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로 채울 순 있는데 칠할 순 없는 나팔

부피는 정확히 π, 겉넓이는 무한대인 도형 '가브리엘의 뿔'을 알아봅니다

2026.08.08 | 조회 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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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한 통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그릇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그릇의 안쪽 벽을 그 페인트로 칠할 수 있을까요? 채웠다 비우기만 해도 벽에 다 묻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페인트를 부어 채우는 건 되는데, 그 페인트로 안쪽 벽을 칠하려고 하면 아무리 부어도 끝이 없다'라는 성질을 가진 도형이 있습니다. 이 도형의 이름은 '가브리엘의 뿔'입니다.

나팔을 부는 가브리엘
나팔을 부는 가브리엘

만드는 법은 간단합니다. y = 1/x 곡선을 x가 1 이상인 구간에서 그린 다음, 그걸 x축을 축 삼아 빙글 돌리면 됩니다. 입구는 반지름 1짜리 원이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가늘어지는 나팔 모양이 나옵니다. 이 나팔은 끝이 없습니다. 무한히 길게 뻗어 나갑니다.

가브리엘의 뿔
가브리엘의 뿔

그런데 이 무한히 긴 나팔의 부피를 적분해서 구해 보면 정확히 π가 나옵니다. 길이 단위를 미터로 잡았다면 3141리터쯤 되겠네요. 그 정도 양의 페인트가 있다면, 이 나팔을 가득 채우는 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겉넓이를 구해 보면 값이 무한대로 발산합니다. 즉 아무리 많은 페인트가 있어도 이 나팔을 다 칠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페인트로 채우는 건 가능한데, 페인트로 칠하는 건 불가능하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할까요?

학교에서 배운 공식으로 대략적인 셈을 해볼 수 있습니다. 원의 넓이 공식은 πr², 즉 반지름의 제곱에 비례합니다. 반면 원의 둘레는 2πr, 즉 반지름에 비례합니다. 나팔의 반지름이 1/x로 줄어들 때, 부피 쪽에서는 이게 1/x²의 합처럼 쌓이고 겉넓이 쪽에서는 1/x의 합처럼 쌓입니다.

그런데 1 + 1/4 + 1/9 + 1/16 + ... 은 유한한 값으로 수렴하는 반면, 1 + 1/2 + 1/3 + 1/4 + ... 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무한대로 발산합니다. 부피는 수렴하는 쪽에, 겉넓이는 발산하는 쪽에 걸린 것입니다. 

이 결과를 처음 얻은 사람은 갈릴레이의 제자였던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입니다. 1641년에 이 사실을 알아냈는데 놀랍게도 미적분도 발명되기 전이었습니다. 무한히 뻗은 물체가 유한한 부피를 갖는다는 결론은 당시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무한은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니까요. 토머스 홉스는 "이걸 감각으로 이해하려면 기하학자나 논리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미쳐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원리는 그렇다 치고, 그래서 어떻게 페인트를 담을 순 있는데 페인트로 칠할 순 없는 걸까요? 담을 때 다 칠해지는 게 아닌 걸가요? 모순이 생긴 이유는 '채운다'와 '칠한다'에 서로 다른 페인트를 갖다 쓴 데에 있습니다.

수학적으로 보면, 겉넓이가 무한이라고 해서 페인트가 무한히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필요한 페인트의 양은 넓이 곱하기 두께인데, 무한대 곱하기 0은 값이 정해지지 않는 부정형이기 때문입니다. 넓이 1짜리 타일이 무한히 늘어서 있어도, n번째 타일을 두께 1/n²로 칠하면 총 페인트는 π²/6이라는 유한한 값에서 멈춥니다. 나팔도 마찬가지로 페인트를 얼마나 얇게 바르느냐에 따라 유한한 양으로 도색이 끝납니다.

물리적으로 보면, 진짜 페인트는 두께가 0이 아니고 분자 크기도 있습니다. 나팔의 목은 무한히 가늘어지기 때문에, 어느 지점부터는 페인트 분자가 아예 들어가질 못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의 페인트로는 칠하는 것도 안 되지만 애초에 채우는 것도 안 됩니다. "채우는 건 되는데 칠하는 건 안 된다"는 상황은 두 세계의 페인트를 섞어 썼을 때만 생기는 것입니다. 0.999... = 1인 진짜 이유에서도 그랬듯, 무한이 끼면 정의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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