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보셨나요? 저는 지난 주에 보고 왔습니다. 스포일러는 없으니 안심하세요. 영화에 '바다에서 온 사람들(People from the Sea)'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합니다. 등장인물들이 두려움을 담아 입에 올리는데 호메로스의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입니다. 다만 아주 없는 얘기를 지어낸 건 아닙니다. 이른바 '바다 민족(Seo Peoples)'이 오디세우스가 살았을 법한 시대에 나타나 여러 나라를 공포에 떨게 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1200년 무렵, 동지중해 세계가 통째로 주저앉습니다. 이집트와 대등하게 겨루던 히타이트 제국이 사라지고,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궁전들이 불타고, 시리아 해안의 부유한 교역 도시 우가리트는 파괴된 뒤 다시는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문자와 기록이 끊기고, 지중해 동쪽의 강대국 상당수가 이 시기에 자취를 감춥니다. 역사가들이 '후기 청동기 붕괴'라고 부르는 사건인데요. 그 한복판에서 우가리트의 마지막 왕 암무라피가 이웃 나라에 보낸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보십시오. 적의 배들이 왔습니다. 제 도시들은 불탔고, 그들은 제 나라에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제 모든 군대와 전차가 히타이트 땅에 있고 제 모든 배가 루카 땅에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 나라가 저 혼자 내버려져 있습니다.
그 '적의 배들'을 그나마 기록해 둔 쪽은 이집트였습니다. 파라오 메르넵타와 람세스 3세가 비문에 이들과 싸운 일을 새기면서 펠레세트, 체케르, 셰켈레시, 데니엔, 셰르덴, 에크웨시 같은 이름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무시무시한 전투 민족이 나타나서 동지중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나보다'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도 모릅니다. 이집트 기록에도 이 집단들을 하나로 묶어 부르는 이름조차 없습니다. 1855년 프랑스 이집트학자 에마뉘엘 드 루제가 '바다 민족'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그제서야 이들을 바다 민족이라 묶어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바다민족'은 누구였을까요. 알 수는 없고 추측만 무성합니다.
먼저 민족 대이동설입니다. 메디넷 하부의 육상 전투 부조에는 깃털 관을 쓴 적들 사이로 소달구지에 여자와 아이를 태운 행렬이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무장한 약탈대가 아니라 살림을 통째로 싣고 새 땅을 찾아 나선 이주민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정설처럼 통했습니다.
해적·용병설은 정반대입니다. 로버트 드루스 같은 학자는 '민족 대이동'이라는 서사가 비문에 적힌 내용이 아니라 후대 학자들의 해석일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들을 지중해 각지에서 흘러든 약탈자 무리로 봅니다.
아나톨리아 출신설, 서지중해 출신설 등도 있습니다. 루카는 아나톨리아 서남부 해안(훗날의 리키아), 테레시는 아나톨리아의 티레니아인, 셰르덴은 사르데냐, 셰켈레시는 시칠리아 하는 식으로 이름의 유사성을 근거로 합니다. 그중 에크웨시와 데니엔을 각각 아카이오이(Achaioi), 다나오이(Danaoi)와 연결짓는 가설이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둘 다 호메로스가 트로이아로 쳐들어간 그리스 연합군을 부를 때 쓴 단어입니다. 영화 오디세이와 닿아 있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바다 민족이 철기를 갖고 청동기 문명을 쓸어버린 게 아니냐 하는 주장도 있는데, 여러 고고학적 근거 상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합니다.
요즘은 애초에 '하나의 민족'을 찾는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두 파라오가 남긴 명단에 겹치는 이름이 셰켈레시 하나뿐입니다. 같은 민족이 두 번 쳐들어온 게 아니라, 그때그때 다른 조합이 뭉쳤다 흩어졌다 했다는 걸로 볼 수 있습니다. 내륙의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도 같은 시기에 나란히 흔들렸다는 점을 들어, 이들을 붕괴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으로 보는 시각도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미 가뭄으로 말라붙은 땅에서 살 곳을 찾아 떠밀려 나온 사람들이라는 거죠.
마지막으로 하나. 이 이름들 가운데 정체가 가장 분명하게 밝혀진 쪽이 펠레세트,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인입니다. 이들이 정착한 땅 '필리스티아'는 그리스어 팔라이스티네를 거쳐 로마의 속주명이 되고,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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