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2] 🌻 시월의 어느 멋진, 아니 추운 날에

시월의 어느 목요일에 편지를 쓰고 있는 숑🌻입니다. 구독자님, 빙하기가 도래한 한반도에서 건강 잘 지키고 계신가요? 저는 틈날 때마다 따뜻한 티백을 우려 인후를 지지며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백신 2차 접종을 맞았어요. 뜻밖의 추위와 차례로 돌아오는 접종 탓에 유독 주변인의 안부를 자주 묻는 가을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월에 태어난 제게 사계의 흐름은 가을방학의 노래 제목처럼 <가을 겨울 봄 여름>입니다. 달력의 첫 장은 본디 1월이지만, 제 생의 첫 달은 10월부터 시작하는 셈이죠. (이례적인 올해를 제외하고는) ‘축복’이란 단어를 자주 곱씹게 되는 가을 날씨 또한 사랑하기에 시월은 그 자체로 제게 특별한 단어입니다.

김동규가 부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란 노래도 무척 좋아합니다. 이렇게나 근사한 곡에서 수많은 순간 중에서도 하필 시월을 노래한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져요. 그런 의미로 오늘은 ‘시월이 떠오르는 노래’ 세 곡을 골라봤습니다. 멋대로 의미 부여한 노래도 있지만, 그만큼 제게는 의미를 주는 존재로 되돌아오더라고요. 앞으로는 구독자님과 함께 들었다는 의미가 더해진 곡들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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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리스파이스 - 항상 엔진을 켜둘께

오래 전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포인트는 어딘가로 달려가고 싶게 하는 도입부도, 근사한 기타 연주도 아니라 노랫말에 등장하는 ‘천평궁’이었다. 천평궁은 천칭자리(바로 나!)를 뜻한다. '아직은 어두운 하늘 천평궁은 빛났고'라니, 틀림없는 가을 풍경이구나 싶었던 것이다.

찾아보니 밤하늘은 태양의 반대쪽에 보이기 때문에 천평궁은 정반대 계절인 봄에 관찰할 수 있는 별자리라고 한다. 가을이 아니라 봄 밤이었다니... 괜히 실망스럽고 문송한 기분이 들었지만, 맨 처음 '천평궁'이란 단어를 가사에서 맞닥뜨렸을 때의 심상과 반가움으로 이 노랠 기억하기로 했다. 나에게만큼은 시월과 관련된 노래인 것이다.

제목과 노랫말의 ‘켜둘께’는 맞춤법상 틀린 표현이지만 ‘켜둘게’로 고치면 어딘가 밋밋하게 느껴진다. 휴일을 앞둔 밤, 어두운 새벽의 바닷가에서 공회전을 무릅쓰고 항상 엔진을 켜둘 만큼의 순애보라면 반드시 ‘켜둘께’라고 쓸 것만 같다. 시적 허용이라고 해야 할까.

화자는 기다리던 상대가 돌아온다면 항상 듣던 스미스(The Smiths)를 들으며 저 멀리로 떠나자고 권한다. 밤바다의 낭만을 닮은 그 음악을 함께 듣고픈 사연이 무얼지 궁금해진다. 항상 엔진을 켜두고 기다릴 만한 나의 무언가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아무려면 시월의 사색에 꼭 어울리는 노래다.

🌻 가을방학 - 난 왜 가방에서 낙엽이 나올까

내 20대의 무수한 조각들을 가을방학의 노래에 빚져왔다. <취미는 사랑>을 시작으로 신보를 부지런히 챙겨 듣고 공연장에 드나들었다. 보컬 계피의 목소리는 가장 사랑하는 계절을 실제보다 더 진하고 풍성하게 감각하게 했다. 어느 미래에 돌아보더라도 나의 모든 가을엔 변함없이 그의 목소리가 배어 있을 것이다.

올해 봄, 가을방학이 해체했다. 나머지 한 멤버의 성추문 보도를 접한 이후 그들의 노래를 소비하지 않던 참이었다. 365일 중 가을방학의 노래를 들은 날이 안 들은 날보다 훨씬 많았기에 실로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다 "노래로 위안 받았던 순간의 기억은 무엇에도 침범받지 않을 오로지 여러분의 것"이라는 계피의 글을 읽고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고작 며칠 만에 재생한 노래들이 처음 들은 듯 속도 없이 좋았다. 오래 참았던 숨을 터뜨릴 때처럼 한편으로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난 왜 가방에서 낙엽이 나올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마침 '사랑은 보냈지만 마지막 남은 메시지 하나는 차마 지우지 못하는 이의 심경을 그린 곡'이라는 소개말이 적혀있다. '가을방학'이 시기를 나타내는 단어라 더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을방학의 해체는 내게 마치 한 시절의 끝을 상징하는 것 같아 괜히 서럽기도 했다. 내게 있어 '지울 수 없는 한 건의 메시지'라면 그들의 노래로 무사히 살아남은 나의 하루 자체다. 계피가 남긴 글처럼, 무엇도 침범할 수 없도록 묵묵히 지키는 일이 추억에 대한 최선일 것이다.

🌻 이소라 - October Lover

이소라는 F/W 시즌 플레이리스트의 제왕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늦가을부터 시작해 코트를 드라이크리닝 맡기기 전까지, 아침부터 코끝이 시리는 날씨면 하릴없이 그의 목소리가 떠오르곤 했다. 마치 밀도가 아주 높은 함박눈이 고요히 지붕에 쌓이듯 그만의 분위기로 세상을 폭 덮는다. 거스러미처럼 돋아난 심술과 궂은 마음까지 큰 품으로 포용하는 듯한 목소리다.

<October Lover>가 발매되던 날의 저녁이 지금도 선연히 떠오른다. 2018년의 시월 초였고, 덜컹이는 버스에서 유선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창밖 풍경에 필터 하나를 겹친 듯 세상이 포근하게 보였다. 이제는 늦가을이 아닌 초가을부터 이소라의 목소리가 매년 떠오르리라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처음에는 '시월에 하늘'이라는 가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시월의 하늘'이어야 더 자연스럽지 않나? '시월에 하늘'이면 뒤의 문장이 이어지다 만 느낌이다. 하지만 되풀이해 들을수록 시월애(時越愛)가 떠오르는 글자부터 뭉근하게 남는 여운, 둥글게 깎은 듯한 어감까지 그 다섯 글자가 참 맘에 들었다. 외투 깃을 여미느라 평소보다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가 적었지만 남은 나날이나마 머릿속 한쪽에 책갈피처럼 잘 끼워두려 한다. 바로 오늘, 시월에 하늘을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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