 생각하게되네요 ㅎㅎ
페퍼노트
또한 자신의 가치를 믿어주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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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노
저는 페퍼노트님이 큰 가치가 있는 분이라고 처음부터 믿어오고 있지요. ^ ^
Mia
어? 이차노 님은 언제부터 구독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지나가던 오랜 구독자 올림-
페퍼노트
두 분 모두 페퍼노트의 시작부터 함께 해주신 감사한 분들이랍니다 ㅎㅎ 앞으로도 좋은 내용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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