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81] 🥦 인생 첫 마라톤 풀 코스 썰 푼다

반갑습니다, 콜리🥦입니다. 가을은 축제의 계절이라고 하던가요. 조그만한 동네 잔치부터 지자체나 대기업이 벌이는 축제까지,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꼭 그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야외 활동하기 더없이 좋은 계절이니 지금 이 계절을 만끽하면 좋겠네요. 저는 지난 주말, 서울을 가로 지르는 2024 JTBC 서울마라톤에 다녀왔습니다. 오늘 PRIIISM에선 이 이야기를 해볼게요.

첫 풀 코스였습니다. 몇 년 동안 취미로 달리기는 했지만 동네를 5km 남짓 뛰는 게 고작이었는데 42.195km라니요. 접수하고 나서도 막연하게만 느껴졌습니다. 2년 전과 올해 초 하프 코스를 뛰어보긴 했습니다만 풀 코스는 그 두 배를 달려야 하는 것이고, 그 갑절은 힘들 텐데 엄두가 나지 않았죠. 하지만 날짜가 정해져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기 부여가 되더군요. 여름내 부지런히 달렸습니다. 그동안 흘린 땀의 결과를 이윽고 보여줄 때가 온 것이었죠.

대회 날이 밝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라톤 대회 중 하나답게 집결지인 상암월드컵경기장이 정말 붐볐습니다. 달리는 초반에는 앞 사람과 발이 엉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정도였어요. 상황이 좀 나아지자 몸에 이상이 없는지 신경 쓰거나 무념무상인 상태로 달렸습니다. 35km를 넘어가니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걸을까, 하는 시험에 여러 번 빠졌습니다. '아이고 조상님, 들리십니까 보이십니까, 저 좀 밀어주십시오.' '뭐한다고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절로 들었습니다.

그래도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마침내 '올림픽공원'이 적힌 도로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끝이 보이니 힘이 나더라고요. 다시 속도를 올려 내달리니 피니시 라인이 점점 다가왔습니다. 으아아, 그렇게 첫 마라톤 풀 코스를 무사히 완주해냈습니다. 연초만 해도 제가 올해 풀 코스를 뛸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단조로운 일상에 스스로 변주를 주고, 차근차근 준비해서, 계획한 것들을 잘해냈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스러워요.

아, 음악이요? 마라톤을 뛰며 들으려고 아주 넉넉하게 준비해뒀어요. 4시간도 훌쩍 넘는 분량으로 재생 목록을 만들어놨는데, 10곡도 못 듣고 이어폰이 방전되어 버렸네요. 오히려 그래서 들었던 몇 곡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풀 코스를 달리는 동안 힘이 되어준 세 곡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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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Killers - When You Were Young

대략 4시간을 달려야 했다. 내 무선 이어폰으로는 배터리 한계로 달리는 내내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처음부터 이어폰을 착용하고 달리되, 음악은 25km 이후부터 듣기로 계획했다(그 전까지는 러닝앱을 켜고 달린 거리, 속도 등 안내 음성만을 듣는다). 테스트를 해본 것은 아니고 대충 감으로 그렇게 정했다. 무념무상인 채로 달리니 어느덧 25km를 지났다. 아직 한참 더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힘이 빠지려고 했다. 바로 지금을 위해 재생 목록을 미리 만들어놓았다.

이어폰을 조작했다. '딸깍' 소리와 함께 노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임의 재생에서 첫 번째로 선택된 곡은 킬러스(The Killers)의 <When You Were Young>. 2006년 발매된 킬러스를 대표하는 노래 중 하나다. 3분 30초를 조금 웃도는 재생 시간 내내 끝까지 직선적인 곡이다. 제목에서 감지되다시피 청춘의 노래다. 노랫말은 희망과 좌절, 사랑과 상처 따위를 다룬다. 그런데, 마라톤 중에 들으니 달리기와도 퍽 잘 어울리는 것 아니겠는가. 알고 고른 건 아니었지만 아무렴 좋았다.

Can we climb this mountain, I don't know (우리가 이 산을 오를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

Higher now than ever before,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보여)

I know we can make it if we take it slow (서두르지 않으면 우린 해낼 수 있을 거야)

Let's take it easy, easy now, watch it go (자자, 침착하자. 침착하게 가보자고)

🥦 Chumbawamba - Tubthumping

앞서 소개한 킬러스 노래는 가사 뜻이 그렇게 마라톤과 잘 맞아들어갈 줄 미처 몰랐다. 그냥 곡 분위기 때문에 고른 것이었다. 반면 이 곡은 분위기는 물론 가사까지 42.195km 여정에 들어맞기 때문에 주저 없이 골랐다. 영국 밴드 첨바왐바(Chumbawamba)의 <Tubthumping>이다. 1997년에 발매돼 축구 게임 배경 음악에 삽입되어 널리 알려졌다. 고집스럽게 반복되는 후렴구가 많이들 익숙할 것이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I get knocked down (나가 떨어지더라도)

But I get up again (나는 다시 일어설 거야)

You're never gonna keep me down (넌 결코 날 쓰러뜨릴 수 없어)

이어폰 너머로 응원하러 나온 사람들의 파이팅 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 러닝 크루 깃발을 들고 동료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보였지만 그냥 응원하러 나온 것 같은 사람들도 보였다. 귀하디 귀한 일요일 아침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길가에 응원하러 나와 있는 이유는 뭘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러는 동안에 1km, 2km 앞으로 나아갔다. 많이 왔지만 피니시 라인을 보려면 아직 멀었다. 발걸음이 슬슬 무거워져 왔다.

🥦 Kanye West - Runaway

사실 유유자적 달리는 게 아니라면, 뛰고 있을 때 가사가 귀에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마라톤 같은 대회에선 달리기에 집중하느라 가사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러므로 달리기 대회에서 듣기 좋은 곡은 가사보다 멜로디나 비트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칸예 웨스트(Kanye West)를 상징하는 곡 중 하나인 <Runaway>는 순전히 비트 때문에 골랐다.

키보드 소리가 적막을 깬다. 매우 단출하지만 강렬하다. 뒤이어 드럼 비트가 연주된다. <Runaway> 드럼은 기본적으로 셔플(Shuffle) 리듬인데 하이햇(Hihat) 강약 조절이 그야말로 절묘해서 리듬감이 두드러진다. 후반부는 보코더(Vocoder, 사람 음성을 기계음으로 출력하는 키보드 형태의 악기)를 비롯해 현악, 일렉트릭 기타 등 다채로운 악기를 활용하여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Runaway>가 재생된 게 35km쯤이었던가. 다리가 천근만근, 온몸이 아팠다. 청각적 즐거움 따윈 어림도 없었다. 급기야, 곡 절반쯤을 지나는데, '똥또로동', 에어팟이 맥없이 방전되었다. 메아리, 아니, 환청처럼 비트가 귀에 맴돌았다. 이젠 정말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드디어 올림픽공원이 적힌 도로 표지판이 나타났다. 마지막 힘을 끌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피니시 라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통과했다. 그렇게 42.195km를 무사히 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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