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우체국 앞에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

2026.10.12 | 조회 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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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님, 2주 만에 편지를 씁니다. 10월의 시작은 어떠셨어요? 저는 바삐 쏘다니고 있습니다. 지난주엔 답사 일정으로 제주에 있었고요. 지금은 통영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두 지역의 10월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박경리, 김춘수, 윤이상, 전혁림, 유치환. 통영이 낳은 숱한 예술가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어제는 통영 빌드업을 하려고 오랜만에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를 보았어요. 제목은 ⟪하하하⟫지만 볼 때마다 어이없어 피식거리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백미는 김상경 배우 꿈에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는 장면이요. 그 언젠가 시인 백석의 눈에 비친 ‘옛 장수 모신 사당’을 2026년 10월, 저도 볼 수 있다는 게 참 애틋하고 아련해요. 이 세상 살다간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모을수록 발길 닿는 땅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통영엔 편지하면 빼놓을 수 없는 청마 유치환의 흔적도 깃들어 있네요. 가을 우체국 앞의 풍경을 여러분께 보냅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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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듣고 가수 윤도현의 노래를 떠올리셨나요? 노래 속 우체국은 파주 광탄면에 있는 작은 우체국이라고 해요.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작사・작곡한 김현성 씨가 우연히 우체국을 지나다가 곡의 영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김현성은 가사에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술은 어디에나 있는 사랑을 자기만의 언어로 바꾸어 부르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김현성과 윤도현은 파주 지역 노래동아리 ‘종이연’에서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종이연의 막내였던 윤도현에게 곡을 주기로 한 어느 날, 누군가 노래에 호감을 표합니다. 당시에도 대중에 큰 사랑을 받던 영원한 가객 김광석입니다.

MBC 다큐스페셜 <나는 지금 김광석을 부른다 중 일부>
MBC 다큐스페셜 <나는 지금 김광석을 부른다 중 일부>

김광석의 대표곡 중 하나인 ‘이등병의 편지’ 역시 김현성의 곡이라 두 사람은 친분이 있었습니다. 유명 가수와 무명의 신인 중, 김현성은 이미 한 약속대로 윤도현에게 곡을 건넸고 쌀쌀한 가을 우체국 앞의 풍경이 완성됐습니다. 김광석 버전의 가을 우체국은 어떤 인상일지 궁금해지네요.

중앙동 우체국, 수천 통의 편지

청마 유치환 [출처 : 가톨릭일꾼]
청마 유치환 [출처 : 가톨릭일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행복> 중

절절한 시의 내용은 실화를 기반으로 합니다.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유치환은 통영여중 국어 교사로 취직합니다.

이영도 시인 [출처 : 국제신문] 
이영도 시인 [출처 : 국제신문] 

학교엔 가사 교사이자 시인인 이영도가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반한 유치환은 매일 같이 이영도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냅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예요. 유치환은 이미 가정을 꾸린 상태였고 이영도는 남편이 지병으로 사망한 뒤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대놓고 사랑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 그럴수록 차오르는 사랑을 편지로 전한 것만도 수천 통에 달합니다. 1946년부터 1950년 사이의 편지는 불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67년 2월까지 계속된 편지는 유치환의 교통사고로 끊어집니다. 이영도는 그간 모아온 유치환의 편지 중 200통을 모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출처 : 알라딘
출처 : 알라딘

20년간 편지를 모아온 마음을 미루어 보면 일방적인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영도는 초반엔 우정일 거라 생각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앞날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유치환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자신을 보며 우정 이상의 마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책은 발간되자마자 2만 부 넘게 팔리며 독자들에게 사랑 편지 엿보는 재미를 선사했는데요. 판매된 책의 수입금은 문학상 기금으로 사용되었다니 아름다운 결말이네요. 

이 이야기를 마냥 아름답게만 들을 수 없는 까닭은 20년간 이어진 편지를 지켜보아야 했을 유치환의 아내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유치환은 사랑하였으므로, 사랑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하는데요. 그의 아내도 그랬을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그랬다는 답을 받아도, 아니었다는 답을 받아도 서글플 것 같지만요. 

 

가을 단풍 지나 늦가을 낙엽처럼 찬란하고 쓸쓸한 사랑 이야기가 묻어나는 통영중앙우체국입니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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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혼자 여행을 가면 꼭 편지를 씁니다. 이곳에 함께 오고 싶었던 사람에게 아쉬움과 그리움을 담아 편지를 쓰다 보면요. 편지를 쓰는 행위는 받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쓰는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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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의 편지로 남은 통영중앙우체국에서 편지를 보냅니다. 이야기가 깃들어 유적이 된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전했을까요. 하나하나 탐스럽게 영근 사랑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마음이 벅차 와요. 85번째 편지를 보내는 저도, 편지를 쓰는 끈기만큼은 유치환을 본받아보려 합니다. 지치지 않고 퍼담아 열심히 편지하겠습니다 :) 편지의 존재는 늘 받는 사람으로 완성되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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